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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6강(8장) 믿는 자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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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767회 작성일 10-10-1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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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 6 강                                                             
말씀 로마서 8장
요절 로마서 8:23
       
믿는 자의 희망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지난 주 우리는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죄와 율법과 갈등하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율법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또한 율법의 무능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며 능력을 주십니다. 8장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19번 나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다. 1-17절은 신약의 다이아몬드라고 말합니다. 18-27절은 탄식이라는 주제로 피조물과 우리와 성령의 탄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영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며 탄식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28-39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황금사슬로 증거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믿음 생활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주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밝혀주옵소서.

첫째, 생명의 성령의 법(1-17) : 우리는 3-7장까지 칭의에서 영화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여서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다른 보혜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을 때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영적인 죽음에서 살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강력한 힘을 주십니다. 중력의 법칙 속에서 모든 물건은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제트엔진의 힘과 유선형 날개의 양력에 의해서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이와 같이 죄의 세력권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훈련하시고 진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일을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은 힘을 주사 그것을 행하게 하십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십니다.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낫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율법의 참된 의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는 가식적이고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만 껍데기만 지켰습니다. 자기들의 방식대로 율법의 계명들을 만들어서 문자적으로 지켰습니다. 이것은 죽은 의문을 지키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의는 영으로 말미암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좌절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따라서 삶으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롬13:8-10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서 행해야 합니까?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을 좇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의 일을 생각하면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이란 몸이 아니라 죄의 부패성, 죄에 의해 부패되고 조종되고 지시받고 있는 성품을 말합니다. 죄의 본성을 따르는 성품을 말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가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좇을 때에 그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성령을 좇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권능과 지혜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행하고자 힘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다 하나님께 받아서 행한 것이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셨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으로 힘을 얻고 십자가 위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고난을 넉넉히 이기셨습니다.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입니까? 크리스천은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고 하는 말은 사실 다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입니다. 성령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역사하신 것처럼 우리의 죽은 영을 산 영이 되게 하는 재창조의 역사를 하십니다. 성령님은 또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같이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죽을 몸을 부활하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삶의 주도 세력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게 은혜의 빚을 졌습니다.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성령을 따라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6장에서는 몸의 사욕을 따라서 살지 않기 위해 우리 몸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거룩한 삶이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인도함 사이에서 싸움이 전개됩니다. 이 싸움은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써 죄를 죽이면 살고, 죄가 우리를 사로잡으면 내가 죽습니다. 우리가 죄와의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우리의 육신은 죽은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날마다 나의 죽음을 인식하고 죽은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생각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죽음을 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이 죄를 지을 때 회개하는 소감을 써서 발표하는 것도 죄악된 자기를 죽이는 좋은 방법입니다. 자신이 죽지 않으면 결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회개 생활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기 위해서 먼저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새가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즉 죄악된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 들어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힘든 것은 감정이 북받쳐서 욱하고 터져 나오는 죄악된 본성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 나서 매사에 먹을 것과 힘든 길로 인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들을 참다 참다 못하여 감정을 폭발시켰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죄악된 그 시대를 볼 때 입이 거칠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불의하고 타락한 그 시대를 볼 때 욕을 가끔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가장 처음 한 고백이 이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보호막이 되는 것은 의지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의지가 약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고 힘을 얻으셨던 것처럼 기도함으로 영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성령께 복종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서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에 나타난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으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 삶의 정황 속에서 또는 관계 속에서 오래 참음, 자비, 충성, 온유, 친절로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삶의 여러 정황 속에서 사랑이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성령과 관련해서 늘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출석을 잘하는 것, 직분을 맡는 것, 성경을 가르치는 것 등등이 신자라는 궁극적인 증거는 되지 못 합니다. 크리스천됨의 시금석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가를 무엇을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확실한 증거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열매가 맺힌다는 것은 그 나무가 살아 있다, 생명이 있다, 성장한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라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남긴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 것입니다(요 13:35).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을 평가할 때 업적과 활동 위주로 평가하기보다는 왜, 어떻게 그 일을 했는가를 더 중요시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의 동기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 소멸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병이나 죽음을 통해서라도 죄를 돌이키게 하십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나태하고 무기력한 모습은 교회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기초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순간마다 내가 죽은 자로 여기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순종할 때 죄의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주님과의 친밀함이 더욱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세상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쉽고 편한 길을 찾기보다 조금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지혜롭고 겸손한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장차 나타날 영광을 사모함(18-27) :  18절을 보십시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다가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우리가 영광을 받게 되면 주님을 위해서 어떤 고난을 받았는가 이야기 하는 것이 큰 추억거리요 자랑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은 고난을 영광스러운 상처라고 생각했습니다. 군대에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은 틈만 나면 그런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합니다. 우리가 추억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잘 먹고 잘 입은 것을 추억하지 않습니다. 어디 여행을 가서 고생을 진탕 한 것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모세도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자랑하는 것은 수고와 슬픔입니다. 우리가 영광을 받을 날에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27절은 영광을 바라며 받는 고난을 동심원을 그리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고난은 탄식으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탄식 교향곡을 듣고 있습니다. 먼저 피조물의 탄식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을 보면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아름다운 꽃이 시들고 벌레가 먹고 추하게 떨어집니다. 자연은 겉으로 보면 아름답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이 있습니다. 그리고 엉겅퀴와 가시덤불 등 인간의 죄로 인해서 저주받은 모습들이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헛되고 헛된 모습입니다. 자연 만물이 이렇게 덧없고 무상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굴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들이 이런 상태에 있지만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날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던 데서 해방이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피조물의 탄식 소리를 들었으면 이제는 우리가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23절을 보십시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신자들의 탄식은 우리 몸이 아직 속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죄에 걸려 넘어지고 나면 탄식이 나옵니다. 이 죽일 놈. 아니 이 죽은 놈. 아 비참한 나의 모습이여!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병들고 쇠약해지게 됩니다. 이런 탄식 속에서 우리는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다. 이런 탄식은 산고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고통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참된 소망이 아닙니다.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탄식이 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약점 중에 무지가 있습니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 제목이 분명해야 합니다. 기도 제목이 분명한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받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중재 없이는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몸의 구속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도 하지 않는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잘 되지 않더라도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셋째, 넉넉히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28-39)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28). 이 말씀은 고난 받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격을 조각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십니다. 부르심의 통로는 다양합니다. 부르심을 받을 때의 형편도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부르시고 또 거듭나게 하사 의롭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영화롭게 하셨다는 과거형을 쓴 것은 미래 사건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대적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우리가 받으리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버리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정과 욕심을 죽임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영광스러운 몸의 구속을 소망합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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