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15강(7:18-50) 죄 사함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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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15강
본문 누가복음 7:18 - 50
요절 누가복음 7:47
죄 사함과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오늘 말씀에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머리털로 씻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마음과 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나이에 자신의 생명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 많이 사랑하고 죄 사함을 적게 받은 사람이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많이 받는 것보다 죄 사함을 많이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죄 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겸손합니다.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이 분수를 지킵니다. 우리가 자기 발견을 깊이 하고 주님을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회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 중 둘을 불러 주님께 보내어 질문을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 왕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시면 쭉정이는 불에 태우고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드릴 줄 믿었습니다. 자신은 공의를 외치다가 이제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신을 구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심판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의심이 생길 때 혼자서 고민하지 않고 주님께 들고 나갔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에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된 대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보면서도 종말론적으로 메시아의 사역을 이해했기에 예수님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감옥에 갇혀서 힘들고 장래가 불투명하자 실족하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을 때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서 회의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속적인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실망하고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힘들 때 우리는 말씀 묵상을 깊이 하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메시야의 선구자입니다. 28절을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까지 베풀었고 백성들에게 그가 어떤 분인지 소개했다는 점 등을 생각할 때 구약 시대의 다른 선지자들이 가지기 못했던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는 큰 일을 했지만 매우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천국 비유(마 13장) 등을 비추어 볼 때 신약 교회를 가리킵니다. 신약 교회의 한 지극히 작은 성도가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그리고 세례 요한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밝히 듣고 배우고 믿고 확신합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했지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30). 그들은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은 영적 무관심과 세속화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비유하기를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놀이를 하는데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또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자 귀신이 들렸다고 하더니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비난했습니다. 이렇게 비판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어렵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성령께서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겸손한 사람들 속에서 성령은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그들은 배우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혜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어리석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들과 가르침을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옳다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지혜를 예수님으로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둘째,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었습니다. 뜨거운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향유는 한 방물만 떨어뜨려도 되는데 여인은 옥합에서 향유를 다 예수님의 발에 부어버렸습니다. 여인의 진심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꼬린내가 진동하던 방에 여인이 부은 향유로 인해서 방 안은 향기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극적인 장면입니다. 우리가 따듯한 물로 동역자의 발만 씻어 주어도 큰 감동이 될텐데 이렇게 한다면 뿅 갈 것 입니다. 이런 사랑은 아무에게나 할 수 없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그녀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 영광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다는 행위는 그를 얼마나 높이는 것입니까? 여인은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표시였을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행동이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의 죄를 철저히 뉘우치고 구주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고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런 특이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여인들의 마음에서 드리는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분들의 마음을 볼 때 고귀함을 느낍니다. 여인들이 이 척박한 세상에서 진심을 드리는 모습을 볼 때 살맛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매님들이 드리는 진심을 통해서 많은 형제님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된 형제들은 아내된 자매들의 사랑을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사랑의 마음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여인의 행동을 보고 마음에 판단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예수님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한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즉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그리고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 죄의 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으며,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습니다. 무지해서, 부주의해서, 연약해서, 실수로 짓는 죄가 있고, 고의적으로, 뻔뻔스럽게 짓는 죄가 있습니다. 비유 중의 사람들이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비유 중의 사람들이 다 빚을 탕감 받은 것처럼, 우리는 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빚의 정도에 따라 탕감의 정도도 다르듯이, 우리의 죄의 크기와 정도에 따라 우리의 받은 용서의 크기와 정도도 다릅니다. 