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12강(15,16장) 서로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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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12강
말씀 로마서 15,16장
요절 로마서 15:7
서로 받으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우리는 이제 로마서 마지막 장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가을 학기 동안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서로 받으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동역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우리가 행복하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나를 받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가족 안에서도 갈등이 있습니다. 학교와 직장에서도 서로 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이곳에서도 갈등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생활 습관과 추구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있습니다. 이런 갈등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찬성과 반대가 있습니다. 어떤 의견에 대해 반대한다고 해서 틀리거나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건강한 공동체일수록 반대의견을 잘 들어줌으로써 다시 점검하고 실수를 줄이며 더 좋은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한 마음으로 일을 할 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서 음식과 날짜를 지키는 것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중심적으로 생각하거나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 능력있는 자,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마치 자기 짐처럼 짊어져야 합니다. 내 유익, 내 행복보다 상대방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내 대신 욕을 먹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반복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계속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집안에 들어오면 옷을 벗어서 아무데나 두는 사람은 항상 그렇게 합니다. 정욕적인 사람은 항상 사람의 마음을 호리는 성향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해서 함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마다 그 죄를 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연약함을 감당해 주십니다. 사람마다 연약한 점들이 다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감당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오래 오래 참아주십니다. 우리가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깨닫지 못할 때는 사건이나 사람을 통해서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난이란 것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25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75세에 믿음생활을 출발했지만 처음에는 기고, 다음에는 걷고 나중에는 달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사람을 오래 참으시면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된 습관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훈련하시고 때로는 시련을 당하게 하시지만 반드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안위해 주십니다. 시련을 잘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오십니다. 하나님의 안위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위로는 더 큽니다. 고난을 당해본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고난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은 사람들은 내면이 강해져서 어떤 사람들도 관용하며 조화를 이루며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둘째, 서로 받아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이 나를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만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경건치 않을 때, 원수 되었을 때받아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조금이라도 판단하고 무시했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천하고 비참한 죄인을 받으사 죄사함을 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양한 죄인들을 받아들이심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형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형제를 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먼저 나를 알고 형제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배웠듯이 사람은 성격 유형이 있습니다. 주도형, 사교형, 안정형, 신중형이 있습니다. 각 성격유형별로 강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장점만 있고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약점만 본다면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약점만 본다면 항상 갈등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약점과 함께 그 장점을 볼 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도형의 사람들은 일을 좋아합니다. 사람중심이 아니라 일 중심이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잘합니다. 그들은 결단력이 있습니다. 단호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그들은 집안 청소를 깨끗하게 잘 합니다. 잘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직관력이 뛰어납니다. 결과를 바로 예측합니다. 그들은 목표지향적이고 추진력이 있고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도형의 사람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 중심이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소홀합니다.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과정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열을 잘 받습니다. 참을성이 부족합니다. 또 생색을 잘 내고 자만심이 있습니다. 삶에 여유가 없고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을 빨리 하기 때문에 실속이 없습니다. 때로는 원칙을 무시하고 말이 거칩니다. 말로 인해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교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호기심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잘 만들어냅니다. 이들은 재미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재미가 없으면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항상 변화를 추구하고 다양한 경험을 즐깁니다. 사교형의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낙천적인 기질이라서 고난 앞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교형의 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분파입니다. 일을 해도 산만하게 합니다. 말을 해도 부풀려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체계적이기 않습니다. 말을 해도 서론, 본론, 결론이 없습니다. 너무 말이 많아서 본말이 전도되기 쉽습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안정감이 있습니다. 우리 센터에 많은 분들이 안정형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심이 있습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일보다 사람 중심입니다. 관계중심입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은 먹는 것, 자는 것, 갖는 것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느린 환경 속에서 깊은 잠재력,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일을 해도 천천히 합니다. 옷을 입어도 양말을 신는데 10분씩 걸립니다. 안정형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속이 터집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은 운동을 싫어합니다. 등산과 여행을 싫어합니다. 여행을 가라면 그 고생을 왜 사서 하느냐 그러느니 집에서 쉬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해줍니다. 이들은 직접적인 말보다 간접대화법을 씁니다. “아니요”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정형의 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격식이 없습니다. 입는 것에서 자유롭습니다. 옷을 벗으면 아무데나 던져버립니다. 이들은 무슨 일이든지 느립니다. 좋다, 싫다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핵심을 비켜갑니다.
