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13강(6:36-49) 듣고 행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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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13강
본문 누가복음 6:36 - 49
요절 누가복음 6:47
듣고 행하는 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한 시냇가에 청개구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청개구리는 어머니가 내일이 시험이니 공부 좀 하라고 하면 게임을 더 열심히 하였습니다. 밖에 나가서 운동 좀 하라고 하면 집 안에서 잠만 잤습니다. 학교에 갔다 와서 샤워를 하고 쉬라고 하면 씻지도 않았습니다. 속이 상한 어머니 청개구리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결국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언을 했습니다. 자식이 모든 것을 반대로 하니 반대로 유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거든 무덤을 시내가 한 가운데에 만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육지에 무덤을 만들기를 바란 것입니다. 청개구리는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니 순종해야겠다 다짐하고 냇물 한 가운데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우화는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인데 순종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순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자비로우십니다. 자비롭다는 말은 동정심이 많고 자애롭다,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와 악한 자에게도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태평양과 같이 넓고 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이런 원수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하사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다 품으십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이와 같이 자비로우시니 그의 자녀 된 우리도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비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첫째는,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판은 법률적인 용어로서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서 심판까지 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엄격한 경향이 있습니다. 비판하는 대상은 대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예리하게 비판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매일 문제를 보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나 아래 사람들은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생각합니다. 비판을 받아서 힘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판을 받을수록 더욱 더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판한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고쳐지든가요? 더 반발심만 키울 뿐입니다. 비판할 시간에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기도하고 나서 나 중심의 대화법을 사용해서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잘못된 것을 보았을 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랬지”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행동을 변화시키는데 더 효과적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의 따뜻한 이해와 격려의 말은 그를 성공으로 이끕니다. 아내에게 남편의 위로하는 말도 큰 힘이 됩니다. 더 나아가 비판보다 잘 하는 점을 찾아서 칭찬하는 것이 좋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합니다. 칭찬을 통해서 장점이 살아나도록 하면 단점이 덮어집니다.
둘째는, 자비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정죄하는 대신에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의 문제가 내 속에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저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볼 때 어쩌면 나와 저렇게 똑같을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사실 죄인들끼리 용서하고 용서 받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다 하나님을 향해서 용서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용서의 위력은 무엇입니까? 비판은 사람을 죽이지만 용서는 사람을 살립니다. 비판을 하면 사람을 잃게 되지만 용서는 사람을 얻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한 절로도 큰 은혜를 줍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만 있으면 줄 수 있습니다. 주는 것도 믿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앞의 주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면 그 의미는 더 풍성해집니다. 즉 주라는 것을 용서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용서는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용서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용서해 주면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용서하면 당하고만 사는 것 같아서 억울합니다. 원수를 갚으면 시원하지만 또 복수를 받게 되고 복수를 받을까 불안해집니다. 복수를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원수의 악한 성품이 나에게 그대로 각인되기 쉽습니다. 그러니 용서함으로 복수의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우리가 크게 용서하면 크게 용서를 받을 것이요 작게 용서하면 작게 용서를 받습니다. 지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원수를 용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에 서운 것이 있습니까? 용서하고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아시고 더 큰 사랑으로 갚아주십니다.
셋째는,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 눈의 들보를 빼고 남의 눈에서 티를 빼어 줍니다. 39, 40절을 보십시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길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안내자가 되면 그를 따르는 사람도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영적인 통찰력이 없는 사람이 무지한 사람들을 인도하면 둘 다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된 자는 잘 훈련된 사람,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까?
