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10년 성탄 수양회 1강(고전15:9-10)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김엘리야)
페이지 정보

본문
2010 연말 성탄 수양회①고린도전서 15:9,10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9,10절은 바울 사도의 살아온 삶에 대한 회고이며, 개인적인 간증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것이 어찌 비단 바울 사도 한분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쉽게 말해, 바울 사도가 그리하다면 우리는 어쩌겠습니까? 흠없이 살려고 처절하게 노력했던 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고백했다면, 함부로 거칠게 살았던 우리의 고백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도 지난 나의 삶을 돌아보며 신앙 고백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다시 새롭게 방향 잡는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첫째, 내가 나 된 것은
바울 사도의 간증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첫째가 ‘내가 나 된 것은’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죄인이었던 그가 구원 받은 은혜를 말합니다. 바울의 구원의 은혜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 속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3년간 머물던 때에 썼습니다. 이 기간은 시쳇말로 가장 잘 나갈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바울은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합니까? 8절에서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칠삭둥이로 태어났는데 겨우 1.18kg이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다 자라고 3.8kg, 혹은 4kg으로 나와야 하는데, 만삭되지 못하고 나온 아이는 몸무게도 작고 몸도 약합니다. 이를 빗대어 온전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부족한 사람을 가리킬 때,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런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지극히 작다는 것은 최상급 표현입니다. the least, 가장 작은 자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것은 그로서는 씻을 수 없는 허물입니다. 죄입니다. 바울로 인해 고문당하고, 죽어간 사람을 생각하면 그의 죄에 대한 벌은 죽음일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자신을 일컫어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라고 합니다. 칠삭둥이, 팔삭둥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는 이해가 됩니다. 자신은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없고, 사도라 칭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바울은 존경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큰일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어두운 점, 나의 부족함, 나의 약함, 나의 못함, 나의 못남을 은근히 감추고 싶지 않겠습니까? 대신에 내가 잘하는 모습, 흠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람은 이 정도 되면 내가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뛰어나서, 내가 명석해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뭔가 남달라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말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자존심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자존심의 존재입니다.
내가 저 사람 보다 못하다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내가 이 사람들 중에서 뒤쳐진다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입니까?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다’, ‘사는 사도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다’. 이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쉬울까요? 보통 사람으로서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자신을 이렇게 낮추는 것일까요? 왜 자신을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로 만드는 것일까요? 이곳뿐만 아니라 그의 메시지, 그의 서신서 곳곳에는 교회를 박해한 죄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 ‘만삭되지 못해 난 자’, ‘지극히 작은 자’, ‘은혜를 감당치 못할 자’ 등등으로 소개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오늘과 같이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바울은 언제 어느 때나 일생 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죄에서 구원 받은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겸손함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겸손을 잃으면 자신을 뽐내고 싶어 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위험해집니다. 특히 저는 젊어서 성공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잊혀지고, 겸손을 잃어버린 그 빈자리에 ‘자기’가 채워집니다. 그러면 딱딱해지고, 완고해지고, 음흉해지고, 결국 불행해집니다.
우리 젊은 학생 형제자매님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이 시기에 자신의 감당 못할 죄와 심각한 허물을 발견하고, 죄인의 자리에 서십시오. 그것도 지독한 죄인, 절망적인 죄인이 되십시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다’, ‘나는 모든 사람들 보다 지극히 작은 자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다’는 고백이 흘러나온다면 여러분은 소망이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분을 주님이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깊이 간직하십시오. 그것이 평생 여러분들을 위험과 위기로부터 지켜 줄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아름답고 값진 사람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점점 나이 먹어 가는 목자님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가 나의 원죄입니다. 물론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그 죄는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그 죄는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람들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내가 그 죄로부터 구원 받은 사실 까지 잊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 먹어갈수록,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져 갈수록, 가진 것이 많아져 갈수록, 이룬 일이 쌓여 갈수록 우리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더 분명해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입니다.’ ‘나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처럼 더럽고 음란하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교회를 박해할만한 열정도 없었습니다. ‘너나 잘해라’는 말 한마디면 찌그러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대해 열심을 갖고, 외적으로는 계명과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교회를 핍박하는 정도의 사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주변 언저리라도 갈 정도라면 좋겠습니다. 저의 수준은 너무 떨어집니다. 바울 사도가 어머니 뱃속에서 만삭되지 못하여 났다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시험관에서 만삭되지 못하여 났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가장 작은 자라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작은 자를 섬기는 무수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과 우리와의 객관적인 비교가 그러합니다.
