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9강(11장) 유대인의 불신과 하나님의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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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9강
말씀 로마서 11:1-36
요절 로마서 11:32
유대인의 불신과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어제는 바울팀 모임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팀장에게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았고 한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므로 슬금슬금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일 식사 교제에는 다 참석했다고 하던데 … 우리는 목요일에 창조과학 세미나를 했습니다. 학생들은 밤새워 공부하면서 중간고사를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토요일 늦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이런 사정을 들어보니 이해가 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들을 용서하고 다음 주에 에버랜드에 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고 구원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영원히 버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그들이 회복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구원역사를 열심을 가지고 이루어 가시는 긍휼의 하나님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Ⅰ. 남은 자(1-12)
10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예를 구약에서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불을 내려 제단을 태운 후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그 백성들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그 후에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송사하였습니다.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엘리야는 광야로 피했다가 로렘 나무 아래 누워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고 하나님 산에 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 속에서도 아니 계셨습니다. 지진 속에서도 안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남은 생애 동안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도전해야 할 목표, 꿈이 무엇입니까? 고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삼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나의 엘리사는 누구입니까? 나의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나의 디모데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자신이 하신 일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나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장래가 보장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때문에, 돈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쾌락을 추구합니다. 쉽고 편하게 살고자 합니다. 맘모니즘과 육신의 쾌락주의에 타협한 사람들이 많지만 아직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소원이 있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이런 사람들을 찾고 제자로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셔서 남은 자들이 있는데 이는 그들로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당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에게 머물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고자 합니다. 강한 사람들에게는 힘이 있으니 혼자서 잘 해보라고 내버려 둡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강하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도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들을 쓰셔서 라도 구원 역사를 힘 있게 이루십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구했지만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악해졌습니다. 복음을 영접하지 아니한 자들은 그 상태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악해집니다. 완악이란 살에 못이 박힌 상태를 말합니다. 즉 마음이 딱딱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영접하면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마음에 비추어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배척하게 되면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얻게 됩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사탄이 그 마음을 계속해서 어두움으로 사로잡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실족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실족함으로 이방인 가운데 풍성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기할 할 정도로 이 세상이 부요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하물며 저희가 바로 서게 된다면 얼마나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바울은 그 일을 감람나무 뿌리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Ⅱ. 뿌리와 가지(13-24)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그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들이 많이 구원을 받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시기케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었습니다. 복음 역사에서 시기하는 역사가 긍정적으로 쓰임 받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경쟁심이 생겨서 더욱 열심히 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좋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돼는 것을 보고도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면 성장과 진보에 대한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실패하고 잘못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고 자신도 잘 해 보고자 노력하는 것은 좋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이 잘 나가는 것을 보고 경쟁심이 붙어서 여기까지 온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그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부흥한 324개 교회 성장 리포트를 읽어보면서 그런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영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전도에 힘을 쓰면 다시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 저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종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리더십이 살아나야 합니다. 리더의 변화가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변화된 성품을 갖기 위해서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을 보기를 원합니다. 학생사역연구소를 잘 섬기는 가운데 학생복음운동이 새롭게 부흥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구원 받은 이방인들과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버림으로 세상이 화목이 되었다면 그들이 회개하고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같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울은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자긍할지라도 우리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우리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는 딱딱하고 맛이 없고 모양도 별 볼일이 없고 무가치합니다. 이방인들은 어떤 점에서 그와 같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 도덕이 타락하고 구원에서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어서 외인이었습니다(엡2:12).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속해 있던 하나님의 언약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성경과 예배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전해오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신령한 복을 함께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진리와 체계를 고스란히 받았고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꺾이운 것은 이방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우고 우리는 믿음으로 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 은혜를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 이런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죄하고 판단하기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죄에 빠질 수 있음을 알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폐쇄적인 개인이나 모임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인 이스라엘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우리도 교만하고 불순종하면 아낌없이 꺾어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보아야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하나님은 인자하시지만 교만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날카롭게 찍어내십니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찍히는 바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겠습니까? 그들이 변화되면 우리보다 더 진심을 드리고 열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변화된다면 선교를 더욱 열심히 감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3천년 동안 가정을 지키면서 자녀들을 양육해 왔습니다. 그들이 제자양성을 한다면 얼마다 더 잘하겠습니까?