41,42a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했고 ‘들보(혹은 통나무, beam, log)’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잘 보입니다. 들보는 대충 보아도 다 보이지만 티는 자세히 보아야 보입니다. 나의 들보는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있습니다. 나만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문제는 티와 같이 매우 작아서 자세히 보아야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제거한 후에야 남의 작은 부족을 지적해줄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42b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먼저 내 눈 속의 들보를 빼어야 합니다. 그 후에야 남의 문제를 밝히 볼 수 있습니다. 밝히 본다는 뜻은 간파한다. 꿰뚫어 본다는 뜻입니다. 즉 본질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가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본 다음에 형제를 도우면 둘 다 살게 됩니다. 눈을 치료하는 것은 매우 섬세하고 어려운 기술입니다. 그 만큼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하고 회개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형제의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잠언에 가르친 대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큰 부족과 결함을 제거한 경우에 사랑으로 형제를 책망하고 권면하면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성경 선생인 사람은 말씀을 공부하고 회개하는 소감을 깊이 쓰면서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공략하여 부순 다음에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내면 투쟁을 깊이 하여 자기 문제를 극복해 본 사람이 해결되지 않는 내면 문제로 고통 하는 사람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훈수를 두는 사람은 잘 봅니다. 왜 그럴까요? 한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문제가 잘 보입니다. 지혜는 마음을 비우는 데서부터 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사람은 내 문제를 다 보고 있는데 나만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있는 동역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지도하는 목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자기 문제 해결하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누가 나의 문제에 깊이 관심을 두고 도와주겠습니까? 나의 문제를 지적해 주는 사람이 고맙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의 문제를 성찰하고 남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자 할 때 문제 해결이 단 시간 내에 되지 않습니다.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속에 뿌리박힌 문제를 해결하여 선한 열매를 맺는 것도 시간이 걸립니다. 43-45절을 보십시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이 나오기 때문에 마음을 잘 가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책을 읽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선한 봉사를 땀을 흘리며 할 때 우리의 삶에 선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주여, 주여 말한다는 것은 주님이 주인이고 자신은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종이 있다면 악한 종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주인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손해가 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손해가 나면 주인이 손해가 나는 것이지 자기가 손해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면 됩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힘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힘이 없는 것도 죄입니다. 죄는 우리를 연약하게 만듭니다. 물론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참아주십니다. 또 훈련해 주십니다. 내 수준에 맞게 훈련해 주십니다. 주님은 아주 인격적이십니다. 사랑이 많으십니다. 내 생각이 너무 강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너무 강하면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의 수준은 너무 높고 거룩한데 자신은 추하고 수준이 낮다고 생각해서 순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 인격적인 관계가 맺혀집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내 것이 됩니다. 순종은 널려 있는 복을 내 것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누구와 같습니까? 47,48절을 보십시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집을 지을 때 기초를 깊이 파고 반석이 나오면 그 위에 기초를 놓습니다. 이 집을 지을 때 보니 땅을 깊이 파고 자갈과 철근과 콘크리트를 1미터 이상 깔고 굳어지고 나서 그 위에 4층을 올렸습니다. 이 집은 홍수가 나도 끄떡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큰 물은 이 땅에서의 시련이나 사회적 환난과 재난을 상징합니다. 또 마지막 날에 임할 심판을 의미합니다. 평소에 말씀을 실천하며 생활했던 사람은 환난 날에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환난과 어려움이 그의 진가를 드러냅니다. 일본에서 쓰나미 때에 어떤 집은 쓰나미 속에서도 휩쓸려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 집을 지은 장인의 실력이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무와 나무의 연결 부위를 창의적으로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쓰나미 이후에 실력을 인정받아서 더 큰 복을 받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튼튼한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과 같습니다.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청개구리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홍수가 날 때 그가 만든 인생 집이 무너져 심한 손실을 보게 됩니다(49). 야고보서 2:17절의 말씀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참된 믿음은 선한 행위를 수반합니다. 선한 행위란 진실하고 의로운 행위, 경건한 행위 곧 회개에 합당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실천이 따릅니다.