신중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완벽주의자들입니다. 원리원칙대로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비교 분석하여 신중한 선택을 합니다. 남에 대한 배려심이 깊습니다. 이들은 한번 신뢰하면 끝까지 신뢰합니다. 그러나 한번 눈에 안 들면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정확합니다. 숫자에 밝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화를 하면 육하원칙에 따라서 합니다. 이들은 예의가 바르고 정리정돈을 잘 합니다. 집안은 깔끔합니다. 단순합니다. 그러나 신중형의 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용서를 못하는 기절이 있습니다. 높은 기준으로 인해서 까다롭습니다. 이들은 혼자 있는 것을 즐기다보니 우울한 기질이 있습니다. 원리원칙이다 보니 재미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다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단점보다 장점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살리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주도형의 사람은 매사에 책임을 떠맡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느긋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갖도록 여유있게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사교형의 사람은 학교와 가정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운 다음에 끈기있게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할 때 너무 흥분하지 말고 핵심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 싫은 소리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면 자기를 싫어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은 필요하면 주도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서 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결정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행동해야 합니다. 화가 났을 때 화난 감정을 속으로 삭이기보다는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주에 한 가지씩 자신의 감정을 채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중형의 사람은 기대수준을 약간 낮추는 것이 좋습니다. 하루 일정을 계획하는데 융통성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긴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을 회피하기보다 직면하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좀 더 자주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기보다 다른 사람과 더 많이 어울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집안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점 보다는 장점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강점을 살려서 다른 사람의 약점을 감당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예를 들어 안정형의 사람은 사교형의 사람들을 대할 때 그에게 너무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변화에 적응해 갈 수 있도록 조금 천천히 늦춰주세요. 이 일을 할 때 내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교형이 말만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을 때는 분명히 말해 주어야합니다. 사교형이 이야기할 때는 끝까지 들어주어야합니다. 우리는 각자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해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비결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 주면 됩니다. 나의 강점으로 다른 사람의 성격 유형에 맞추면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다른 생각과 의견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생각들을 나누고 이해하고 갈등을 해결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라(14-33) :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의 어떤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신앙이 성숙하고 신앙과 생활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가운데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줄 수 있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몇 가지를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편지를 대략 썼는데도 이렇게 치밀하고 영감이 넘칩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에게 영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복음 진리를 상기시켜서 복음진리 위에 굳게 세우고자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만민 구속 역사에 그들을 동참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복음의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임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양육하고 훈련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변화나 양들의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도구로 사용하셨는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과 행위를 쓰셨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과 글을 힘있게 하셨습니다. 그가 사역에 능하도록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이적과 기사들로 나타났는데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랑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강점은 살아나고 약점은 줄어들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사랑으로 형제의 약점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증거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고 힘썼습니다(고전2:1-5). 사도 바울은 진리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진리를 잘 드러내고자 힘쓰고 또한 능력있는 성령의 나타남을 의지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이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일생토록, 땅 끝까지 하고자 했습니다. 19b-2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습니다. 여기서 일루리곤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으로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에 해당이 됩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까지 하면서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도시를 중심으로 리더를 세워 나갔습니다. 중요한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개척을 해 나갔습니다. 한 지역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면 자연히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복음 전파가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개척해야 할 세계를 생각할 때에 이미 개척이 된 곳에는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지금도 선교를 하는데 중복투자를 함으로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세계를 복음화시키기 위해서는 개척이 되지 않은 지역을 찾아서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홍익대학에서 많은 제자들을 세워 세계 곳곳에 파송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야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속한 대학에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수천명이 됩니다. 이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순종시키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까? 그는 당시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서바나 즉 스페인까지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대서양을 넘어 지금은 북미, 중남미 대륙이 발견되어 세계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갔다가 그들의 후원을 받아서 스페인까지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지역은 당시 언어가 달랐습니다. 그는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곳으로 계속해서 나아갔습니다. 바울의 이런 개척 정신은 은퇴를 맞이해야 할 나이임에도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한 일만해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엄청난 업적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는 얼마 안 되므로 조용히 공기 맑고 아름다운 산장에 가서 차 마시며 글 쓰고 후진 양성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는 다시 개척을 하고자 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바울은 16장에서 동역자들에게 개인적인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동역자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의 인사에는 동역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이 절절이 묻어나옵니다. 바울의 동역자 중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고 내어 놓을 정도로 동역을 잘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믿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로마서 15,16장