그러면 오늘 내가 나 된 것은 분명해집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이 되었다면, 시험관에서 만삭되지 못하여 난 내가, 무수리에 불과한 내가 오늘 이런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 은혜로 잊지 않고 살 뿐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감사함으로 감당할 뿐입니다. 특별히 인간적으로 높아질수록 더욱 우리는 낮아집시다. 나이 먹어갈수록 더욱 어린 자리로 갑시다. 그래서 항상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드러냅시다. 나는 밑으로 내려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높아져 가는 사람, 그런 삶이 됩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우리 주님이 바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성탄 전야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이 종이 되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세상에!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그것이 이해가 되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존경합니다. 언제 예수님이 자신을 존경하라고 하셨습니까? 보기에 좋은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까? 보기에 좋은 모습이 있으셨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 성화를 다 태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영화 주인공을 다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너무 멋있어요. 그것 때문에 사랑하고 좋아하면 안 됩니다. 제일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우면 맞을 것입니다. 왜냐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보잘 것 없어 보이셨겠습니까? 그러나 그래서 그분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귀한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내게 임한 구원을 기억함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평생 기억합시다. 외적으로 쌓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잃어버리지 맙시다.
둘째,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바울 사도의 두 번째 간증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되었다’입니다. 즉, 그의 삶에 대한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자격 없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셨고, 그에게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후에 어떻게 사느냐’도 또한 중요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되느냐, 헛되게 되느냐’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헛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많이 수고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무엇을 위해 수고했습니까? 복음을 지키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거짓 사상, 즉 율법주의, 이원주의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지키기 위해 바울이 겪은 수고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큽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 밖에서 공격하는 사람과 교회 안에서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밖에서 공격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로 무장한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공격하는 사람들은 이원주의로 무장한 쾌락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회 밖에서 공격하는 자들은 돌로 때리고, 고소해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공격하는 자들은 말로 인신공격하고, 바울의 외모, 말, 권위를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가운데 복음을 지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했습니다. 1세기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빈 발자취는 놀랍기만 합니다.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은 공식 기록이고, 4차 전도여행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겪은 수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바울의 외적 수고도 크겠지만, ‘양들로 인해 마음의 부담감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말할까’, 그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우리는 몇 명의 양을 놓고도 염려하고, 애타합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그 많은 양들로 인해 얼마나 애가 탔을까 생각할 때, 바울의 수고가 저며 옵니다.
이처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좋은 것일수록 지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왜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노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예전에 동물의 왕국을 본적이 있는데, 배고픈 표범이 어린 톰슨가젤을 사냥했습니다. 표범은 먹잇감을 물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하는데, 배고픈 사자들이 이를 보고 쫓아왔습니다. 사자들이 으르렁대자 표범은 할 수 없이 먹잇감을 내놓고 도망쳤습니다. 먹잇감을 빼앗은 사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잠시, 하이에나 떼가 몰려와 주위를 돌며 컹컹거렸습니다. 사자들은 편하게 먹지 못했습니다. 좀 먹으려고 하면 뒤에서 하이에나가 달려들었습니다. 사자들은 포기하고 먹잇감을 놓고 가버렸습니다. 결국 하이에나 떼가 달려들어 먹잇감을 해치워버렸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귀하고, 너무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 추위에도 연평도를 지키기 위해 밤을 새는 병사들처럼 나도 이 은혜를 지키기 위해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은혜로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면, 더 이상 죄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죄로 달려가는 것은 수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에서 들어오는 생각대로 하면 됩니다. 본성대로 하면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저는 자기부인하면서 밤새도록 게임을 했다는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시험 끝나고 누워 TV를 보느라 수고했다는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게임, TV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본성대로 내버려 하면 결과는 자명합니다. 그러나 일어나 TV를 끄고 말씀을 보는 것은 뼈를 깎는 수고를 해야만 가능합니다. 쉽게 죄와 타협하고, 은혜를 죄의 구실로 삼으면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 받았는데, 그것을 이기적인 욕망과 육체의 쾌락을 쫓는데 사용하면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이상하게 죄가 싫어집니다. 