우리가 지식의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님들이 세계 92개국에 나가서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로 삼는데 선교사님들이 지식이 많아서 똑똑한 현지인들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선교사님들이 인품이 훌륭해서 배우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도움을 받고자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 선교사님들에게 와서 배우는 것은 선교사님들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사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이 알기는 하지만 실천이 부족한데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님들이 말씀대로 사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제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형제를 용서하며, 선한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아들들, 딸들이 되는 것입니다.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다운, 하나님의 딸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열매가 무르익듯이 인격의 열매가 익어갑니다. 사랑, 희락,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들이 우리의 인격 속에 많이 맺히기를 기도합니다. 용서의 열매를 맺어서 사람을 얻고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6:36 - 49
요절 누가복음 6:47
듣고 행하는 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한 시냇가에 청개구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청개구리는 어머니가 내일이 시험이니 공부 좀 하라고 하면 게임을 더 열심히 하였습니다. 밖에 나가서 운동 좀 하라고 하면 집 안에서 잠만 잤습니다. 학교에 갔다 와서 샤워를 하고 쉬라고 하면 씻지도 않았습니다. 속이 상한 어머니 청개구리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결국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언을 했습니다. 자식이 모든 것을 반대로 하니 반대로 유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거든 무덤을 시내가 한 가운데에 만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육지에 무덤을 만들기를 바란 것입니다. 청개구리는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니 순종해야겠다 다짐하고 냇물 한 가운데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우화는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인데 순종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순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자비로우십니다. 자비롭다는 말은 동정심이 많고 자애롭다,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와 악한 자에게도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태평양과 같이 넓고 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이런 원수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하사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다 품으십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이와 같이 자비로우시니 그의 자녀 된 우리도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비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첫째는,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판은 법률적인 용어로서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서 심판까지 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엄격한 경향이 있습니다. 비판하는 대상은 대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예리하게 비판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매일 문제를 보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나 아래 사람들은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러려니 생각합니다. 비판을 받아서 힘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판을 받을수록 더욱 더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판한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고쳐지든가요? 더 반발심만 키울 뿐입니다. 비판할 시간에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기도하고 나서 나 중심의 대화법을 사용해서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잘못된 것을 보았을 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랬지”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행동을 변화시키는데 더 효과적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의 따뜻한 이해와 격려의 말은 그를 성공으로 이끕니다. 아내에게 남편의 위로하는 말도 큰 힘이 됩니다. 더 나아가 비판보다 잘 하는 점을 찾아서 칭찬하는 것이 좋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합니다. 칭찬을 통해서 장점이 살아나도록 하면 단점이 덮어집니다.
둘째는, 자비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정죄하는 대신에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의 문제가 내 속에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저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볼 때 어쩌면 나와 저렇게 똑같을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사실 죄인들끼리 용서하고 용서 받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다 하나님을 향해서 용서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용서의 위력은 무엇입니까? 비판은 사람을 죽이지만 용서는 사람을 살립니다. 비판을 하면 사람을 잃게 되지만 용서는 사람을 얻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한 절로도 큰 은혜를 줍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만 있으면 줄 수 있습니다. 주는 것도 믿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앞의 주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면 그 의미는 더 풍성해집니다. 즉 주라는 것을 용서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용서는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용서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용서해 주면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용서하면 당하고만 사는 것 같아서 억울합니다. 원수를 갚으면 시원하지만 또 복수를 받게 되고 복수를 받을까 불안해집니다. 복수를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원수의 악한 성품이 나에게 그대로 각인되기 쉽습니다. 그러니 용서함으로 복수의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우리가 크게 용서하면 크게 용서를 받을 것이요 작게 용서하면 작게 용서를 받습니다. 지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원수를 용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에 서운 것이 있습니까? 용서하고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아시고 더 큰 사랑으로 갚아주십니다.
셋째는,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 눈의 들보를 빼고 남의 눈에서 티를 빼어 줍니다. 39, 40절을 보십시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길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안내자가 되면 그를 따르는 사람도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영적인 통찰력이 없는 사람이 무지한 사람들을 인도하면 둘 다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된 자는 잘 훈련된 사람,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까?
