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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5 강(2:21-52) 기다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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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492회 작성일 11-04-03 15:08

본문

2011년 누가복음 제5강                                                       
본문 누가복음 2:21 - 52        요절 누가복음 2:25
기다리는 사람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는 성탄 연극에서 시므온 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연극을 준비하고 연습할 때 항상 참여해야 하지만 내가 무대에 서야 하는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무대에 서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매우 길었고 무대에 오르자마자 바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주인공들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주인공이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오늘은 그 시므온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할례할 팔 일이 되자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마 1:21). 이 이름은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이 이름을 천사가 알려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산모로서 마리아가 정결예식을 행할 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식을 행하였습니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마리아와 요셉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에 흠이 없이 정결예식을 행하고 아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아기를 키우고자 결심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믿음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았습니다. 어둡고 죄악된 시대에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현실과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조류를 따라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는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둘째, 시므온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그 위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육신적인 생각을 부인하고 영적인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기적인 생각, 이기적인 계획을 부인하고 손해가 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그의 마음에는 자유함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고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인 생각, 육신의 소욕을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 성령이 머무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우리 마음에 충만하며 말씀의 다스림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26절을 볼 때 이스라엘의 위로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위로의 근원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죄로 인해서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제국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에 돌아왔지만 헬라의 침공과 그 이후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이리 찢기고 저리 상하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앙적으로 억압과 착취와 어두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찬104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돋는 해로 임하셔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비추고 평강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주의 백성에게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굶주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셨습니다.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깨닫고 찬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36년의 고통, 6.25 전쟁, 4.19 학생 의거 및 5.16 혁명, 신군부의 통치 등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특히 북한의 위협과 공격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기 동안 이 민족은 교회로 나와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축복하셔서 경제적인 성장과 더불어 영적인 강국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계 역사상 이렇게 빨리 발전한 나라가 없습니다. 이제는 전 세계 169개국에 2만 2014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를 위로하는 민족으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은 쓰나미와 지진과 원전파괴로 인해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껴서 우리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구제헌금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호물자와 생수와 라면과 물질로 돕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교과서 개정을 하면서 학생들을 교육하고 이것이 우리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로를 주고 상처 받고, 일본은 위로 받고 상처를 줍니다. 이런 가운데 근본적으로 인간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웨스터민스터 요리문답을 공부했지만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이 있습니다. 그 1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우리 한번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일까? 자녀들이 공부를 잘할 때나 못할 때나, 직장일이 잘 풀릴 때나 안 풀릴 때나, 병들어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갑작스런 재난을 당했을 때에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진정한 위로는 어디 있습니까?  이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분은 그의 성령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가 주의 것이요 내 몸과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만큼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내가 원수들의 손에 잡혀 죽는다 해도 나는 주의 것이라는 이 사실만큼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이것저것 아쉬운 것이 많아 이렇게 슬프고 저렇게 속상해하고 울지만 다 잠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번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로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다 휩쓸려가 폐허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고 정말 세상은 사랑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잠시 세상 살면서 그렇게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일본 정부 관료들의 하는 짓이 밉고 역사를 왜곡하고 이중성으로 고통 하는 그들을 보면 불쌍합니다. 재난과 죽음 문제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깨닫고 나면 정말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주의 것이라는 것. 다 빼앗기도 다 망해도 내 몸과 영혼이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이 참된 위로가 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백성을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우리 개개인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죄로 인한 상처와 실망과 아픔들을 씻어주십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대신에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는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기다립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를 기다립니다. 만유가 회복되는 날 우리의 몸도 구속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날을 기다리면서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어떤 일을 해야겠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로 인해서 고통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외쳐야합니다.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주님께서 오심으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십니다.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그들의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신다고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외롭고 슬플 때는 누군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나를 깊이 사랑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위로가 됩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자기의 생명을 다 주면서 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는 성령을 보내사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로마서 8: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성령께서 일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도리어 자랑했습니다. 자기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와 계속해서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고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해본 사람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슬픔과 고통은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셔서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를 느끼며 살 때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넷째, 시므온은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시므온과 아기 예수님이 만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성령께서는 시므온에게 감동을 주는 역사를 연속적으로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8-32).” 그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림 같이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심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임무가 있었습니다. 이제 메시야를 품에 안고 일생의 긴 임무에서 벗어나게 된 소감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그는 이때를 보고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하여 살아왔습니다. 그의 사명은 끝났습니다. 사명을 마친 그는 기뻤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마치기까지는 놓아주지 않습니다. 사명인은 사명을 마치기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충성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부탁하는 사명을 죽기까지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딤후 2:2). 

  메시아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분입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입니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통찰력으로 앞으로 일어날 구속 사건을 미리 보았습니다. 시므온은 구원을 현재 목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구원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넘어 복음의 세계적 확장과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종과 신분의 장벽을 뛰어 넘어 온 세계에 전파됨으로 모든 민족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나라들보다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시 147:19,20;롬 3:1,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함은 물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영광을 빼앗기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34,35절을 보십시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했습니다. 그가 아기 예수님을 축복하지 아니한 것은 어떤 사람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축복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합니다. 그는 구원의 기준이 되십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배척하는 자는 멸망하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고발하고 죽이게 됩니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오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중보자요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내 쫓으시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그의 말씀과 행동을 살펴볼 때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로 인해서 그를 끊임없이 비방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사람들에게 비방과 조롱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사람들에게 칭찬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해도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판단보다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비방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아들을 볼 때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그 마음을 찌르듯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받은 칼은 골리앗의 칼을 가리킬 때와 같은 단어로서 고대 로마 트라키아인들이 차고 다니던 큰 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될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때로 우리가 받아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특히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날 때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말씀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이면 모든 악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악한 죄들을 씻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죽는 고통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죄악들이 드러났습니다. 제사장들의 시기와 미움과 살인, 군병들의 무자비함, 백성들의 무지와 무관심, 빌라도의 이기심과 명예욕, 그리고 나의 모든 죄악들이 다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에 대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예수님 앞에 나의 죄를 고백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됩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함으로 죄로 인한 상처에서 치유를 경험하고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힘들지만 아픔을 나눔으로 치유를 경험하고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고 말씀 앞에 기다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며 의롭고 경건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성령과 동행하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 위로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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