죄가 있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견딜 수 없어집니다. 왜냐면 성결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성결은 너무도 깨끗하고 흠이 없습니다. 그 성결에는 작은 누룩도 금방 표시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선 사람은 죄로부터 성결을 지키기 위해 죄와 싸웁니다.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죄와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죄에 약하면 말씀을 붙들고 또 기도합니다. 이것이 수고스럽지만,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너무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음의 가치관이 바뀝니다. 그래서 마음 중심에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구합니다. 그럴 때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하면 손해 보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부인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수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주신 은혜는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럴 때면 그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주와 복음도 욕을 얻어먹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수고이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값진 것이 됩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울 때, 수고스럽지만 은혜가 더욱 빛이 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수고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수고가 많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것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합니다. 수고가 많은 사람이 더 은혜를 값지게 하는 것입니다. 수고가 많은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수고를 많이 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그가 받은 은혜가 더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더 많이 수고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값지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더 많이 수고한다고 손해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덜 수고하는 다른 사도들을 판단하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내가 수고한 것은 내 상입니다. 내가 더 은혜를 값지게 했으니, 내가 받은 은혜가 더 빛날 뿐입니다. 받은 은혜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종로센터에 최선남 목자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특별히 그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얼마 전 학생 예배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으로, 이분은 87년도에 선교후보로 와서 동교센터에서 선교후보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한국 사람이 비자를 받기 어려워 미싱공 기술자로 비자를 얻고자 재봉틀을 열심히 돌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제도가 없어지면서 종로2부로 왔습니다. 이분은 조용한 분입니다. 이후 계속 함께 역사를 섬겼는데, 신기하게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순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작이 빠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양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항상 역사 속에 있었는데,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항상 묵묵히 있었기 때문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장막의 냄비가 다 찌그러져 성한 것이 없었다는 말을 어깨 너머로 들었습니다. 찬송가에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는 노래는 은혜롭게 부르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섬기는 일에 이분이 항상 들어가 있었습니다. 새벽에 강사 식사 서빙을 내 놓으면서 특유의 점잖은 음성으로 ‘식사하세유~’라고 했던 그 말은 아직도 제 귓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번 학생 예배에도 와서 국을 열심히 퍼주었습니다. 이분 동역자도 비슷합니다. 졸업 후 직장을 다니다가 꽤 긴 기간 동안 실직해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그는 돌파구로 땅을 뚫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땅 오염도를 측정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15년 가까이 경력이 붙어서 안정이 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저는 이 두 분을 생각하면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가 생각이 납니다.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는 제사장 집안이었지만 아이가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아이가 없다는 것은 수치입니다. 오해를 많이 받을만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흠없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 수고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고, 그러나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사람의 마지막에 세례 요한을 주시지 않습니까?
이분들이 그런 부부입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선남 사모님은 저를 보며 특유의 느린 말로 ‘오셨어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양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학생들에게 국을 퍼주는 그분을 보면서 저는 그분이 몹시 귀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일까요? 이분들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런 분들과 동역했다는 것이 감사하고, 이런 분들이 저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주위에서 믿음으로 사는 분들을 통해 보고 확신하는 바가 있습니다. 수고가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수고가 많을수록 더 아름답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매를 맞을 때 안쓰럽습니다.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조롱 받을 때, 시험에 들 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오해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지키기 위해 그 모든 수고를 다 감당했을 때,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름답게 빛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들은 중도에 어떻게 보인다 할지라도 분명 그렇게 될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수고할수록 더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분들이시여!
