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3 강(1:57-80) 그 백성을 돌보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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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3강
본문 누가복음 1:57 - 80요절 누가복음 1:68
그 백성을 돌보신 주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지난 주 우리는 마리아의 찬송시를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사가랴의 찬송시입니다. 마리아가 소프라노 음성으로 개인에게 임한 은혜를 찬양했다면, 사가랴는 좀 더 웅장하게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리톤으로 불렀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자 이웃과 친족들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늙도록 아이가 없던 사가랴 목자님의 가정에 아이의 탄생으로 인해서 웃음꽃이 만발했습니다. 머리가 희어진 할아버지가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할례를 행하고자 했습니다. 고목나무에 싹이 핀 모습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사가랴와 그 친족들은 아이가 태어난 지 팔일이 되어 할례를 하러 와서 이름을 사가랴라 짓고자 했습니다. 이때 어머니 엘리사벳이 급히 나서며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라 해야 한다. 아니라.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고 실랑이를 하였습니다. 친족들은 이 아이가 가문을 일으켜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사가랴에게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었습니다. 그들이 사가랴에게 몸짓을 한 것을 볼 때, 그는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His name is John.)”고 썼습니다. 사람들은 두 노인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고 다 놀랍게 여겼습니다. 두 사람이 부부라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 같은데 무엇이 그리 놀라운 일일까요? 그들이 놀랍게 여긴 이유는 요한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주신 이름입니다. 요한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사가랴 부부에게 떡두꺼비 같은 아들 요한이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철회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장차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됨은 더욱 큰 은혜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는 순간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답답해서 혼났다, 아 죽는 줄 알았네. 천사 지가 뭔데”라고 말할 법도 한데 그의 입에서는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는 열 달 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 모든 관계를 끊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수록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사가랴가 찬송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68절을 노래하듯이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셨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 방문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서 찾아오셨듯이 그 백성의 부끄러움을 제하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은 400년 동안 말씀이 없이 어두움 가운데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으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가 무르익자 그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시고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메시야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사 그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한다는 말은 그 백성을 찾아오셔서 갚을 치루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몸값을 지불하고 감옥에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런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돌보셨습니까? 일본 센다이 지역에 닥친 지진과 쓰나미와 원전사고로 속에서 누가 그들을 돌볼 수 있습니까? 그들은 23m 높이의 쓰나미로 인해서 한 순간에 집과 자동차와 가족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버렸습니다. 타임지 표지에 한 여자가 울고 있는 사진이 실렸습니다(사진1). 주제임스 마리아 선교사님이 개척한 게이오 대학에 재학 중인 20세 청년 쓰루타 히로유키는 지진 직후 트위터에 올라온 글을 모아 일본을 위한 기도 사이트를 개설했습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한국인 친구가 조금 전 보내온 이메일. ‘세계 유일의 핵 피폭국, 전쟁에 진 나라. 매년 태풍이 온다. 지진과 해일도 오는 작은 섬나라이지만 다시 일어선 일본아냐. 힘내라 완전 힘내라.’ 나 지금 울고 있다.”(@copedy)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구조대가 갔습니다. 외국에서는 한국에서 제일먼저 긴급 구조대 108명이 파견되었습니다. 기독교 국제 봉사단도 파견되어 구호품을 전달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36년 동안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받았지만 이들에 대한 연민이 불길같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그들로 인해서 일생 고통을 받았지만 그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제안했고 활발한 모금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지진이나 태풍을 늘 겪다보니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섬기는 신들이 그렇게 많은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69-71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구원의 뿔 되신 예수님은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사단은 인격적인 실체로서 우리를 속이고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죽이는 존재입니다. 사단은 그의 종된 사람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우리의 삶은 사단과의 보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이런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힘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뿔이란 구원하는 힘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는 구원을 정치적, 군사적인 침략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탄과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가난과 불의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질병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압제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총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영혼의 구원만 구원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의식과 낮은 자존감에서 구원하십니다. 게으름에서 나쁜 습관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한 형제님은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은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 생활을 시작하면서 시험 성적이 수직 상승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뿔되신 예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고 삶의 방향과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 목자님은 1000:1의 경쟁력을 뚫고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여 가정 교회 역사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학생 양을 얻기가 어려운데 학생 양과 일대일을 함으로 방황하던 데서 성경 선생의 길을 찾은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74,7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원수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복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싶은 강력한 소원이 있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참된 경배의 대상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참된 경배의 대상을 찾지 못했을 때 남편을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되지 않아서 남편을 다섯 명이나 바꾸었습니다. 그래도 만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어서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물 긷던 항아리를 두고 마을에 들어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던 질문은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왜 자신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데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가?