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911년 누가복음 4강(2:1-20) 구유에 누인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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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 4 강
말씀 누가복음 2:1-20
요절 누가복음 2:12
구유에 누인 아기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우리는 지난 주 그 백성을 돌보신 주님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주님은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심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오셨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 없이 그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역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주님으로부터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습니다. 호적하는 목적은 세금을 거두기 위함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인 이야기 제 6 권, 팍스 로마나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전쟁을 했다하면 패배한 사람이지만 탁월한 통치 능력을 갖고 있었고 현명하고 훌륭한 행정가였습니다. 그는 책임감과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포기’만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국가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해에 그는 63세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의 한 마디 명령에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이미 잉태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하였기 때문에 굳이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요셉은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였기에 동네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까봐 염려하여 데려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미 5:2의 예언, 곧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세계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입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를 썼는데 그가 세계 문명사를 연구한 결과 그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밝힙니다. 다니엘서에 역사의주관자 하나님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바벨론을 세우고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단4:30)” 이 말이 아직 그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후에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복음화가 지금과 같이 일어날 줄은 50년 전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각종 우상들이 제거되고 이데올로기로 인한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가정 교회에서 믿음을 키웠습니다. 그 결과 현재 1억 2천만 명이나 되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UBF 한국 대표와 UBF 세계 총재를 세우는 일 가운데도 친히 역사하셔서 합당한 분을 세우심을 믿습니다. 사람을 세우고 폐하는 일들이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에 사람을 세우시는 줄 믿습니다. 한 형제님이 지하철을 타고 홍대로 오면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심히 고민했습니다. 학교에 들어서자 한 예쁜 여자 분이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바이블 아카데미가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즉시 그 모임에 참석했고 일대일과 팀 모임을 이루고자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구원을 받고 복음 역사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둘째, 말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있을 때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즈음은 산모들이 병원이나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습니다. 당시도 아이를 낳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최근에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한 여성 승객이 급히 택시 뒷좌석에 타면서 산부인과로 가자고 했습니다. 갑자기 뒷좌석에서 양수가 터지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가만히 않아 미터기만 바라보면서 자기 택시를 더럽혔다면서 세탁비를 요구했습니다. 아기는 구조대원이 오기 전 10분 동안이나 탯줄을 달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멜리사 크로스데일(22·Mellisa Crosdale)입니다. 아마 이와 비슷한 상황이 마리아에게서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상상이 됩니다. 자기의 편안한 잠자리가 방해받을까봐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의 요청에 사람들은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미가서 5:2절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왕궁에 태어나도 부족한데 보통 집도 아니고 왜 마굿간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요? 그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답답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영접하시고 늦은 밤까지 영혼의 대화를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렇지만 니고데모의 마음은 너무나 많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고 교만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를 위해서 예수님은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들려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1미터이상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대화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은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통하기 위해서 함께 먹고 마시고 주무셨습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우시며 우리와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역사를 섬기려면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야 합니다.
당시나 오늘날이나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가난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난의 미덕은 잊히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요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 말기의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물질적인 것에 깊이 전념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무시를 받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천국이 임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죄 지을 기회가 줄어들기도 합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자족할 줄 모른다면 행복이 없지만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진정 행복합니다. 베네딕토회는 500년 이상 가난한 채로 남아 있으면서 노동과 기도와 선행에 헌신했습니다. 간소한 식사, 간소한 삶, 영원을 묵상할 시간, 그리고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인간으로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더배리 선교사님은 미시시피 공주로 살 수 있는 분이신데 한국에 오셔서 구들방에서 살고 연탄을 갈고 김치를 먹고 생활하면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난한 한국 학생들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면서 선교를 했을 때 놀라운 동질감을 느끼고 학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도 학생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면서 함께 생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구유 정신은 현실과 맞지 않는 전통을 고수하기보다 현 시대에 맞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고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CCM, 듀엣드라마, 영상 드라마, 영화설교,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접근 등은 그런 사례가 될 것입니다. 