저는 신앙의 경륜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태에서부터 믿음을 갖고 자란 분들이 하는 것이 없다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모태 신앙을 못해 신앙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불신가정에서 자라나 믿음을 갖게 된 분들은 대개 뜨겁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분들은 미지근한 경우가 많습니다. 허구한 날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생활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회개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이 크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죠나단 에드워드나 스펄젼도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구원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시대를 흔드는 믿음의 영웅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믿음의 영웅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Ⅲ. 하나님의 비밀(25-36)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제까지 완악하게 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말세에 고난이 극심하고 복음 전도가 어려울 때에 그들은 국가적으로 회심하고 마지막 때에 귀히 쓰임 받을 것입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언약이 이것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왜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절망하고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길로 갔었더라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텐데 한숨을 쉴 때가 있습니다. 근근히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시고 은사를 주셔서 일하게 하신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선, 최상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 분노하시지만 그 사랑 때문에 결국 독생자를 보내사 속량해 주시고 회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불러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셔서 우리 인생을 한걸음 한걸음 이끌어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할 때 바울의 입에서는 찬송이 터져나왔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33-35).” 하나님의 풍요로움과 하나님의 지혜와 그 지식의 깊이가 어떠한가! 하나님의 판단을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의 길도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 길을 쉽게, 혹은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지식과 지혜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고심해야 합니다.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며 누가 그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누가 주께 먼저 해드리고 주께서 그에 대한 보상을 하실까요? 누가 먼저 주님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말씀하실까요? 누가 먼저 주님의 일에 대해서 방향을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깊이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버림 받음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이스라엘도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되고 찬양을 합니다. 우리가 당장 겪는 어려움으로 인해서 불평과 원망을 하기보다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 찬양하는 수준으로 올라가야겠습니다. 내가 현재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강하게 연단하십니다.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십니다. 진정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는 것은 그를 의지하게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가 되셔서 합력하여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인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3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 세상은 돌아갑니다. 우리도 나 중심에서, 가정 중심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열심을 내고 성취하는 것 같지만 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성취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로마서 11:1-36
요절 로마서 11:32
유대인의 불신과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어제는 바울팀 모임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팀장에게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았고 한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므로 슬금슬금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일 식사 교제에는 다 참석했다고 하던데 … 우리는 목요일에 창조과학 세미나를 했습니다. 학생들은 밤새워 공부하면서 중간고사를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토요일 늦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이런 사정을 들어보니 이해가 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들을 용서하고 다음 주에 에버랜드에 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고 구원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영원히 버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그들이 회복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구원역사를 열심을 가지고 이루어 가시는 긍휼의 하나님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Ⅰ. 남은 자(1-12)
10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예를 구약에서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불을 내려 제단을 태운 후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그 백성들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그 후에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송사하였습니다.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엘리야는 광야로 피했다가 로렘 나무 아래 누워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고 하나님 산에 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 속에서도 아니 계셨습니다. 지진 속에서도 안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남은 생애 동안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도전해야 할 목표, 꿈이 무엇입니까? 고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삼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나의 엘리사는 누구입니까? 나의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나의 디모데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자신이 하신 일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나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장래가 보장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때문에, 돈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쾌락을 추구합니다. 쉽고 편하게 살고자 합니다. 맘모니즘과 육신의 쾌락주의에 타협한 사람들이 많지만 아직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소원이 있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이런 사람들을 찾고 제자로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셔서 남은 자들이 있는데 이는 그들로 자기 자랑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당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에게 머물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도와주고자 합니다. 강한 사람들에게는 힘이 있으니 혼자서 잘 해보라고 내버려 둡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강하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도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들을 쓰셔서 라도 구원 역사를 힘 있게 이루십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구했지만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악해졌습니다. 복음을 영접하지 아니한 자들은 그 상태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악해집니다. 완악이란 살에 못이 박힌 상태를 말합니다. 즉 마음이 딱딱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영접하면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마음에 비추어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배척하게 되면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얻게 됩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사탄이 그 마음을 계속해서 어두움으로 사로잡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실족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실족함으로 이방인 가운데 풍성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기할 할 정도로 이 세상이 부요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하물며 저희가 바로 서게 된다면 얼마나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바울은 그 일을 감람나무 뿌리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Ⅱ. 