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하는 이 여인에게 참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사가랴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노예적인 공포를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서 이제는 종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로서 나아갑니다.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은 위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아래로 사람들에게 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속받은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고 함이지 자신의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평안을 누리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예배하고 섬기고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장손으로서 조상신에게 제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공허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참 신이 있다면 마음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삶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예배할 때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사가랴의 아들 요한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76,77절을 보십시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가 됩니다. 그는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 역할을 합니다. 그는 주의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여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합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죄의 심각성을 깨우치고 예수님만이 죄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 모태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의무적이고 이론적이고 의례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깊이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내가 애쓰고 눈물을 흘린다고 은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임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합니까?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돋는 해 같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모든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십니다. 냉랭한 마음에 따뜻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돋는 해로서 임하실 때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뀝니다. 죄로 인해서 마음과 삶이 어둡고 죽음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서 터널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터널은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돋는 해가 되신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인생은 어떤 시련도 문제도 넉넉히 이기고 생명의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참 소망이십니다. 내 인생의 길이 되시고 목자가 되십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취업이 되지 않고 미래가 암당하고 인생의 길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돋는 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빛을 받으면 어둠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되고 길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고 희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어둠도 물리쳐 주시고 죄의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험한 세상을 능히 헤쳐 나갈 만한 힘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소망하며 인생의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통해서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우리에게 돋는 해로 임하신 주님으로 인해서 평강의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목숨을 걸고 성결과 의로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1:57 - 80요절 누가복음 1:68
그 백성을 돌보신 주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지난 주 우리는 마리아의 찬송시를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사가랴의 찬송시입니다. 마리아가 소프라노 음성으로 개인에게 임한 은혜를 찬양했다면, 사가랴는 좀 더 웅장하게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리톤으로 불렀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자 이웃과 친족들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늙도록 아이가 없던 사가랴 목자님의 가정에 아이의 탄생으로 인해서 웃음꽃이 만발했습니다. 머리가 희어진 할아버지가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할례를 행하고자 했습니다. 고목나무에 싹이 핀 모습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사가랴와 그 친족들은 아이가 태어난 지 팔일이 되어 할례를 하러 와서 이름을 사가랴라 짓고자 했습니다. 이때 어머니 엘리사벳이 급히 나서며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라 해야 한다. 아니라.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고 실랑이를 하였습니다. 친족들은 이 아이가 가문을 일으켜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사가랴에게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었습니다. 그들이 사가랴에게 몸짓을 한 것을 볼 때, 그는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His name is John.)”고 썼습니다. 사람들은 두 노인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고 다 놀랍게 여겼습니다. 두 사람이 부부라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 같은데 무엇이 그리 놀라운 일일까요? 그들이 놀랍게 여긴 이유는 요한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주신 이름입니다. 요한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사가랴 부부에게 떡두꺼비 같은 아들 요한이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철회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장차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됨은 더욱 큰 은혜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는 순간 그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답답해서 혼났다, 아 죽는 줄 알았네. 천사 지가 뭔데”라고 말할 법도 한데 그의 입에서는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는 열 달 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 모든 관계를 끊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수록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사가랴가 찬송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68절을 노래하듯이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셨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 방문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서 찾아오셨듯이 그 백성의 부끄러움을 제하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은 400년 동안 말씀이 없이 어두움 가운데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으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가 무르익자 그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시고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메시야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사 그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한다는 말은 그 백성을 찾아오셔서 갚을 치루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다는 뜻입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몸값을 지불하고 감옥에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런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돌보셨습니까? 일본 센다이 지역에 닥친 지진과 쓰나미와 원전사고로 속에서 누가 그들을 돌볼 수 있습니까? 그들은 23m 높이의 쓰나미로 인해서 한 순간에 집과 자동차와 가족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버렸습니다. 타임지 표지에 한 여자가 울고 있는 사진이 실렸습니다(사진1). 