요절 로마서 15:7
서로 받으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우리는 이제 로마서 마지막 장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가을 학기 동안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서로 받으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동역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우리가 행복하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나를 받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가족 안에서도 갈등이 있습니다. 학교와 직장에서도 서로 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이곳에서도 갈등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생활 습관과 추구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있습니다. 이런 갈등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찬성과 반대가 있습니다. 어떤 의견에 대해 반대한다고 해서 틀리거나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건강한 공동체일수록 반대의견을 잘 들어줌으로써 다시 점검하고 실수를 줄이며 더 좋은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한 마음으로 일을 할 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서 음식과 날짜를 지키는 것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중심적으로 생각하거나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 능력있는 자,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마치 자기 짐처럼 짊어져야 합니다. 내 유익, 내 행복보다 상대방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내 대신 욕을 먹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반복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계속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집안에 들어오면 옷을 벗어서 아무데나 두는 사람은 항상 그렇게 합니다. 정욕적인 사람은 항상 사람의 마음을 호리는 성향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해서 함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마다 그 죄를 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연약함을 감당해 주십니다. 사람마다 연약한 점들이 다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감당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오래 오래 참아주십니다. 우리가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깨닫지 못할 때는 사건이나 사람을 통해서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난이란 것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25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75세에 믿음생활을 출발했지만 처음에는 기고, 다음에는 걷고 나중에는 달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사람을 오래 참으시면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된 습관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훈련하시고 때로는 시련을 당하게 하시지만 반드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안위해 주십니다. 시련을 잘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오십니다. 하나님의 안위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위로는 더 큽니다. 고난을 당해본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고난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은 사람들은 내면이 강해져서 어떤 사람들도 관용하며 조화를 이루며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둘째, 서로 받아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이 나를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만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경건치 않을 때, 원수 되었을 때받아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조금이라도 판단하고 무시했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천하고 비참한 죄인을 받으사 죄사함을 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양한 죄인들을 받아들이심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형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형제를 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먼저 나를 알고 형제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배웠듯이 사람은 성격 유형이 있습니다. 주도형, 사교형, 안정형, 신중형이 있습니다. 각 성격유형별로 강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장점만 있고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약점만 본다면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약점만 본다면 항상 갈등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약점과 함께 그 장점을 볼 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도형의 사람들은 일을 좋아합니다. 사람중심이 아니라 일 중심이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잘합니다. 그들은 결단력이 있습니다. 단호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그들은 집안 청소를 깨끗하게 잘 합니다. 잘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직관력이 뛰어납니다. 결과를 바로 예측합니다. 그들은 목표지향적이고 추진력이 있고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도형의 사람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 중심이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소홀합니다.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과정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열을 잘 받습니다. 참을성이 부족합니다. 또 생색을 잘 내고 자만심이 있습니다. 삶에 여유가 없고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을 빨리 하기 때문에 실속이 없습니다. 때로는 원칙을 무시하고 말이 거칩니다. 말로 인해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교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호기심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잘 만들어냅니다. 이들은 재미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재미가 없으면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항상 변화를 추구하고 다양한 경험을 즐깁니다. 사교형의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낙천적인 기질이라서 고난 앞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교형의 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분파입니다. 일을 해도 산만하게 합니다. 말을 해도 부풀려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체계적이기 않습니다. 말을 해도 서론, 본론, 결론이 없습니다. 너무 말이 많아서 본말이 전도되기 쉽습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안정감이 있습니다. 우리 센터에 많은 분들이 안정형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심이 있습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일보다 사람 중심입니다. 관계중심입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은 먹는 것, 자는 것, 갖는 것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느린 환경 속에서 깊은 잠재력,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일을 해도 천천히 합니다. 옷을 입어도 양말을 신는데 10분씩 걸립니다. 안정형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속이 터집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은 운동을 싫어합니다. 등산과 여행을 싫어합니다. 여행을 가라면 그 고생을 왜 사서 하느냐 그러느니 집에서 쉬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해줍니다. 이들은 직접적인 말보다 간접대화법을 씁니다. “아니요”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정형의 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격식이 없습니다. 입는 것에서 자유롭습니다. 옷을 벗으면 아무데나 던져버립니다. 이들은 무슨 일이든지 느립니다. 좋다, 싫다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핵심을 비켜갑니다.