또 우리의 용서의 크기와 정도가 다름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기와 정도도 달라질 것입니다.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그 빚을 탕감해준 사람을 더 크게 사랑하듯이, 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더 크게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인간 편에서의 느낌의 차이이고 모든 죄가 본질상 지옥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일진대 우리의 죄 용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의 긍휼의 용서가 없었다면 영원히 지옥의 불못에 던지워 고통을 당해야 마땅했던 우리를, 그가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커야 하겠습니까?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그 여자가 주님을 향해 지극한 사랑과 존경을 보인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표시였습니다. 죄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죄사함의 크기와 정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의 크기와 정도에 비례할 것입니다. 로마서 6:1,2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단지 우리의 죄악의 실체, 죄악의 심각한 실체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고 했습니다(요일 3:15). 또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곧 간음이라고 했습니다(마 5:28). 탐심이나 불순종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골 3:5; 삼상 15:23). 탐심은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요, 불순종은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또한 우리는 죄의 형벌이 죽음이요 모든 죄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죄사함의 깊이와 크기를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죄사함 받은 감격을 깊이 누릴 수 있을까요? 말씀 앞에 회개하는 생활을 힘써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감격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
자기성찰이 깊어져야 한다. 우리가 소감을 깊이 써야 합니다. 한 말씀이 마음에 부딪쳐오기까지 써야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엘 까미노 센터는 형제들이 6-7페이지 소감을 쓴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발표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거기서 은혜와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죄는 사람을 고생과 불행, 죽음과 영원한 멸망으로 이끕니다. 또한 죄인의 연약한 심리도 있습니다. 죄인이 가지는 죄에 대한 가책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고 수치심, 책임 전가, 기쁨도 평안도 용기도 힘도 가지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죄의 선포가 필요합니다. 사죄의 선포는 죄인에게 큰 복입니다. 사죄의 확신은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과 성화의 기초와 원동력입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양심이 자유함을 얻고 자신감을 갖습니다. 살맛이 나게 합니다. 생명력을 얻게 합니다. 불의감이 사라지면 마음이 가볍고 시원합니다. 비전도 보입니다. 죄 사함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사죄로 여인은 의롭게 되었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구주 예수님 앞에 나아와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그토록 흘리게 만들었고 자신을 그토록 낮추도록 하였고 하나님과 구주를 지극히 높이며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죄 사함을 받도록 도우셨습니다. 여인에게는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받은 바 죄 사함의 은혜를 나누는 소감을 발표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과 주 한 편의 소감을 깊이 쓰고 나누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죄인들이 용서받은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7:18 - 50
요절 누가복음 7:47
죄 사함과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오늘 말씀에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머리털로 씻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마음과 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나이에 자신의 생명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 많이 사랑하고 죄 사함을 적게 받은 사람이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많이 받는 것보다 죄 사함을 많이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죄 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겸손합니다. 자기를 잘 아는 사람이 분수를 지킵니다. 우리가 자기 발견을 깊이 하고 주님을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회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 중 둘을 불러 주님께 보내어 질문을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 왕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시면 쭉정이는 불에 태우고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드릴 줄 믿었습니다. 자신은 공의를 외치다가 이제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신을 구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심판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의심이 생길 때 혼자서 고민하지 않고 주님께 들고 나갔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에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된 대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보면서도 종말론적으로 메시아의 사역을 이해했기에 예수님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감옥에 갇혀서 힘들고 장래가 불투명하자 실족하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을 때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서 회의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속적인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실망하고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힘들 때 우리는 말씀 묵상을 깊이 하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메시야의 선구자입니다. 28절을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까지 베풀었고 백성들에게 그가 어떤 분인지 소개했다는 점 등을 생각할 때 구약 시대의 다른 선지자들이 가지기 못했던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는 큰 일을 했지만 매우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천국 비유(마 13장) 등을 비추어 볼 때 신약 교회를 가리킵니다. 신약 교회의 한 지극히 작은 성도가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그리고 세례 요한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밝히 듣고 배우고 믿고 확신합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했지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30). 그들은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은 영적 무관심과 세속화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비유하기를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놀이를 하는데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또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자 귀신이 들렸다고 하더니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비난했습니다. 