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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10년 성탄1강(사7:1-25)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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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571회 작성일 10-12-0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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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성탄 제 1 강                                                                말씀 이사야 7:1-25요절 이사야 7:14
임마누엘“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지난 한 해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무기력하고 연약하고 낙담할 때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위로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 보고 감사를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이번에 연평도에 170발의 폭탄이 떨어지고 4명이 사망하면서 우리나라 국민의 안보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비율이 전체의 82%에 달했습니다. 이는 6.25 동란 이후 최고점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유다 왕 아하스 때에도 있었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하였다는 말을 듣고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심히 흔들렸습니다. 유다 왕 아하스는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지만 방어를 잘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이미 앗수르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아람과 에브라임의 동맹군을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이방 왕을 더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밉게 여긴 아람과 북이스라엘 왕은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그들은 유다에 반앗수르파 인물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6절을 보면 그는 다브엘의 아들이었습니다. 세계정세는 자국의 유익을 위해서 철저하게 동맹을 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안보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에게 안보에 대한 두려움 외에 또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학생들은 취직 문제가 심각합니다. 학생들은 용돈이라도 벌기를 원합니다. 경제가 잘 풀리면서 일자리 창출이 늘어나고는 있는데 여전히 청년들이 취직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자기 마음에 드는 직장을 갖는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취직이 되어야 장가도 가고 장래를 계획할 수 있습니다. 장래가 불안정하니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개인주의 시대에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혼자 식사하고, 혼자서 공부하고, 외로움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받으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대화의 기술을 배워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이 있을 때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유다 왕과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그의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아하스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아하스 왕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서 물을 예루살렘 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악한 꾀로 유다를 대적하여 무너뜨리고자 하지만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65년 내에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12년 후에 앗수르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경고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9b).” 

  두려움의 반대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딸로 인해서 자기에게 나아온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굳게 믿으면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약하게 믿고 강하게 믿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어도 대충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다리 걸치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을 던져서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연기나는 부지깽이는 타다가 꺼져버릴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가 BC734년 인데 2년 후인 BC 732년에 아람(현 시리아)이 망하고, 12년 후인 BC 722년에 앗수르의 바니팔 왕이 북이스라엘에 쳐들어 와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굳게 믿고 견고히 서라는 것입니다.

  한 사모님은 남편이 사기죄로 구치소에 들어가자 매우 고통스러워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목자님을 고소한 사람들은 사모님께 수천만원을 내고 타협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견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받으시고 목자님을 구치소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하시고 돈도 손해 보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모님이 타협을 하고 돈을 내주었다면 믿음도 배우지 못하고 앞으로의 생활이 난감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어려움을 견디어내면서 승리하였습니다. 믿는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북한을 두려워하지만 북한도 따지고 보면 꺼져가는 부지깽이에 불과합니다. 북한 권력의 부도덕함과 경제적인 어려움과 내부 불만으로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북한의 비대칭전력은 한국보다 절대 우위에 있습니다. 그들은 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동맹관계로 인해서 전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미국보다 미국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더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하도록 북한을 채찍으로 쓰고자 하시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마음을 강하게 먹고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서로를 믿으며 하나가 될 때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신뢰관계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원수를 이기는 길도 결국 악이 아니라 사랑임을 믿습니다. 북한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권력층의 악에 대해서는 단호한 자세를 취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은 수백만이 죽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우상숭배를 깨뜨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더 강력한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기회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북한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아들을 함께 보내심으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사야의 아들 이름은 스알야숩인데 남은 자들은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유다는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으로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앗수르는 힘이 있어서 유다를 아람과 이스라엘의 공격에서 자유롭게 하지만 결국 그들이 유다에 큰 해를 끼칩니다. 앗수르가 유다를 멸망시키지는 않았으나 앗수르에 무거운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아람을 이기고 르신을 죽이고 나서 아하스 왕은 다메섹으로 앗수르 왕을 만나러 갔습니다(왕하 16:7-10).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본 제단이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그려서 예루살렘에 비슷한 것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인들의 것을 모방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렇게 하니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매우 슬프시게 하고 유다의 멸망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상실과 굴욕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믿음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에게 한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양극단을 말함으로써 그 사이의 모든 것을 다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하스 왕이 기적을 요청함으로써 이사야의 말이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북쪽 연합이 유다를 패배시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믿음을 보일 때 매우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가 힘있는 사람에게 나아가기보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믿음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깊어가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는 위대한 일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생길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취직도 되고,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12).” 아하스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은 경건해 보입니다(신6:16).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이사야를 믿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그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유다는 결국 망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두려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 돌아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북한의 위협이 높아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미국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돈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우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도전할 때 양을 얻고 제자 양성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에게 있어서 현실이 너무 커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에 눌려서 자포자기하기도 합니다. 아하스 왕은 앗수르를 의지하고자 하는 생각이 매우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받고 변화될까봐서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으면 무슨 재미로 산단 말인가 생각합니다. 지금 즐기는 죄의 쾌락을 놓기가 싫어서 적당히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면 자기를 다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야 할 것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회색신자, 혼합주의자, 경계선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한 신앙생활로 인해서 하나님은 역겨워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토하여 내 치시고 촛대를 옮기십니다.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세상을 따를 것인지 머뭇머뭇거리지 말고 믿음의 결단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결단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의 불신을 보고 탄식합니다.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13).” 불신의 사람들을 볼 때 저도 괴롭습니다.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데도 믿지 아니하면 괴롭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직면할 때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있고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쾌락을 추구하면서 타협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상을 볼 때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한 선교사님이 남편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보여준 믿음을 생각할 때 깊은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분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남편을 돌보면서 믿음의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돌아와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서 전신마비가 되어 누워있는 남편을 볼 때 그는 불운의 희생제물이 된 것 같았습니다. 누가 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고통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불공평하게, 이유 없이 고통을 받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로 고통당하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숨만 쉬고 움직일 수 없는 남편을 2년을 병원에서 간호했지만 결국 하나님 나라로 간 남편을 생각할 때 얼마든지 하나님을 불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사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사랑으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남편을 붙잡아 주시고 위대한 정복자로 빚어가셨습니다. 의심과 절망을 정복하고 넉넉히 이기도록 빚어가셨습니다. 살아있고 영원한 소망을 그의 마음에 충만히 채우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자녀들이 계승하여 그의 딸은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었고 아들은 위대한 캠퍼스 지성인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그 백성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불신 가운데 있는 그 백성들에게 무슨 징조를 주십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은 불신에 빠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친히 하실 일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처녀는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시골 처녀 마리아였습니다.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이후 700년 뒤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도 마태는 이 예언의 말씀이 응했음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1-23).”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죄없는 분으로서 우리의 대속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죄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고 하십니다. 죄 사함을 주십니다. 영생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친히 내가 당해야 할 고통보다 훨씬 더 극심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내 마음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이해하지 못할 슬픔과 고통은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집에 있건, 학교에 있건, 직장에 있건, 멀리 외국에 나가있건 나와 늘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와 늘 함께 하심으로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내가 외로움을 느낄 때에도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심으로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을 때에 나를 변호해 주십니다. 나와 늘 함께 하셔서 나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의 참된 만족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셔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때로는 훈련하시고 징계하십니다.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마음 속 깊은 소원까지 알고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사건들을 통해서 가르쳐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깨우쳐 주십니다.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볼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뿐만 아니라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버릴지라도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축을 하는 동안도 함께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 슬픔과 고통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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