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11강(13,14장) 사랑으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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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11강
말씀 로마서 13,14장
요절 로마서 13:8
사랑으로 행하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신자의 개인 윤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신자의 사회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에 G20 정상회의를 하면서 각 나라의 정상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조율하고 통합하는 가운데 세계의 경제 질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혼자 살지 않습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고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사람들과 조화로우면서도 품위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세상 권세에 대한 신자의 자세(1-7) : 이 부분은 신자의 국가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게 됩니다. 권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경찰이 오라고 하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이유가 있어서 부른 것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불순종하면 미운털이 박히게 됩니다. 그 사람이 잘 나서가 아니라 그에게 공권력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부와 공무원들에게 주어진 권력은 경기장에서 심판의 역할과 같습니다. 공정한 경쟁이 펼쳐지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선한 일을 하면 두려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악한 일을 할 때 심판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선을 행하면 권세를 가진 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국가는 엄정한 법집행은 기본이고 선행과 봉사를 더욱 진작시켜야 합니다. 권력은 선한 일은 칭찬하고 악한 짓에 대해서는 철퇴를 가합니다. 권력자는 하나님의 사역자요 일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해서 각 나라의 왕들을 세우시고 때로는 폐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통치권을 부여하심으로 이 세상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우리 신자들은 권력자들이 무서워서 순종하는 수준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고 신자들은 노예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이런 배경 가운데서 신자들이 국가에 대해서 반항적인 자세를 갖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려면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통치자 중에서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면서 죄패를 붙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 패를 보고 유대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했지만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죄패는 히브리, 로마, 헬라어로 쓰여졌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왕을 쓰셔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 생활 가운데서 해방시키시고 그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옥타비아누스의 호적명령을 쓰셔서 예수님이 나사렛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황제 숭배를 통해 우상 숭배를 강요한다면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자에게 순종하는 표시는 세금을 잘 내고 법을 지키며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우리가 소득세, 부가 가치세. 공과금, 통행료, 지방세를 내는 것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받을 자에게 마땅히 주어야 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한 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경찰관은 선을 행하면 민중의 지팡이요 악을 행하면 심판의 몽둥이가 됩니다. 우리 가운데 경찰관이 되기를 원하는 형제가 있는데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시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할 때 그가 경찰관으로서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줄 믿습니다.
둘째, 사랑으로 행하라(8-14) : 8절을 보십시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의 빚이라는 것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 외에 다른 빚은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빚을 지게 되면 이자가 붙습니다. 이자가 다시 이자를 낳아서 빚은 불어나게 됩니다. 반대로 저축을 하면 이자를 받습니다. 이자가 이자를 낳고 더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부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건강한 경제생활을 하도록 지혜와 절제의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은 내가 어려울 때 돈을 빌리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돈을 빌리고 빌려 주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을 받거나 빚을 갚는데 성실하지 못함을 정죄합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 도다(시37:21).”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사람 사이에서 범하지 말아야 할 계명입니다. 그러나 이런 율법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포괄적인 법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간음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의 생명을 해치는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주고 더욱 풍성하게 해 주고자 애쓰게 됩니다. 사랑하면 남의 것을 도둑질 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사랑하면 남의 재산을 지켜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 유익이 되도록 힘을 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아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사실 굉장히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지루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 사회는 영적 강국이 되고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배려가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은 자가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여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과학은 날로 발전하는데 영성은 날로 쇠퇴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영적 각성을 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가 세속화되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죄악을 볼 때 마다 회개하고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일간 신문에 게재되는 교회 성직자들의 부패와 성도들의 죄악을 생각할 때 마음이 답답함을 느끼고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는데 우리의 모습 속에서 방탕, 술취함, 호색, 사기, 거짓, 시기, 탐욕, 자아중심적인 것들을 너무 많이 보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젊기 때문에 특히 정욕과 음란한 세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항상 깨어서 사탄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또 유혹을 하거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가 깨끗한 마음으로 형제자매로 대하고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둠의 일을 벗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입은 옷을 보면 그가 군인인지, 죄수인지, 자유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옷은 그가 누구인지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품성을 닮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면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해야 합니다.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14장) : 당시 교회 안에서 먹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즉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먹는 것을 가렸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당시 고기는 우상에게 제사한 다음에 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에 그것을 먹으면 부정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지 않는 자를 무시했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은 약한 자였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강한 자였을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지켜왔기 때문에 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먹는 것이 꺼림칙했습니다. 그들은 시장에 내다 파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먹던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웠습니다. 지금도 인도 비행기를 타면 돼지고기를 먹을 것인지 아닌지 물어봅니다. 중동 지방에서는 돼지고기를 부정하다고 여겨서 팔지도 않습니다. 요즈음은 한국 사람들 때문에 삼겹살을 파는 곳이 생겼다고 합니다. 삼겹살은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팔린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적인 차이가 당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교회 안에서 먹는 문제로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한국에서는 술과 담배 문제로 갈등이 있습니다. 학교 생활이나 직장 생활이나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문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술을 한잔 먹으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술을 주고 받으면서 돌리는 문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술을 먹지 않고 사이다를 마시거나 콜라를 마시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목자님은 동료들 사이에서 사이다에 취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동료들과 회식자리에서 어울리면서 교제를 갖습니다.