주제임스 마리아 선교사님이 개척한 게이오 대학에 재학 중인 20세 청년 쓰루타 히로유키는 지진 직후 트위터에 올라온 글을 모아 일본을 위한 기도 사이트를 개설했습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한국인 친구가 조금 전 보내온 이메일. ‘세계 유일의 핵 피폭국, 전쟁에 진 나라. 매년 태풍이 온다. 지진과 해일도 오는 작은 섬나라이지만 다시 일어선 일본아냐. 힘내라 완전 힘내라.’ 나 지금 울고 있다.”(@copedy)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구조대가 갔습니다. 외국에서는 한국에서 제일먼저 긴급 구조대 108명이 파견되었습니다. 기독교 국제 봉사단도 파견되어 구호품을 전달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36년 동안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받았지만 이들에 대한 연민이 불길같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그들로 인해서 일생 고통을 받았지만 그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제안했고 활발한 모금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지진이나 태풍을 늘 겪다보니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섬기는 신들이 그렇게 많은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69-71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구원의 뿔 되신 예수님은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사단은 인격적인 실체로서 우리를 속이고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죽이는 존재입니다. 사단은 그의 종된 사람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우리의 삶은 사단과의 보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이런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힘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뿔이란 구원하는 힘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는 구원을 정치적, 군사적인 침략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탄과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가난과 불의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질병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압제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총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영혼의 구원만 구원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의식과 낮은 자존감에서 구원하십니다. 게으름에서 나쁜 습관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한 형제님은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은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 생활을 시작하면서 시험 성적이 수직 상승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뿔되신 예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고 삶의 방향과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 목자님은 1000:1의 경쟁력을 뚫고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여 가정 교회 역사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학생 양을 얻기가 어려운데 학생 양과 일대일을 함으로 방황하던 데서 성경 선생의 길을 찾은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74,7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원수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복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싶은 강력한 소원이 있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참된 경배의 대상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참된 경배의 대상을 찾지 못했을 때 남편을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되지 않아서 남편을 다섯 명이나 바꾸었습니다. 그래도 만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어서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물 긷던 항아리를 두고 마을에 들어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던 질문은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왜 자신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데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가?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하는 이 여인에게 참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사가랴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노예적인 공포를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서 이제는 종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로서 나아갑니다.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은 위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아래로 사람들에게 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속받은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고 함이지 자신의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평안을 누리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예배하고 섬기고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장손으로서 조상신에게 제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공허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참 신이 있다면 마음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삶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예배할 때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사가랴의 아들 요한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76,77절을 보십시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가 됩니다. 그는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 역할을 합니다. 그는 주의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여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합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죄의 심각성을 깨우치고 예수님만이 죄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 모태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의무적이고 이론적이고 의례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깊이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입니다. 내가 애쓰고 눈물을 흘린다고 은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임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합니까?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돋는 해 같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모든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십니다. 냉랭한 마음에 따뜻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돋는 해로서 임하실 때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뀝니다. 죄로 인해서 마음과 삶이 어둡고 죽음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서 터널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터널은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돋는 해가 되신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인생은 어떤 시련도 문제도 넉넉히 이기고 생명의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참 소망이십니다. 내 인생의 길이 되시고 목자가 되십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취업이 되지 않고 미래가 암당하고 인생의 길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돋는 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빛을 받으면 어둠과 절망에서 벗어나게 되고 길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고 희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어둠도 물리쳐 주시고 죄의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험한 세상을 능히 헤쳐 나갈 만한 힘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소망하며 인생의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통해서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우리에게 돋는 해로 임하신 주님으로 인해서 평강의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목숨을 걸고 성결과 의로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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