신중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완벽주의자들입니다. 원리원칙대로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비교 분석하여 신중한 선택을 합니다. 남에 대한 배려심이 깊습니다. 이들은 한번 신뢰하면 끝까지 신뢰합니다. 그러나 한번 눈에 안 들면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정확합니다. 숫자에 밝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화를 하면 육하원칙에 따라서 합니다. 이들은 예의가 바르고 정리정돈을 잘 합니다. 집안은 깔끔합니다. 단순합니다. 그러나 신중형의 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용서를 못하는 기절이 있습니다. 높은 기준으로 인해서 까다롭습니다. 이들은 혼자 있는 것을 즐기다보니 우울한 기질이 있습니다. 원리원칙이다 보니 재미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다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단점보다 장점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살리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주도형의 사람은 매사에 책임을 떠맡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느긋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갖도록 여유있게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사교형의 사람은 학교와 가정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하고,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운 다음에 끈기있게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할 때 너무 흥분하지 말고 핵심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 싫은 소리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면 자기를 싫어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안정형의 사람들은 필요하면 주도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서 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결정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행동해야 합니다. 화가 났을 때 화난 감정을 속으로 삭이기보다는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주에 한 가지씩 자신의 감정을 채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중형의 사람은 기대수준을 약간 낮추는 것이 좋습니다. 하루 일정을 계획하는데 융통성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긴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을 회피하기보다 직면하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좀 더 자주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기보다 다른 사람과 더 많이 어울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집안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점 보다는 장점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강점을 살려서 다른 사람의 약점을 감당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예를 들어 안정형의 사람은 사교형의 사람들을 대할 때 그에게 너무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변화에 적응해 갈 수 있도록 조금 천천히 늦춰주세요. 이 일을 할 때 내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교형이 말만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을 때는 분명히 말해 주어야합니다. 사교형이 이야기할 때는 끝까지 들어주어야합니다. 우리는 각자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해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비결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 주면 됩니다. 나의 강점으로 다른 사람의 성격 유형에 맞추면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다른 생각과 의견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생각들을 나누고 이해하고 갈등을 해결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라(14-33) :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의 어떤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신앙이 성숙하고 신앙과 생활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가운데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줄 수 있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몇 가지를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편지를 대략 썼는데도 이렇게 치밀하고 영감이 넘칩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에게 영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복음 진리를 상기시켜서 복음진리 위에 굳게 세우고자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만민 구속 역사에 그들을 동참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복음의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임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양육하고 훈련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변화나 양들의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도구로 사용하셨는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과 행위를 쓰셨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과 글을 힘있게 하셨습니다. 그가 사역에 능하도록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이적과 기사들로 나타났는데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랑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강점은 살아나고 약점은 줄어들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사랑으로 형제의 약점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증거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고 힘썼습니다(고전2:1-5). 사도 바울은 진리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진리를 잘 드러내고자 힘쓰고 또한 능력있는 성령의 나타남을 의지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이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생명을 살리는 일을 일생토록, 땅 끝까지 하고자 했습니다. 19b-2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습니다. 여기서 일루리곤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으로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에 해당이 됩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까지 하면서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도시를 중심으로 리더를 세워 나갔습니다. 중요한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개척을 해 나갔습니다. 한 지역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면 자연히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복음 전파가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개척해야 할 세계를 생각할 때에 이미 개척이 된 곳에는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지금도 선교를 하는데 중복투자를 함으로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세계를 복음화시키기 위해서는 개척이 되지 않은 지역을 찾아서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홍익대학에서 많은 제자들을 세워 세계 곳곳에 파송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야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속한 대학에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수천명이 됩니다. 이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순종시키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까? 그는 당시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서바나 즉 스페인까지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대서양을 넘어 지금은 북미, 중남미 대륙이 발견되어 세계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갔다가 그들의 후원을 받아서 스페인까지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지역은 당시 언어가 달랐습니다. 그는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곳으로 계속해서 나아갔습니다. 바울의 이런 개척 정신은 은퇴를 맞이해야 할 나이임에도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한 일만해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엄청난 업적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는 얼마 안 되므로 조용히 공기 맑고 아름다운 산장에 가서 차 마시며 글 쓰고 후진 양성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는 다시 개척을 하고자 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바울은 16장에서 동역자들에게 개인적인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동역자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의 인사에는 동역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이 절절이 묻어나옵니다. 바울의 동역자 중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고 내어 놓을 정도로 동역을 잘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믿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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