올 한 해 동안 내게 주신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 수고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죄와 싸우기 위해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자기 부인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한 해 동안 소감 쓰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토요일마다 목자 공부 모임 나오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하디모데 목자님은 토요일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모임을 하기 위해 옵니다. 한주도 거르지 않고, 소감을 써서 옵니다. 많은 주 동안 디모데 목자님 혼자 소감 발표를 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받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양을 감당하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눈물 겹도록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혹 다른 사람 보다 더 수고하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플 때가 있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편하고 쉽게 살지 못해 힘든 생각이 들 때도 있으셨습니까? 내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할 때도 있으셨습니까? 수고를 알아주기는커녕 오해 받는 것 같아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겪지는 않으셨습니까? 수고를 했는데 아무런 보상, 결과가 없는 것 같아 답답하고 괴롭지는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내 청춘 시드는 것 같아 눈물이 나지는 않으셨습니까? 바울 사도가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다른 말로 쉽게 표현하면, ‘내가 더 많이 수고함으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수고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하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수고로 인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 아름다워집니다. 값진 것이 됩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저는 우리 모임에 목자님들은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목자님의 그 모든 수고가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위로 삼아 더 수고하십시오. 2011년에 더 수고하고자 방향을 잡으십시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수고하지 않고자 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수고하고자 방향 잡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시대 조류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힘듭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내년에는 더 거룩해집시다. 더 성결해집시다. 더 섬깁시다. 더 복음을 전합시다. 학생도 좋고, 주위 동료도 좋고, 아줌마도 좋고, 아저씨도 좋고, 후배도 좋고, 선배도 좋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의 노동을 감당합시다. 그 모든 수고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리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은 더욱 값지고 해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삶이 되어갈 것입니다.
셋째,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 사도의 세 번째 간증은 더 많이 수고해서 많은 결과가 있었는데, 그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결과에 대한 간증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자랑할 것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럴 때 어떻게 하기 쉽습니까? ‘내가 기도했더니 이렇게 되었다. 내가 단상을 눈물로 적셨더니 이렇게 되었다. 내가 말씀을 잘 전했더니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이는 매우 영적인 말 같지만 또 한발만 잘못 디디면 위험할 소지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얼마나 쉽고, 간단하고, 은혜롭습니까? 사람이 별 볼일 없어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사람이 진정으로 멋진 사람입니다. 저는 이것이 좋은 분별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렇게 되었다. 내가 좀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되었다. 내가 좀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 내가 좀 고생했더니 이렇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내가, 내가...’ 나를 앞세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다가 마지막이 수렁으로 빠지면 더욱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열심히 수고하면 남는 것이 있습니다. 때로 헛수고를 하는 것 같지만 헛수고는 없습니다. 수고한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최선남 사모님도 상명대에서 시니어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수고를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이기는 씨름을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면 더욱더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워 보십시오. 쉽게 이깁니까? 번번이 넘어집니다. 죄와 싸우는 사람은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조금씩 점점 더 죄를 이겨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내면의 속성이 변화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십시오. 못한다는 것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해야 하는데, 내가 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많은 전도의 열매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서신서 곳곳을 보면, 떠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또 바울이 옥에 갇히자 ‘이때다’하면서 순수하게 못하게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바울이 자기가, 자기 힘으로, 자기 의지로 다 감당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미쳐 죽었을 것입니다. ‘내가 결혼도 포기하고 복음을 전했는데, 이게 뭔가?’ 그렇지만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했기 때문에 어떤 가운데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다툼으로 하든, 경쟁으로 하든, 시기로 하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니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체험적으로 깊이 압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복음 전도이며, 거룩한 삶이며, 믿음의 삶입니다. 바울이 죄와 싸우다가 고백하지 않습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의 속사람은 하나님을 법을 즐거워하는데 내 몸 속에서 또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끌고 다니는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기에 했어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합니다. 잘되었어도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잘합니다. 내가 이겼어도 하나님이 이기게 하셔서 이깁니다. 못했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져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다시 도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자가 되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런 수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를 통해 무엇인가를 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게 합니다. 내가 하지 못할 것도 하게 하시고, 내가 실패한 것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않게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잘되었다면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 됩니다. 잘되지 못했다면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면 됩니다.
오늘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 때, 그 은혜가 헛되지 않게 살게 됩니다. 내가 한 것이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되며, 더욱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잊으면 그 은혜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은혜로 되었음을 잊으면 한 일이 썩고 부패해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신앙 고백은 삶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모든 신앙인들의 고백이어야 하며,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나 되었습니다. 오직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한 모든 것이 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입니다.
