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0년 로마서 제5강(6,7장) 믿음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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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로마서 제 5 강
말씀 로마서 6,7장
요절 로마서 6:5
믿음의 성장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지기 때문에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합니다. 또한 환난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에 기초해서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까?
I. 죄로부터 해방된 생활 (6:1-23)
5장 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문으로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다’함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하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나 새 생명을 얻었음으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여긴다는 말은 사실을 사실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옛 사람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죽어서 없어졌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옛 사람이 다시 튀어나와서 나를 이끌어 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옛 사람과 나는 이제 단절되었고 끝난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노릇하며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삶을 새롭게 하는 근거는 바로 연합의 교리에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과 아내가 연합을 하게 됩니다. 처녀 총각이 결혼해서 한 몸이 되면 성을 통일해서 하나로 쓰고, 배우자의 재산과 지위를 하나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시부모, 시댁의 형제자매를 나의 형제자매로 맞아들입니다. 우리의 감정의 변화와 상관이 없습니다. 감정적인 변화가 따라 나오지 않지만 관계의 변화가 옵니다. 그리고 함께 살면서 점차 서로를 닮아가게 됩니다. 실제적인 것들을 함께 공유하면서 나중에는 얼굴까지도 닮아갑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것이 나에게 일어난 것으로 전가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법적으로 나의 것으로 변화가 됩니다. 골로새서 3:9b,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그 몸을 적극적으로 어떻게 써야 합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같은 물을 마시고서도 젖소는 우유를 생산하지만 독사는 독을 만들어 냅니다. 같은 칼이라도 강도가 쓰면 사람을 해하는 칼이 되고 의사가 쓰면 사람을 살리는 칼이 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죄에 드릴 때 부끄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신자들은 이제 선택이 그 삶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가운데 거룩한 열매를 많이 맺기를 기도합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할 때 죄를 짓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헌신할 때 영적인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릴 때 죄가 틈탈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릴 때 열정이 계속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그러나 자신을 드리지 않으면 있던 열정마저도 꺼져버립니다. 우리의 인생이 녹슬어서 폐기처분되는 것이 아니라 달아서 없어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Ⅱ.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생활 (7:1-25)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합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다른 남자에게 가더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합니다. 이는 율법과 우리의 관계를 부부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신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죽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에 매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힘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제 예수님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 말해서 사모님들이 남편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 내 영혼이 순화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남편을 잘 만난 것입니다. 우리 신자가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있으면 점점 깨끗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맺혀야 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5: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공평과 의로움을 바라신다고 했습니다. 갈 5:22,23절에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인격적인 것들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찾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묘한 속성이 있습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자꾸 하고 싶어집니다. 율법이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정욕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죄의 소욕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율법과의 갈등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특히 십계명 중에서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기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죄를 주체로 내세운 것은 죄가 얼마나 간사하고 강력하고 능력있는 존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죄를 자극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성교육이 실패한 이유는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가지고 온 그림이나 사진과 시청각 도구들이 학생들의 성 충동을 자극한 결과라고 합니다. 성교육을 할 때 구체적으로 자세히 말해서 자극이 되고 호기심을 자극해서 나쁜 쪽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천로 역정에 보면 크리스천이 먼지가 자욱한 방에서 빗자루를 가지고 방을 쓸고자 했지만 도리어 먼지를 일으키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빗자루가 곧 율법입니다. 사람 속에는 원래 먼지가 있고 죄가 있는 것인데 율법을 갖다 대면 확하고 일어납니다. 구정물 통을 두면 맑아 보이는데 막대기로 휘저으면 밑에 가라앉은 것이 다 떠오릅니다.
우리도 영적인 투쟁을 할 때 이런 것들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아 은혜 가운데 생활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이때 은혜는 떨어지고 해야만 한다는 율법적인 생각 때문에 지치고 영혼이 메말라 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내가 더욱 죄악된 소욕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죄가 기회를 타서 나로 죄를 짓게 하고 영적인 죽음에 이르도록 역사합니다. 죄를 지으면 기쁨을 주고 생명을 줄줄 알았는데 도리어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투쟁을 하기 위해서 100일 새벽 기도니, 3천명 전도니 하는 목표를 정해놓고 투쟁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새벽을 깨워서 일용할 양식을 매일 먹고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율법이 되어버리면 피곤한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것을 지키면 승리감이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좌절감이 들어옵니다. 죄책감이 들어옵니다. 목자로서 본을 보이지 못한다는 정죄를 느낍니다. 내 양심이 이것도 못하느냐고 소리칩니다. 영적인 힘이 없고 열정도 없고 성장이 없는 자신을 보고 절망하게 됩니다.