이렇게 비판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어렵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성령께서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겸손한 사람들 속에서 성령은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그들은 배우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혜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어리석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들과 가르침을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옳다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지혜를 예수님으로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둘째,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었습니다. 뜨거운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향유는 한 방물만 떨어뜨려도 되는데 여인은 옥합에서 향유를 다 예수님의 발에 부어버렸습니다. 여인의 진심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꼬린내가 진동하던 방에 여인이 부은 향유로 인해서 방 안은 향기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극적인 장면입니다. 우리가 따듯한 물로 동역자의 발만 씻어 주어도 큰 감동이 될텐데 이렇게 한다면 뿅 갈 것 입니다. 이런 사랑은 아무에게나 할 수 없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그녀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 영광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다는 행위는 그를 얼마나 높이는 것입니까? 여인은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표시였을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행동이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의 죄를 철저히 뉘우치고 구주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고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런 특이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여인들의 마음에서 드리는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분들의 마음을 볼 때 고귀함을 느낍니다. 여인들이 이 척박한 세상에서 진심을 드리는 모습을 볼 때 살맛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매님들이 드리는 진심을 통해서 많은 형제님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된 형제들은 아내된 자매들의 사랑을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사랑의 마음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여인의 행동을 보고 마음에 판단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예수님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한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즉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그리고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 죄의 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으며,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습니다. 무지해서, 부주의해서, 연약해서, 실수로 짓는 죄가 있고, 고의적으로, 뻔뻔스럽게 짓는 죄가 있습니다. 비유 중의 사람들이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비유 중의 사람들이 다 빚을 탕감 받은 것처럼, 우리는 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빚의 정도에 따라 탕감의 정도도 다르듯이, 우리의 죄의 크기와 정도에 따라 우리의 받은 용서의 크기와 정도도 다릅니다. 또 우리의 용서의 크기와 정도가 다름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기와 정도도 달라질 것입니다.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그 빚을 탕감해준 사람을 더 크게 사랑하듯이, 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더 크게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인간 편에서의 느낌의 차이이고 모든 죄가 본질상 지옥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일진대 우리의 죄 용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의 긍휼의 용서가 없었다면 영원히 지옥의 불못에 던지워 고통을 당해야 마땅했던 우리를, 그가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커야 하겠습니까?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그 여자가 주님을 향해 지극한 사랑과 존경을 보인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표시였습니다. 죄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죄사함의 크기와 정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의 크기와 정도에 비례할 것입니다. 로마서 6:1,2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단지 우리의 죄악의 실체, 죄악의 심각한 실체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고 했습니다(요일 3:15). 또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곧 간음이라고 했습니다(마 5:28). 탐심이나 불순종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골 3:5; 삼상 15:23). 탐심은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요, 불순종은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또한 우리는 죄의 형벌이 죽음이요 모든 죄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죄사함의 깊이와 크기를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죄사함 받은 감격을 깊이 누릴 수 있을까요? 말씀 앞에 회개하는 생활을 힘써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감격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
자기성찰이 깊어져야 한다. 우리가 소감을 깊이 써야 합니다. 한 말씀이 마음에 부딪쳐오기까지 써야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엘 까미노 센터는 형제들이 6-7페이지 소감을 쓴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발표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거기서 은혜와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죄는 사람을 고생과 불행, 죽음과 영원한 멸망으로 이끕니다. 또한 죄인의 연약한 심리도 있습니다. 죄인이 가지는 죄에 대한 가책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고 수치심, 책임 전가, 기쁨도 평안도 용기도 힘도 가지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죄의 선포가 필요합니다. 사죄의 선포는 죄인에게 큰 복입니다. 사죄의 확신은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과 성화의 기초와 원동력입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양심이 자유함을 얻고 자신감을 갖습니다. 살맛이 나게 합니다. 생명력을 얻게 합니다. 불의감이 사라지면 마음이 가볍고 시원합니다. 비전도 보입니다. 죄 사함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사죄로 여인은 의롭게 되었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구주 예수님 앞에 나아와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그토록 흘리게 만들었고 자신을 그토록 낮추도록 하였고 하나님과 구주를 지극히 높이며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죄 사함을 받도록 도우셨습니다. 여인에게는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받은 바 죄 사함의 은혜를 나누는 소감을 발표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과 주 한 편의 소감을 깊이 쓰고 나누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죄인들이 용서받은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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