각 사람을 판단하실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받으셨습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믿음이 연약한 자도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도 물론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7).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7).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사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 물고 뜯으면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판단하고 무시하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판단하기보다 세워주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욕하고 판단한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계산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먹는 문제로 형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숙한 신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산 형제를 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움으로 아 목자님도 저렇게 하시니 나도 괜찮겠지 하고 마시다가 습관이 되면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믿음이 어린 형제들을 위하여 절제해야 합니다. 15,1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의 믿음에 맞게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습니다. 음식은 밖에서 입으로 들어왔다가 다 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막7:15-23). 바울은 20,21절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은지 방향 제시를 합니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자세를 가지고 절제하는 가운데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배려하고 걸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적극적으로 힘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신자라고 해서 술을 먹지 않으면서 사기를 치고 거짓을 일삼는 다면 얼마나 불의한 것입니까? 그런 사람보다 술을 먹지만 의롭게 사는 신자가 더 고귀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어린 신자들을 배려하면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의롭고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과 화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의와 평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희락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순간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림으로서 오는 희락이 있습니다. 이런 참된 기쁨,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는 경건한 신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 이런 급조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오는 신령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절대적인 행동 기준은 무엇입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제 생활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야 할 때는 믿음으로 먹고, 술을 먹지 말아야 할 때도 믿음으로 먹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믿음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자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권세를 가진 사람들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세금을 잘 내고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배려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제어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서 사랑으로 행한다면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랑을 행함으로 비범한 신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과 같이 신앙생활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살아서 세상의 빛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로마서 13,14장
요절 로마서 13:8
사랑으로 행하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신자의 개인 윤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신자의 사회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에 G20 정상회의를 하면서 각 나라의 정상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조율하고 통합하는 가운데 세계의 경제 질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혼자 살지 않습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고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사람들과 조화로우면서도 품위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세상 권세에 대한 신자의 자세(1-7) : 이 부분은 신자의 국가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게 됩니다. 권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경찰이 오라고 하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이유가 있어서 부른 것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불순종하면 미운털이 박히게 됩니다. 그 사람이 잘 나서가 아니라 그에게 공권력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부와 공무원들에게 주어진 권력은 경기장에서 심판의 역할과 같습니다. 공정한 경쟁이 펼쳐지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선한 일을 하면 두려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악한 일을 할 때 심판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선을 행하면 권세를 가진 자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국가는 엄정한 법집행은 기본이고 선행과 봉사를 더욱 진작시켜야 합니다. 권력은 선한 일은 칭찬하고 악한 짓에 대해서는 철퇴를 가합니다. 권력자는 하나님의 사역자요 일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해서 각 나라의 왕들을 세우시고 때로는 폐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통치권을 부여하심으로 이 세상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우리 신자들은 권력자들이 무서워서 순종하는 수준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고 신자들은 노예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이런 배경 가운데서 신자들이 국가에 대해서 반항적인 자세를 갖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려면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통치자 중에서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면서 죄패를 붙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 패를 보고 유대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했지만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죄패는 히브리, 로마, 헬라어로 쓰여졌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왕을 쓰셔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 생활 가운데서 해방시키시고 그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옥타비아누스의 호적명령을 쓰셔서 예수님이 나사렛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황제 숭배를 통해 우상 숭배를 강요한다면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자에게 순종하는 표시는 세금을 잘 내고 법을 지키며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우리가 소득세, 부가 가치세. 공과금, 통행료, 지방세를 내는 것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받을 자에게 마땅히 주어야 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한 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경찰관은 선을 행하면 민중의 지팡이요 악을 행하면 심판의 몽둥이가 됩니다. 우리 가운데 경찰관이 되기를 원하는 형제가 있는데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시민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할 때 그가 경찰관으로서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줄 믿습니다.