바울도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런 내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14-2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은 자신 속에 거하는 죄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21).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22).” 바울은 거룩한 삶을 살고자 투쟁하는 가운데 자신 속에 있는 한 다른 법 즉 한 세력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죄의 법이었습니다. 법이란 것은 백번이면 백번 다 자기를 넘어뜨리는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중력 속에서 우리가 물건을 위로 던지면 천 번이면 천 번 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투쟁을 하지만 그때만 반짝할 뿐 지속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거룩한 생활을 하고자 하지만 어떤 한계를 넘지 못하는 자신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임계점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율법적인 신앙생활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녹초가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어디에 길이 있습니까? 2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가 율법적인 신앙생활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내가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섬길 수 있습니다.
독일 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정이삭 선교사는 고 1 말에 눈깜박이는 강박관념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사람은 왜 눈을 깜박여야 하는가 안 깜빡일 수는 없는가?” 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깜빡여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안 깜박이고 싶어도 무조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깜빡여야 한다는 데에 그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고 일일이 계산하면서 그의 눈깜박이는 일은 매우 큰 중노동이 되어버렸습니다. 한번 깜박이고 나면 다시 깜박여야한다는 의무감이 그를 압박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깜박여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안 깜박이고 싶어 억지로 눈에 힘을 쓰고 참고 있으면 눈이 아파왔습니다. 하루 종일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이고 나면 온몸이 녹초가 되었고 눈과 목신경이 아파왔습니다. 이러다가 고혈압으로 죽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그는 대학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지만 이제는 율법적인 신앙생활로 고통했습니다. 그는 10전 11기에 독일어 시험에 합격하고 그 후에는 독학으로 5년간 컴퓨터를 공부하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업 앤 다운이 있었고 힘들면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 핸드폰을 끄고 잠수하였습니다. 그는 이 약점을 고치고자 했지만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새롭게 영접하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서 이 문제가 치유됨을 느꼈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그를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 것임을 깨닫고 값없이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율법적인 생각에서 자유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죄와 율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단계가 있고 그 다음으로 성령으로 사는 단계가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 하에 있는 사람도 죄와의 관계 속에서 죽을 때까지 갈등합니다.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가 극복되고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 때 성장합니다.
말씀 로마서 6,7장
요절 로마서 6:5
믿음의 성장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지기 때문에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합니다. 또한 환난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에 기초해서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까?
I. 죄로부터 해방된 생활 (6:1-23)
5장 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문으로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다’함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하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나 새 생명을 얻었음으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여긴다는 말은 사실을 사실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옛 사람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죽어서 없어졌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옛 사람이 다시 튀어나와서 나를 이끌어 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옛 사람과 나는 이제 단절되었고 끝난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노릇하며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삶을 새롭게 하는 근거는 바로 연합의 교리에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과 아내가 연합을 하게 됩니다. 처녀 총각이 결혼해서 한 몸이 되면 성을 통일해서 하나로 쓰고, 배우자의 재산과 지위를 하나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시부모, 시댁의 형제자매를 나의 형제자매로 맞아들입니다. 우리의 감정의 변화와 상관이 없습니다. 감정적인 변화가 따라 나오지 않지만 관계의 변화가 옵니다. 그리고 함께 살면서 점차 서로를 닮아가게 됩니다. 실제적인 것들을 함께 공유하면서 나중에는 얼굴까지도 닮아갑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것이 나에게 일어난 것으로 전가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법적으로 나의 것으로 변화가 됩니다. 골로새서 3:9b,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그 몸을 적극적으로 어떻게 써야 합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같은 물을 마시고서도 젖소는 우유를 생산하지만 독사는 독을 만들어 냅니다. 같은 칼이라도 강도가 쓰면 사람을 해하는 칼이 되고 의사가 쓰면 사람을 살리는 칼이 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죄에 드릴 때 부끄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신자들은 이제 선택이 그 삶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가운데 거룩한 열매를 많이 맺기를 기도합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할 때 죄를 짓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헌신할 때 영적인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릴 때 죄가 틈탈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릴 때 열정이 계속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그러나 자신을 드리지 않으면 있던 열정마저도 꺼져버립니다. 우리의 인생이 녹슬어서 폐기처분되는 것이 아니라 달아서 없어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Ⅱ.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생활 (7:1-25)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합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다른 남자에게 가더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합니다. 이는 율법과 우리의 관계를 부부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신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죽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에 매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힘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제 예수님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 말해서 사모님들이 남편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 내 영혼이 순화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남편을 잘 만난 것입니다. 우리 신자가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있으면 점점 깨끗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맺혀야 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5: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공평과 의로움을 바라신다고 했습니다. 갈 5:22,23절에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인격적인 것들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찾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묘한 속성이 있습니다.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자꾸 하고 싶어집니다. 율법이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정욕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죄의 소욕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율법과의 갈등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특히 십계명 중에서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기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죄를 주체로 내세운 것은 죄가 얼마나 간사하고 강력하고 능력있는 존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죄를 자극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성교육이 실패한 이유는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가지고 온 그림이나 사진과 시청각 도구들이 학생들의 성 충동을 자극한 결과라고 합니다. 성교육을 할 때 구체적으로 자세히 말해서 자극이 되고 호기심을 자극해서 나쁜 쪽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천로 역정에 보면 크리스천이 먼지가 자욱한 방에서 빗자루를 가지고 방을 쓸고자 했지만 도리어 먼지를 일으키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빗자루가 곧 율법입니다. 사람 속에는 원래 먼지가 있고 죄가 있는 것인데 율법을 갖다 대면 확하고 일어납니다. 구정물 통을 두면 맑아 보이는데 막대기로 휘저으면 밑에 가라앉은 것이 다 떠오릅니다.