41,42a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했고 ‘들보(혹은 통나무, beam, log)’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잘 보입니다. 들보는 대충 보아도 다 보이지만 티는 자세히 보아야 보입니다. 나의 들보는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있습니다. 나만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문제는 티와 같이 매우 작아서 자세히 보아야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제거한 후에야 남의 작은 부족을 지적해줄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42b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먼저 내 눈 속의 들보를 빼어야 합니다. 그 후에야 남의 문제를 밝히 볼 수 있습니다. 밝히 본다는 뜻은 간파한다. 꿰뚫어 본다는 뜻입니다. 즉 본질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가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본 다음에 형제를 도우면 둘 다 살게 됩니다. 눈을 치료하는 것은 매우 섬세하고 어려운 기술입니다. 그 만큼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하고 회개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형제의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잠언에 가르친 대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큰 부족과 결함을 제거한 경우에 사랑으로 형제를 책망하고 권면하면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성경 선생인 사람은 말씀을 공부하고 회개하는 소감을 깊이 쓰면서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공략하여 부순 다음에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내면 투쟁을 깊이 하여 자기 문제를 극복해 본 사람이 해결되지 않는 내면 문제로 고통 하는 사람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훈수를 두는 사람은 잘 봅니다. 왜 그럴까요? 한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문제가 잘 보입니다. 지혜는 마음을 비우는 데서부터 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사람은 내 문제를 다 보고 있는데 나만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있는 동역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지도하는 목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자기 문제 해결하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누가 나의 문제에 깊이 관심을 두고 도와주겠습니까? 나의 문제를 지적해 주는 사람이 고맙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의 문제를 성찰하고 남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자 할 때 문제 해결이 단 시간 내에 되지 않습니다.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속에 뿌리박힌 문제를 해결하여 선한 열매를 맺는 것도 시간이 걸립니다. 43-45절을 보십시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이 나오기 때문에 마음을 잘 가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책을 읽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선한 봉사를 땀을 흘리며 할 때 우리의 삶에 선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주여, 주여 말한다는 것은 주님이 주인이고 자신은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종이 있다면 악한 종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주인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손해가 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손해가 나면 주인이 손해가 나는 것이지 자기가 손해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면 됩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힘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힘이 없는 것도 죄입니다. 죄는 우리를 연약하게 만듭니다. 물론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참아주십니다. 또 훈련해 주십니다. 내 수준에 맞게 훈련해 주십니다. 주님은 아주 인격적이십니다. 사랑이 많으십니다. 내 생각이 너무 강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너무 강하면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의 수준은 너무 높고 거룩한데 자신은 추하고 수준이 낮다고 생각해서 순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순종할 때 인격적인 관계가 맺혀집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내 것이 됩니다. 순종은 널려 있는 복을 내 것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누구와 같습니까? 47,48절을 보십시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집을 지을 때 기초를 깊이 파고 반석이 나오면 그 위에 기초를 놓습니다. 이 집을 지을 때 보니 땅을 깊이 파고 자갈과 철근과 콘크리트를 1미터 이상 깔고 굳어지고 나서 그 위에 4층을 올렸습니다. 이 집은 홍수가 나도 끄떡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큰 물은 이 땅에서의 시련이나 사회적 환난과 재난을 상징합니다. 또 마지막 날에 임할 심판을 의미합니다. 평소에 말씀을 실천하며 생활했던 사람은 환난 날에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환난과 어려움이 그의 진가를 드러냅니다. 일본에서 쓰나미 때에 어떤 집은 쓰나미 속에서도 휩쓸려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 집을 지은 장인의 실력이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무와 나무의 연결 부위를 창의적으로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쓰나미 이후에 실력을 인정받아서 더 큰 복을 받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튼튼한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과 같습니다.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청개구리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홍수가 날 때 그가 만든 인생 집이 무너져 심한 손실을 보게 됩니다(49). 야고보서 2:17절의 말씀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참된 믿음은 선한 행위를 수반합니다. 선한 행위란 진실하고 의로운 행위, 경건한 행위 곧 회개에 합당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실천이 따릅니다.
우리가 지식의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님들이 세계 92개국에 나가서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로 삼는데 선교사님들이 지식이 많아서 똑똑한 현지인들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선교사님들이 인품이 훌륭해서 배우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도움을 받고자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 선교사님들에게 와서 배우는 것은 선교사님들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사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이 알기는 하지만 실천이 부족한데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님들이 말씀대로 사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제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형제를 용서하며, 선한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아들들, 딸들이 되는 것입니다.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다운, 하나님의 딸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열매가 무르익듯이 인격의 열매가 익어갑니다. 사랑, 희락,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들이 우리의 인격 속에 많이 맺히기를 기도합니다. 용서의 열매를 맺어서 사람을 얻고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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