2011년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9,10절은 바울 사도의 살아온 삶에 대한 회고이며, 개인적인 간증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것이 어찌 비단 바울 사도 한분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쉽게 말해, 바울 사도가 그리하다면 우리는 어쩌겠습니까? 흠없이 살려고 처절하게 노력했던 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고백했다면, 함부로 거칠게 살았던 우리의 고백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도 지난 나의 삶을 돌아보며 신앙 고백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다시 새롭게 방향 잡는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첫째, 내가 나 된 것은
바울 사도의 간증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첫째가 ‘내가 나 된 것은’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죄인이었던 그가 구원 받은 은혜를 말합니다. 바울의 구원의 은혜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 속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3년간 머물던 때에 썼습니다. 이 기간은 시쳇말로 가장 잘 나갈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바울은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합니까? 8절에서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칠삭둥이로 태어났는데 겨우 1.18kg이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다 자라고 3.8kg, 혹은 4kg으로 나와야 하는데, 만삭되지 못하고 나온 아이는 몸무게도 작고 몸도 약합니다. 이를 빗대어 온전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부족한 사람을 가리킬 때,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런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지극히 작다는 것은 최상급 표현입니다. the least, 가장 작은 자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것은 그로서는 씻을 수 없는 허물입니다. 죄입니다. 바울로 인해 고문당하고, 죽어간 사람을 생각하면 그의 죄에 대한 벌은 죽음일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자신을 일컫어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라고 합니다. 칠삭둥이, 팔삭둥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는 이해가 됩니다. 자신은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없고, 사도라 칭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바울은 존경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큰일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어두운 점, 나의 부족함, 나의 약함, 나의 못함, 나의 못남을 은근히 감추고 싶지 않겠습니까? 대신에 내가 잘하는 모습, 흠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람은 이 정도 되면 내가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뛰어나서, 내가 명석해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뭔가 남달라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말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자존심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자존심의 존재입니다.
내가 저 사람 보다 못하다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내가 이 사람들 중에서 뒤쳐진다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입니까?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다’, ‘사는 사도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다’. 이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쉬울까요? 보통 사람으로서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자신을 이렇게 낮추는 것일까요? 왜 자신을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로 만드는 것일까요? 이곳뿐만 아니라 그의 메시지, 그의 서신서 곳곳에는 교회를 박해한 죄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 ‘만삭되지 못해 난 자’, ‘지극히 작은 자’, ‘은혜를 감당치 못할 자’ 등등으로 소개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오늘과 같이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바울은 언제 어느 때나 일생 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죄에서 구원 받은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겸손함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겸손을 잃으면 자신을 뽐내고 싶어 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위험해집니다. 특히 저는 젊어서 성공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잊혀지고, 겸손을 잃어버린 그 빈자리에 ‘자기’가 채워집니다. 그러면 딱딱해지고, 완고해지고, 음흉해지고, 결국 불행해집니다.
우리 젊은 학생 형제자매님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이 시기에 자신의 감당 못할 죄와 심각한 허물을 발견하고, 죄인의 자리에 서십시오. 그것도 지독한 죄인, 절망적인 죄인이 되십시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다’, ‘나는 모든 사람들 보다 지극히 작은 자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다’는 고백이 흘러나온다면 여러분은 소망이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분을 주님이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깊이 간직하십시오. 그것이 평생 여러분들을 위험과 위기로부터 지켜 줄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아름답고 값진 사람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점점 나이 먹어 가는 목자님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가 나의 원죄입니다. 물론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그 죄는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그 죄는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람들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내가 그 죄로부터 구원 받은 사실 까지 잊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 먹어갈수록,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져 갈수록, 가진 것이 많아져 갈수록, 이룬 일이 쌓여 갈수록 우리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더 분명해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입니다.’ ‘나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처럼 더럽고 음란하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교회를 박해할만한 열정도 없었습니다. ‘너나 잘해라’는 말 한마디면 찌그러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대해 열심을 갖고, 외적으로는 계명과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교회를 핍박하는 정도의 사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주변 언저리라도 갈 정도라면 좋겠습니다. 저의 수준은 너무 떨어집니다. 바울 사도가 어머니 뱃속에서 만삭되지 못하여 났다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시험관에서 만삭되지 못하여 났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가장 작은 자라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작은 자를 섬기는 무수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과 우리와의 객관적인 비교가 그러합니다.