우리도 영적인 투쟁을 할 때 이런 것들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아 은혜 가운데 생활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이때 은혜는 떨어지고 해야만 한다는 율법적인 생각 때문에 지치고 영혼이 메말라 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내가 더욱 죄악된 소욕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죄가 기회를 타서 나로 죄를 짓게 하고 영적인 죽음에 이르도록 역사합니다. 죄를 지으면 기쁨을 주고 생명을 줄줄 알았는데 도리어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투쟁을 하기 위해서 100일 새벽 기도니, 3천명 전도니 하는 목표를 정해놓고 투쟁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새벽을 깨워서 일용할 양식을 매일 먹고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율법이 되어버리면 피곤한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것을 지키면 승리감이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좌절감이 들어옵니다. 죄책감이 들어옵니다. 목자로서 본을 보이지 못한다는 정죄를 느낍니다. 내 양심이 이것도 못하느냐고 소리칩니다. 영적인 힘이 없고 열정도 없고 성장이 없는 자신을 보고 절망하게 됩니다.
바울도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런 내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14-2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은 자신 속에 거하는 죄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21).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22).” 바울은 거룩한 삶을 살고자 투쟁하는 가운데 자신 속에 있는 한 다른 법 즉 한 세력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죄의 법이었습니다. 법이란 것은 백번이면 백번 다 자기를 넘어뜨리는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중력 속에서 우리가 물건을 위로 던지면 천 번이면 천 번 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투쟁을 하지만 그때만 반짝할 뿐 지속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거룩한 생활을 하고자 하지만 어떤 한계를 넘지 못하는 자신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임계점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율법적인 신앙생활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녹초가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어디에 길이 있습니까? 2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가 율법적인 신앙생활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내가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섬길 수 있습니다.
독일 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정이삭 선교사는 고 1 말에 눈깜박이는 강박관념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사람은 왜 눈을 깜박여야 하는가 안 깜빡일 수는 없는가?” 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깜빡여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안 깜박이고 싶어도 무조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깜빡여야 한다는 데에 그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고 일일이 계산하면서 그의 눈깜박이는 일은 매우 큰 중노동이 되어버렸습니다. 한번 깜박이고 나면 다시 깜박여야한다는 의무감이 그를 압박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깜박여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안 깜박이고 싶어 억지로 눈에 힘을 쓰고 참고 있으면 눈이 아파왔습니다. 하루 종일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이고 나면 온몸이 녹초가 되었고 눈과 목신경이 아파왔습니다. 이러다가 고혈압으로 죽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그는 대학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지만 이제는 율법적인 신앙생활로 고통했습니다. 그는 10전 11기에 독일어 시험에 합격하고 그 후에는 독학으로 5년간 컴퓨터를 공부하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업 앤 다운이 있었고 힘들면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 핸드폰을 끄고 잠수하였습니다. 그는 이 약점을 고치고자 했지만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새롭게 영접하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서 이 문제가 치유됨을 느꼈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그를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 것임을 깨닫고 값없이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율법적인 생각에서 자유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죄와 율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단계가 있고 그 다음으로 성령으로 사는 단계가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 하에 있는 사람도 죄와의 관계 속에서 죽을 때까지 갈등합니다.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가 극복되고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 때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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