본 센터에서는 독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선교사님들이 갈색으로 머리 염색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카나다 워털루 센터에서는 누구든지 호칭을 부르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부릅니다. 그것이 카나다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카나다 학생들을 섬기기 위해서 한국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자기를 비운 사례들입니다. 그 결과 학생들은 편안함을 누리고 복음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8-21).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었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매우 낮은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육체노동자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은 그들에게 어떤 소식을 전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세상에 나쁜 소식이 넘쳐나고 있고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은 매우 적습니다. 대학 졸업생들의 40%만이 직장을 얻는 요즈음 물가가 오른다는 소식, 양치기가 어렵다는 소식, 연속되는 지진과 전쟁 소식, 폭동 소식, 자살 소식, 질병에 대한 소식, 끔찍한 살인과 각종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기쁜 소식은 누가 새롭게 일대일 양을 얻었다거나, 누가 아기를 낳았다, 승진을 했다는 소식 등입니다. 그런 소식은 몇몇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전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사방 팔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퇴로가 보이지 않는 포로들에게 위로부터 헬기를 타고 특공대가 구출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의 세력에 포위당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위로부터 구원자가 임하셨습니다. 구주가 오셨다는 소식이야 말로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일이요 그 이후에도 심판을 받아 영원한 고통에 처해야 하는 인생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구주 탄생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구주의 표적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입니다. 누가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록한 마태와 달리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체휼하기 위해서 오신 인자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버림 받은 자들의 슬픔과 상처를 그 몸으로 지고 가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세상에서 찰거머리와 같이 인간의 피를 뽑아먹고 사는 악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로 인해서 당하는 인생들의 슬픔과 아픔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이윤을 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압박하는 상사들 속에서 짓눌려 신음하는 직장인들, 입시 및 취직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서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형편을 아실까요? 히브리서 4:15,16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들이 천국에 들어갈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으니 하나님께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드러내니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사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인들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니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 평화는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의 마음에 샘솟는 기쁨과 강 같은 평화가 넘칩니다.
우리를 죄로 인한 심판과 비참함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구유에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원통한 마음과 한 맺힌 슬픔을 풀어주기 위해서 슬픔의 사람이 되신 주님, 고난의 주가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운명적인 인생을 섭리로 바꾸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말 구유에 누이신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던 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나의 교만과 자기 영광과 자기 사랑의 죄를 담당하사 고난 받으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구원 역사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누가복음 2:1-20
요절 누가복음 2:12
구유에 누인 아기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우리는 지난 주 그 백성을 돌보신 주님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주님은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심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오셨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 없이 그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역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주님으로부터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습니다. 호적하는 목적은 세금을 거두기 위함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인 이야기 제 6 권, 팍스 로마나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전쟁을 했다하면 패배한 사람이지만 탁월한 통치 능력을 갖고 있었고 현명하고 훌륭한 행정가였습니다. 그는 책임감과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포기’만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국가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해에 그는 63세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의 한 마디 명령에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이미 잉태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하였기 때문에 굳이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요셉은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였기에 동네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까봐 염려하여 데려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미 5:2의 예언, 곧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세계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입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를 썼는데 그가 세계 문명사를 연구한 결과 그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밝힙니다. 다니엘서에 역사의주관자 하나님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바벨론을 세우고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단4:30)” 이 말이 아직 그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후에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복음화가 지금과 같이 일어날 줄은 50년 전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각종 우상들이 제거되고 이데올로기로 인한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가정 교회에서 믿음을 키웠습니다. 그 결과 현재 1억 2천만 명이나 되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UBF 한국 대표와 UBF 세계 총재를 세우는 일 가운데도 친히 역사하셔서 합당한 분을 세우심을 믿습니다. 사람을 세우고 폐하는 일들이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에 사람을 세우시는 줄 믿습니다. 한 형제님이 지하철을 타고 홍대로 오면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심히 고민했습니다. 학교에 들어서자 한 예쁜 여자 분이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바이블 아카데미가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즉시 그 모임에 참석했고 일대일과 팀 모임을 이루고자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구원을 받고 복음 역사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습니다.