그러면 오늘 내가 나 된 것은 분명해집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이 되었다면, 시험관에서 만삭되지 못하여 난 내가, 무수리에 불과한 내가 오늘 이런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 은혜로 잊지 않고 살 뿐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감사함으로 감당할 뿐입니다. 특별히 인간적으로 높아질수록 더욱 우리는 낮아집시다. 나이 먹어갈수록 더욱 어린 자리로 갑시다. 그래서 항상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드러냅시다. 나는 밑으로 내려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높아져 가는 사람, 그런 삶이 됩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우리 주님이 바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성탄 전야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이 종이 되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세상에!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그것이 이해가 되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존경합니다. 언제 예수님이 자신을 존경하라고 하셨습니까? 보기에 좋은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까? 보기에 좋은 모습이 있으셨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 성화를 다 태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영화 주인공을 다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너무 멋있어요. 그것 때문에 사랑하고 좋아하면 안 됩니다. 제일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우면 맞을 것입니다. 왜냐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보잘 것 없어 보이셨겠습니까? 그러나 그래서 그분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귀한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내게 임한 구원을 기억함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평생 기억합시다. 외적으로 쌓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잃어버리지 맙시다.
둘째,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바울 사도의 두 번째 간증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되었다’입니다. 즉, 그의 삶에 대한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자격 없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셨고, 그에게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후에 어떻게 사느냐’도 또한 중요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되느냐, 헛되게 되느냐’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헛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많이 수고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무엇을 위해 수고했습니까? 복음을 지키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거짓 사상, 즉 율법주의, 이원주의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지키기 위해 바울이 겪은 수고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큽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 밖에서 공격하는 사람과 교회 안에서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밖에서 공격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로 무장한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공격하는 사람들은 이원주의로 무장한 쾌락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회 밖에서 공격하는 자들은 돌로 때리고, 고소해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공격하는 자들은 말로 인신공격하고, 바울의 외모, 말, 권위를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가운데 복음을 지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했습니다. 1세기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빈 발자취는 놀랍기만 합니다.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은 공식 기록이고, 4차 전도여행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겪은 수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바울의 외적 수고도 크겠지만, ‘양들로 인해 마음의 부담감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말할까’, 그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우리는 몇 명의 양을 놓고도 염려하고, 애타합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그 많은 양들로 인해 얼마나 애가 탔을까 생각할 때, 바울의 수고가 저며 옵니다.
이처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좋은 것일수록 지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왜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노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예전에 동물의 왕국을 본적이 있는데, 배고픈 표범이 어린 톰슨가젤을 사냥했습니다. 표범은 먹잇감을 물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하는데, 배고픈 사자들이 이를 보고 쫓아왔습니다. 사자들이 으르렁대자 표범은 할 수 없이 먹잇감을 내놓고 도망쳤습니다. 먹잇감을 빼앗은 사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잠시, 하이에나 떼가 몰려와 주위를 돌며 컹컹거렸습니다. 사자들은 편하게 먹지 못했습니다. 좀 먹으려고 하면 뒤에서 하이에나가 달려들었습니다. 사자들은 포기하고 먹잇감을 놓고 가버렸습니다. 결국 하이에나 떼가 달려들어 먹잇감을 해치워버렸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귀하고, 너무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 추위에도 연평도를 지키기 위해 밤을 새는 병사들처럼 나도 이 은혜를 지키기 위해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은혜로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면, 더 이상 죄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죄로 달려가는 것은 수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에서 들어오는 생각대로 하면 됩니다. 본성대로 하면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저는 자기부인하면서 밤새도록 게임을 했다는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시험 끝나고 누워 TV를 보느라 수고했다는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게임, TV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본성대로 내버려 하면 결과는 자명합니다. 그러나 일어나 TV를 끄고 말씀을 보는 것은 뼈를 깎는 수고를 해야만 가능합니다. 쉽게 죄와 타협하고, 은혜를 죄의 구실로 삼으면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 받았는데, 그것을 이기적인 욕망과 육체의 쾌락을 쫓는데 사용하면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이상하게 죄가 싫어집니다. 