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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7강(9장)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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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832회 작성일 10-10-17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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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7강                                                             
말씀 로마서 9:1-33
요절 로마서 9:11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제까지 우리는 개인 구원에 대해서 배웠습니다.9-11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임을 말합니다(9장). 이어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절한 백성임을 말합니다(10장).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백성임을 말합니다(11장).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진리를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셔서입니다. <미녀와 야수>를 다 보셨지요? 우리 속에는 짐승이 살고 있습니다. 으르렁거리고 화를 내고 사납고 다루기 힘든 존재입니다. 그런데 미녀가 이 야수를 사랑하자 그는 멋진 왕자로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를 아름답게 변화시키십니다. 이 시간 짐승과 같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긍휼과 그에 기초한 선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던 그가 9장에 들어오면서 슬픔과 비통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까? 아니면 그가 오랫동안 싱글로 살아서 마음이 슬픈 것입니까? 결혼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슬픔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1-3).” 민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제까지 그 백성에게서 수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를 죽이기 위해서 40명이 밥도 먹지 않고 결사대를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그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나의 가족 중에서, 친구 중에서, 동료들 중에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로 인해서 이런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그저 자신의 정욕과 이기적인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서 고민하는 단계가 아니라 바울과 같은 수준 높은 고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을 발로 차 버렸습니다. 그 귀한 보배와 같은 사명과 특권을 버린 백성들을 볼 때 바울의 마음이 크게 상했습니다. 이는 마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쉽고 편하게 문자 생활을 하라고 주었더니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려운 한문을 붙들었던 유학자들과 같습니다. 복음이 이 나라에 들어와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읽고 쓰기 시작하면서 한글은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세계 각 나라에서 한글을 배우겠다고 난리입니다. 한글만 잘 읽고 쓰고 말하면 한국에 와서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동남아에서는 한글을 배우는 것이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이 버려졌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만 손해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복음은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는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마엘과 이삭이 나왔는데 이스라엘은 하갈이라는 종에게서 육신대로 나왔고 리브가에게서 약속대로 이삭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삭을 계승자로 세우셨습니다. 또 이삭에게 난 아들은 둘입니다. 야곱과 에서입니다. 그런데 둘이 쌍둥이였고 에서가 먼저 나왔는데 하나님은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죄인된 인간이 기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고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서에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서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불공평하십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모세와 바로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하는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강퍅한 마음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도 자신의 목적대로 쓰십니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집트와 온 세계에 드러내셨습니다. 또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선택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이렇게 하시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린 것이 불의하지 않는가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의 기준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납니다. 우리는 구원 문제를 의의 차원에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논증하는 전제가 무엇입니까? 인간에 있어서 구원의 문제, 선택의 문제는 공의의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긍휼에 속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다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누구를 긍휼히 여기느냐는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설 수 있는 방법은 긍휼의 방법 밖에 없습니다. 
  바로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완악하게 하셨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악의 창조자이시고, 프로그램을 하신 분이라면 악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가 완악하게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완악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로 스스로가 먼저 마음을 딱딱하게 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용하셨습니다(출 4:21, 8:32). 강팍하게 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지만 수동태로 나옵니다. 이를 신적 수동태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고자 작정하시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바로 스스로가 마음을 강퍅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내어버려두시면 죄인의 마음은 강퍅하게 됩니다. 그것이 로마서 1장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한 형태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강퍅케 하신다는 것은 악을 제어하는 마음을 방치해 두심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던 악을 억제하는 작용을 제거하심으로 인간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과 통제를 받을 때 인간은 긍휼을 입게 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악은 그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미녀와 야수에서 미녀의 사랑이 없으면 야수 왕자는 그렇게 저주 받은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부드럽게 되어 회개하기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때에 어떤 사람은 마음이 더욱 강퍅해 지고 어떤 사람은 더욱 부드러워집니다. 10월 13일 밤에 칠레에서 광부 33명이 구출되어 전세계적인 기쁨이 되었습니다. 세블베다는 “그곳에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악마도 함께 있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셨기에 구출될 것을 확신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지하 700미터의 좁은 공간에서 얼마든지 인간적인 갈등을 하면서 죽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지고 인내했습니다. 그들이 69일 동안 지하에서 버텨낸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말씀하시지만 인간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의 때에 마음을 낮추고 순종해야 합니다. 불신과 완고한 책임은 인간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강퍅한 자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왜 하나님께 따질 수 없습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사도 바울은 사람이 피조물인 것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워 입을 막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맞서서 따지느냐? 똑같은 위치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따지느냐? 이 사람아! 너는 사람이다.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지음을 받은 물건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맞서서 따지느냐? 이런 질문을 제시하는 인간의 태도가 온당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연약하고 허무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를 인식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고 쓰임 받는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영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권신앙입니다. 우리가 주권 신앙을 갖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신을 대하시는 하나님께 반발하고 감사하지 않고 대들게 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반발하고 핏대를 세우면서 하나님께 대들었고 결국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고 주권 신앙에 기초해서 살 때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한 독재자가 아니십니다. 그는 공의로우셔서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분노하시지만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알수록 감사하고 순종하고 그를 경외하게 됩니다. 인본주의 신앙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속에 있는 반발하고 대적하는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영접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 지음 받은 물건의 용도와 목적은 지은 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음 받은 물건이 따지고 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기분에 따라서 행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릇을 마구 만들고 파쇄해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실은 바울이 그런 목적으로 토기장이 비유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 편에서 의문이나 항변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토기장이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이렇게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바울은 9장에서부터 11장까지 논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사용하시는 성품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 자체를 꾸짖지 아니했습니다. 질문 자체를 말살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긍휼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셨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이미 타락한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오래 참는 것입니다. 2장 4,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래 참으사 우리 가운데 하나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해서 운명적으로 말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인간 편에서 회개에 이르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토기장이 해석의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되 하나님의 실제역사는 토기장이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오래 참으사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 오래 참으실 수 있고 또 영광받기로 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해 그 영광을 나타내셔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입니다. 긍휼의 그릇은 남은 자, 택하신 자들입니다.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먼저 나  같은 죄인이 선택 받았다는 사실 앞에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내가 눈곱만치도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충성할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도 “나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해야 합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구원을 받는 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오래 참으시고 남은 자들을 있게 하셨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고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들이 너무 죄악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구속 역사를 이룰 마음이 없으실 텐데 그래도 남은 자를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는 이스라엘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딪힐 돌에 부딪혔고 깨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추구하다가 예수님에게 깨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섬길 때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고 그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충성하고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장래를 알고 계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맡기고 현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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