둘째, 말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있을 때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즈음은 산모들이 병원이나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습니다. 당시도 아이를 낳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최근에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한 여성 승객이 급히 택시 뒷좌석에 타면서 산부인과로 가자고 했습니다. 갑자기 뒷좌석에서 양수가 터지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가만히 않아 미터기만 바라보면서 자기 택시를 더럽혔다면서 세탁비를 요구했습니다. 아기는 구조대원이 오기 전 10분 동안이나 탯줄을 달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멜리사 크로스데일(22·Mellisa Crosdale)입니다. 아마 이와 비슷한 상황이 마리아에게서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상상이 됩니다. 자기의 편안한 잠자리가 방해받을까봐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의 요청에 사람들은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미가서 5:2절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왕궁에 태어나도 부족한데 보통 집도 아니고 왜 마굿간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요? 그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답답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영접하시고 늦은 밤까지 영혼의 대화를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렇지만 니고데모의 마음은 너무나 많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고 교만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를 위해서 예수님은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들려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1미터이상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대화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은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통하기 위해서 함께 먹고 마시고 주무셨습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우시며 우리와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역사를 섬기려면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야 합니다.
당시나 오늘날이나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가난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난의 미덕은 잊히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요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 말기의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물질적인 것에 깊이 전념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무시를 받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천국이 임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죄 지을 기회가 줄어들기도 합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자족할 줄 모른다면 행복이 없지만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진정 행복합니다. 베네딕토회는 500년 이상 가난한 채로 남아 있으면서 노동과 기도와 선행에 헌신했습니다. 간소한 식사, 간소한 삶, 영원을 묵상할 시간, 그리고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인간으로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더배리 선교사님은 미시시피 공주로 살 수 있는 분이신데 한국에 오셔서 구들방에서 살고 연탄을 갈고 김치를 먹고 생활하면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난한 한국 학생들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면서 선교를 했을 때 놀라운 동질감을 느끼고 학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도 학생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면서 함께 생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구유 정신은 현실과 맞지 않는 전통을 고수하기보다 현 시대에 맞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고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CCM, 듀엣드라마, 영상 드라마, 영화설교,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접근 등은 그런 사례가 될 것입니다. 본 센터에서는 독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선교사님들이 갈색으로 머리 염색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카나다 워털루 센터에서는 누구든지 호칭을 부르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부릅니다. 그것이 카나다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카나다 학생들을 섬기기 위해서 한국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자기를 비운 사례들입니다. 그 결과 학생들은 편안함을 누리고 복음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8-21).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었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매우 낮은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육체노동자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은 그들에게 어떤 소식을 전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세상에 나쁜 소식이 넘쳐나고 있고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은 매우 적습니다. 대학 졸업생들의 40%만이 직장을 얻는 요즈음 물가가 오른다는 소식, 양치기가 어렵다는 소식, 연속되는 지진과 전쟁 소식, 폭동 소식, 자살 소식, 질병에 대한 소식, 끔찍한 살인과 각종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기쁜 소식은 누가 새롭게 일대일 양을 얻었다거나, 누가 아기를 낳았다, 승진을 했다는 소식 등입니다. 그런 소식은 몇몇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전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사방 팔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퇴로가 보이지 않는 포로들에게 위로부터 헬기를 타고 특공대가 구출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의 세력에 포위당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위로부터 구원자가 임하셨습니다. 구주가 오셨다는 소식이야 말로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일이요 그 이후에도 심판을 받아 영원한 고통에 처해야 하는 인생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구주 탄생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구주의 표적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입니다. 누가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록한 마태와 달리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체휼하기 위해서 오신 인자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버림 받은 자들의 슬픔과 상처를 그 몸으로 지고 가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세상에서 찰거머리와 같이 인간의 피를 뽑아먹고 사는 악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로 인해서 당하는 인생들의 슬픔과 아픔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이윤을 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압박하는 상사들 속에서 짓눌려 신음하는 직장인들, 입시 및 취직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서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형편을 아실까요? 히브리서 4:15,16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들이 천국에 들어갈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으니 하나님께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드러내니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사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인들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니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 평화는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의 마음에 샘솟는 기쁨과 강 같은 평화가 넘칩니다.
우리를 죄로 인한 심판과 비참함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구유에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원통한 마음과 한 맺힌 슬픔을 풀어주기 위해서 슬픔의 사람이 되신 주님, 고난의 주가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운명적인 인생을 섭리로 바꾸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말 구유에 누이신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던 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나의 교만과 자기 영광과 자기 사랑의 죄를 담당하사 고난 받으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구원 역사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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