죄가 있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견딜 수 없어집니다. 왜냐면 성결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성결은 너무도 깨끗하고 흠이 없습니다. 그 성결에는 작은 누룩도 금방 표시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선 사람은 죄로부터 성결을 지키기 위해 죄와 싸웁니다.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죄와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죄에 약하면 말씀을 붙들고 또 기도합니다. 이것이 수고스럽지만,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너무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음의 가치관이 바뀝니다. 그래서 마음 중심에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구합니다. 그럴 때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하면 손해 보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부인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수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주신 은혜는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럴 때면 그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주와 복음도 욕을 얻어먹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수고이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값진 것이 됩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울 때, 수고스럽지만 은혜가 더욱 빛이 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수고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수고가 많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것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합니다. 수고가 많은 사람이 더 은혜를 값지게 하는 것입니다. 수고가 많은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수고를 많이 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그가 받은 은혜가 더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더 많이 수고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값지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더 많이 수고한다고 손해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덜 수고하는 다른 사도들을 판단하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내가 수고한 것은 내 상입니다. 내가 더 은혜를 값지게 했으니, 내가 받은 은혜가 더 빛날 뿐입니다. 받은 은혜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종로센터에 최선남 목자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특별히 그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얼마 전 학생 예배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으로, 이분은 87년도에 선교후보로 와서 동교센터에서 선교후보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한국 사람이 비자를 받기 어려워 미싱공 기술자로 비자를 얻고자 재봉틀을 열심히 돌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제도가 없어지면서 종로2부로 왔습니다. 이분은 조용한 분입니다. 이후 계속 함께 역사를 섬겼는데, 신기하게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순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작이 빠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양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항상 역사 속에 있었는데,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항상 묵묵히 있었기 때문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장막의 냄비가 다 찌그러져 성한 것이 없었다는 말을 어깨 너머로 들었습니다. 찬송가에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는 노래는 은혜롭게 부르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섬기는 일에 이분이 항상 들어가 있었습니다. 새벽에 강사 식사 서빙을 내 놓으면서 특유의 점잖은 음성으로 ‘식사하세유~’라고 했던 그 말은 아직도 제 귓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번 학생 예배에도 와서 국을 열심히 퍼주었습니다. 이분 동역자도 비슷합니다. 졸업 후 직장을 다니다가 꽤 긴 기간 동안 실직해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그는 돌파구로 땅을 뚫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땅 오염도를 측정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15년 가까이 경력이 붙어서 안정이 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저는 이 두 분을 생각하면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가 생각이 납니다.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는 제사장 집안이었지만 아이가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아이가 없다는 것은 수치입니다. 오해를 많이 받을만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흠없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 수고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고, 그러나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사람의 마지막에 세례 요한을 주시지 않습니까?
이분들이 그런 부부입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선남 사모님은 저를 보며 특유의 느린 말로 ‘오셨어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양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학생들에게 국을 퍼주는 그분을 보면서 저는 그분이 몹시 귀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일까요? 이분들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런 분들과 동역했다는 것이 감사하고, 이런 분들이 저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주위에서 믿음으로 사는 분들을 통해 보고 확신하는 바가 있습니다. 수고가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수고가 많을수록 더 아름답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매를 맞을 때 안쓰럽습니다.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조롱 받을 때, 시험에 들 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오해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지키기 위해 그 모든 수고를 다 감당했을 때,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름답게 빛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들은 중도에 어떻게 보인다 할지라도 분명 그렇게 될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수고할수록 더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분들이시여!