둘째, 사랑으로 행하라(8-14) : 8절을 보십시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의 빚이라는 것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 외에 다른 빚은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빚을 지게 되면 이자가 붙습니다. 이자가 다시 이자를 낳아서 빚은 불어나게 됩니다. 반대로 저축을 하면 이자를 받습니다. 이자가 이자를 낳고 더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부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건강한 경제생활을 하도록 지혜와 절제의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은 내가 어려울 때 돈을 빌리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돈을 빌리고 빌려 주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을 받거나 빚을 갚는데 성실하지 못함을 정죄합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 도다(시37:21).”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사람 사이에서 범하지 말아야 할 계명입니다. 그러나 이런 율법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포괄적인 법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간음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의 생명을 해치는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주고 더욱 풍성하게 해 주고자 애쓰게 됩니다. 사랑하면 남의 것을 도둑질 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사랑하면 남의 재산을 지켜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 유익이 되도록 힘을 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아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사실 굉장히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지루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 사회는 영적 강국이 되고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배려가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은 자가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여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과학은 날로 발전하는데 영성은 날로 쇠퇴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영적 각성을 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가 세속화되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죄악을 볼 때 마다 회개하고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일간 신문에 게재되는 교회 성직자들의 부패와 성도들의 죄악을 생각할 때 마음이 답답함을 느끼고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는데 우리의 모습 속에서 방탕, 술취함, 호색, 사기, 거짓, 시기, 탐욕, 자아중심적인 것들을 너무 많이 보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젊기 때문에 특히 정욕과 음란한 세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항상 깨어서 사탄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또 유혹을 하거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가 깨끗한 마음으로 형제자매로 대하고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둠의 일을 벗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입은 옷을 보면 그가 군인인지, 죄수인지, 자유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옷은 그가 누구인지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품성을 닮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면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해야 합니다.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14장) : 당시 교회 안에서 먹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즉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먹는 것을 가렸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당시 고기는 우상에게 제사한 다음에 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에 그것을 먹으면 부정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지 않는 자를 무시했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은 약한 자였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강한 자였을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지켜왔기 때문에 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먹는 것이 꺼림칙했습니다. 그들은 시장에 내다 파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먹던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웠습니다. 지금도 인도 비행기를 타면 돼지고기를 먹을 것인지 아닌지 물어봅니다. 중동 지방에서는 돼지고기를 부정하다고 여겨서 팔지도 않습니다. 요즈음은 한국 사람들 때문에 삼겹살을 파는 곳이 생겼다고 합니다. 삼겹살은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팔린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적인 차이가 당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교회 안에서 먹는 문제로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한국에서는 술과 담배 문제로 갈등이 있습니다. 학교 생활이나 직장 생활이나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문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술을 한잔 먹으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술을 주고 받으면서 돌리는 문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술을 먹지 않고 사이다를 마시거나 콜라를 마시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목자님은 동료들 사이에서 사이다에 취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동료들과 회식자리에서 어울리면서 교제를 갖습니다.
각 사람을 판단하실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받으셨습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믿음이 연약한 자도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도 물론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7).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7).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사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 물고 뜯으면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판단하고 무시하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판단하기보다 세워주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욕하고 판단한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계산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먹는 문제로 형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숙한 신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산 형제를 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움으로 아 목자님도 저렇게 하시니 나도 괜찮겠지 하고 마시다가 습관이 되면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믿음이 어린 형제들을 위하여 절제해야 합니다. 15,1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의 믿음에 맞게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습니다. 음식은 밖에서 입으로 들어왔다가 다 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막7:15-23). 바울은 20,21절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은지 방향 제시를 합니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우리가 좀 더 성숙한 자세를 가지고 절제하는 가운데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배려하고 걸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적극적으로 힘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신자라고 해서 술을 먹지 않으면서 사기를 치고 거짓을 일삼는 다면 얼마나 불의한 것입니까? 그런 사람보다 술을 먹지만 의롭게 사는 신자가 더 고귀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어린 신자들을 배려하면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의롭고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과 화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의와 평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희락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순간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림으로서 오는 희락이 있습니다. 이런 참된 기쁨,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는 경건한 신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 이런 급조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오는 신령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절대적인 행동 기준은 무엇입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제 생활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야 할 때는 믿음으로 먹고, 술을 먹지 말아야 할 때도 믿음으로 먹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믿음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자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권세를 가진 사람들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세금을 잘 내고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배려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제어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서 사랑으로 행한다면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랑을 행함으로 비범한 신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과 같이 신앙생활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살아서 세상의 빛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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