뿌리와 가지(13-24)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그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들이 많이 구원을 받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시기케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었습니다. 복음 역사에서 시기하는 역사가 긍정적으로 쓰임 받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경쟁심이 생겨서 더욱 열심히 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좋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돼는 것을 보고도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면 성장과 진보에 대한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실패하고 잘못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고 자신도 잘 해 보고자 노력하는 것은 좋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이 잘 나가는 것을 보고 경쟁심이 붙어서 여기까지 온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그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부흥한 324개 교회 성장 리포트를 읽어보면서 그런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영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전도에 힘을 쓰면 다시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 저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종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리더십이 살아나야 합니다. 리더의 변화가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변화된 성품을 갖기 위해서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비전을 보기를 원합니다. 학생사역연구소를 잘 섬기는 가운데 학생복음운동이 새롭게 부흥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구원 받은 이방인들과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버림으로 세상이 화목이 되었다면 그들이 회개하고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같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울은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자긍할지라도 우리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우리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는 딱딱하고 맛이 없고 모양도 별 볼일이 없고 무가치합니다. 이방인들은 어떤 점에서 그와 같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 도덕이 타락하고 구원에서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어서 외인이었습니다(엡2:12).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속해 있던 하나님의 언약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성경과 예배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전해오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신령한 복을 함께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진리와 체계를 고스란히 받았고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꺾이운 것은 이방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우고 우리는 믿음으로 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 은혜를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 이런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죄하고 판단하기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죄에 빠질 수 있음을 알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폐쇄적인 개인이나 모임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인 이스라엘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우리도 교만하고 불순종하면 아낌없이 꺾어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보아야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하나님은 인자하시지만 교만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날카롭게 찍어내십니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찍히는 바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겠습니까? 그들이 변화되면 우리보다 더 진심을 드리고 열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변화된다면 선교를 더욱 열심히 감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3천년 동안 가정을 지키면서 자녀들을 양육해 왔습니다. 그들이 제자양성을 한다면 얼마다 더 잘하겠습니까?
저는 신앙의 경륜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태에서부터 믿음을 갖고 자란 분들이 하는 것이 없다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모태 신앙을 못해 신앙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불신가정에서 자라나 믿음을 갖게 된 분들은 대개 뜨겁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분들은 미지근한 경우가 많습니다. 허구한 날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생활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회개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이 크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죠나단 에드워드나 스펄젼도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구원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시대를 흔드는 믿음의 영웅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믿음의 영웅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Ⅲ. 하나님의 비밀(25-36)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제까지 완악하게 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말세에 고난이 극심하고 복음 전도가 어려울 때에 그들은 국가적으로 회심하고 마지막 때에 귀히 쓰임 받을 것입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언약이 이것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왜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절망하고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길로 갔었더라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텐데 한숨을 쉴 때가 있습니다. 근근히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시고 은사를 주셔서 일하게 하신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선, 최상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 분노하시지만 그 사랑 때문에 결국 독생자를 보내사 속량해 주시고 회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불러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셔서 우리 인생을 한걸음 한걸음 이끌어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할 때 바울의 입에서는 찬송이 터져나왔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33-35).” 하나님의 풍요로움과 하나님의 지혜와 그 지식의 깊이가 어떠한가! 하나님의 판단을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의 길도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 길을 쉽게, 혹은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지식과 지혜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고심해야 합니다.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며 누가 그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누가 주께 먼저 해드리고 주께서 그에 대한 보상을 하실까요? 누가 먼저 주님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말씀하실까요? 누가 먼저 주님의 일에 대해서 방향을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깊이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버림 받음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이스라엘도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되고 찬양을 합니다. 우리가 당장 겪는 어려움으로 인해서 불평과 원망을 하기보다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 찬양하는 수준으로 올라가야겠습니다. 내가 현재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강하게 연단하십니다.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십니다. 진정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는 것은 그를 의지하게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가 되셔서 합력하여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인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3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 세상은 돌아갑니다. 우리도 나 중심에서, 가정 중심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열심을 내고 성취하는 것 같지만 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성취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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