올 한 해 동안 내게 주신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 수고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죄와 싸우기 위해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자기 부인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한 해 동안 소감 쓰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토요일마다 목자 공부 모임 나오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하디모데 목자님은 토요일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모임을 하기 위해 옵니다. 한주도 거르지 않고, 소감을 써서 옵니다. 많은 주 동안 디모데 목자님 혼자 소감 발표를 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받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양을 감당하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눈물 겹도록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혹 다른 사람 보다 더 수고하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플 때가 있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편하고 쉽게 살지 못해 힘든 생각이 들 때도 있으셨습니까? 내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할 때도 있으셨습니까? 수고를 알아주기는커녕 오해 받는 것 같아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겪지는 않으셨습니까? 수고를 했는데 아무런 보상, 결과가 없는 것 같아 답답하고 괴롭지는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내 청춘 시드는 것 같아 눈물이 나지는 않으셨습니까? 바울 사도가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다른 말로 쉽게 표현하면, ‘내가 더 많이 수고함으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수고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하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수고로 인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 아름다워집니다. 값진 것이 됩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저는 우리 모임에 목자님들은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목자님의 그 모든 수고가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위로 삼아 더 수고하십시오. 2011년에 더 수고하고자 방향을 잡으십시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수고하지 않고자 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수고하고자 방향 잡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시대 조류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힘듭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내년에는 더 거룩해집시다. 더 성결해집시다. 더 섬깁시다. 더 복음을 전합시다. 학생도 좋고, 주위 동료도 좋고, 아줌마도 좋고, 아저씨도 좋고, 후배도 좋고, 선배도 좋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의 노동을 감당합시다. 그 모든 수고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리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은 더욱 값지고 해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삶이 되어갈 것입니다.
셋째,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 사도의 세 번째 간증은 더 많이 수고해서 많은 결과가 있었는데, 그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결과에 대한 간증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자랑할 것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럴 때 어떻게 하기 쉽습니까? ‘내가 기도했더니 이렇게 되었다. 내가 단상을 눈물로 적셨더니 이렇게 되었다. 내가 말씀을 잘 전했더니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이는 매우 영적인 말 같지만 또 한발만 잘못 디디면 위험할 소지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얼마나 쉽고, 간단하고, 은혜롭습니까? 사람이 별 볼일 없어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사람이 진정으로 멋진 사람입니다. 저는 이것이 좋은 분별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렇게 되었다. 내가 좀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되었다. 내가 좀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 내가 좀 고생했더니 이렇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내가, 내가...’ 나를 앞세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다가 마지막이 수렁으로 빠지면 더욱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열심히 수고하면 남는 것이 있습니다. 때로 헛수고를 하는 것 같지만 헛수고는 없습니다. 수고한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최선남 사모님도 상명대에서 시니어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수고를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이기는 씨름을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면 더욱더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워 보십시오. 쉽게 이깁니까? 번번이 넘어집니다. 죄와 싸우는 사람은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조금씩 점점 더 죄를 이겨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내면의 속성이 변화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십시오. 못한다는 것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해야 하는데, 내가 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많은 전도의 열매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서신서 곳곳을 보면, 떠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또 바울이 옥에 갇히자 ‘이때다’하면서 순수하게 못하게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바울이 자기가, 자기 힘으로, 자기 의지로 다 감당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미쳐 죽었을 것입니다. ‘내가 결혼도 포기하고 복음을 전했는데, 이게 뭔가?’ 그렇지만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했기 때문에 어떤 가운데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다툼으로 하든, 경쟁으로 하든, 시기로 하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니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체험적으로 깊이 압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복음 전도이며, 거룩한 삶이며, 믿음의 삶입니다. 바울이 죄와 싸우다가 고백하지 않습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의 속사람은 하나님을 법을 즐거워하는데 내 몸 속에서 또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끌고 다니는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기에 했어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합니다. 잘되었어도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잘합니다. 내가 이겼어도 하나님이 이기게 하셔서 이깁니다. 못했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져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다시 도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자가 되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런 수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수고를 통해 무엇인가를 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게 합니다. 내가 하지 못할 것도 하게 하시고, 내가 실패한 것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않게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잘되었다면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 됩니다. 잘되지 못했다면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면 됩니다.
오늘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 때, 그 은혜가 헛되지 않게 살게 됩니다. 내가 한 것이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되며, 더욱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잊으면 그 은혜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은혜로 되었음을 잊으면 한 일이 썩고 부패해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신앙 고백은 삶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모든 신앙인들의 고백이어야 하며,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나 되었습니다. 오직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한 모든 것이 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입니다.
2011년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1797ca83fbe5c5369b35365ca6da1e48.hwp (0byte)
44회 다운로드 | DATE : 2010-12-27 17:15: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