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11강(6:1-19) 사도로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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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11강
본문 누가복음 6:1-19요절 누가복음 6:13
사도로 부르셨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필요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제자들에게 집중하셨습니다. 그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이 시대를 섬기는 지혜를 배우고 사도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열 두 사도를 세우게 된 배경(1-11) :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 제자들은 안식일이지만 매우 바빴습니다. 회당에서 예배를 보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심방 다니느라 점심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끼니를 걸렀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밀 이삭을 훑어 손으로 비비어 입 속에 털어 넣었습니다. 이제 밀 이삭을 씹으려는 찰나 그 장면을 포착한 바리새인들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조항을 만들고 그 조항마다 시행 세칙 여섯 가지를 포함시켜 총 234가지의 금지 조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기 스위치도 켜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차를 운전하는 것도 금지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종이를 끊거나 찢는 것, 화장실의 휴지를 뜯는 것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유대인은 오직 미리 끊겨진 종이만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사랑하사 그들에게 안식일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다윗이 주라고 칭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일하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훑어 먹은 일을 변호하십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사랑이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일하느라 밥 먹을 겨를도 없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훑어 먹는 것을 보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빵 하나라도 건네주어야 마땅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법을 지키는 것은 쉽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선언하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제정하신 분이십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안식일을 지내야 참 쉼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살 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쉼이 없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실 때에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손 마른 것으로 인해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움츠러들었습니다. 오른손 마른 문제가 그의 마음도 마르게 하고 운명적인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는 오른손이 말라서 취직도 하지 못하고 탁구나 권투 같은 운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른손 마른 문제만 해결하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전 세계 인구 중 10억명이 장애인이라는 공식 보고서가 처음 발간되었습니다. 청력 손실 인구가 1억 2420만명, 망막 굴절 1억 2190만명, 우울증 9870만명입니다. 관절염도 4340만명이나 됩니다. 장애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장애만 없어지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강영우 박사는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강영우 학생은 수년간 방황했고 자살도 여러 차례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된 석은옥 여사의 도움을 받아서 결국 박사학위를 따고 그 자녀들을 훌륭한 사람들로 양육하여 명문가를 이루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인생이 놀랍게 바뀌었습니다.
오른손이 말라 운명적인 삶을 살고 있던 이 사람도 안식일에 예수님이 전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치료를 받아 새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른손 마른 사람에 대한 긍휼이 없습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이 그로 인해서 겪어야 할 슬픔과 아픔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소하는 일을 위해 그 샤프한(명민한) 머리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칼날로 사람을 자르기는 하는데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돕기를 원하셨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셨다면 굳이 지금 그를 고쳐주기보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만나서 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이들이 말씀을 바로 보고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고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안식일은 쉬어야 하지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장 바쁘셨습니다. 안식일에 쉬지도 못하고 안식일이 더 바쁘다고 투덜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편하다고 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바쁘면서도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삶을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이름 아래 어찌하여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고자 시도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볼 때 눈뜬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는 부끄럽게 여기던 마른 오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마른 손을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많은 문들이 소감을 통해 자기의 죄와 상처를 드러내고 내면의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그는 예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가 순종했을 때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일에 함께 하시고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진리가 분명해졌습니다. 이를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찬양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태도를 볼 때 탄식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새로운 자세로 연구하기보다 안일한 자세로 장로의 유전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규례를 자꾸 만들어 백성들의 어깨에 짐을 지웠습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으로 백성들을 판단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말씀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훼방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애를 썼습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말씀을 새롭게 연구하여 생수를 마시고 전하지 않으면 세상 문화에 오염되고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홍대 주변에 목마른 가슴을 안고 몰려드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런 시대의 문제들을 안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둘째, 열 두 사도를 부르신 예수님(12-19) : 이때에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싸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부패하여 양들이 죽어가는 그 시대를 어떻게 섬겨야 할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듣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가 밤새워 기도했다는 것은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애를 썼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중대한 사역의 변화를 기도하신 후에 결정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맡은 인류 구속 역사의 책임감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임감이 사람을 키웁니다. 지금 우리는 자다가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여름 수양회를 앞두고 있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임이 앞으로 50년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깨어 기도함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밤새워 기도하신 후에 어떤 방향을 잡으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날이 밝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에 마음의 어두움이 걷히고 밝아지셨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밝은 새 역사를 이룰 믿음이 생기셨습니다. 그 밝은 길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신 것입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가 있었고 그 중에 70명의 제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셨는데 이는 새이스라엘인 교회의 기초석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각 족속들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열둘 중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집중하셨고 그 중에서도 베드로 한 사람을 세우는 일에 더욱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과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셨습니다.
사도란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작은 예수가 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사도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전도의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그 열매를 보존하기 위해서 양육 사역을 하는 제자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 훈련을 하셨습니다. 제자 훈련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영적 성숙과 영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영적인 일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열두 명이라는 사도들에게 집중하였습니다. 사도들을 택하신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영적인 소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배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어부, 세리, 열심당원, 심지어 배반할 자까지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고 마태와 같이 돈이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석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조각가의 손에 들린 원석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듬으사 보배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이 많지만 택하여 열매를 맺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바로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은 못할지라도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있는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 말고 잘 키워야 합니다. 현재 자라나는 리더들을 잘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한 사람을 위한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분산시킬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그 부르심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겠지만 제자 훈련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한다면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즉 훈련하고 있는 그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만큼 따라오지 않는다고 압박하지 말고 인내함으로 일용할 양식 훈련, 소감 훈련, 전도 훈련, 섬기는 훈련, 순종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고 영적으로 자라도록 깨어서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일대일과 가정 교회, 팀모임을 통해서 제자 훈련을 꾸준히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50주년 기념 선교대회와 선교사 목자 세미나를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는 이번 대회에서 UBF의 정신과 사역과 비전을 정리했습니다. 정신은 ‘성경 중심의 정신’, ‘대학생 제자양성의 정신’, ‘세계선교와 자비량의 정신’, ‘공동체 정신’, ‘주는 정신’, ‘구유 정신’, ‘개척 정신과 자립 정신’입니다. 사역은 ‘제자 양성 및 가정교회’, ‘일대일 성경공부’, ‘일용할 양식’, ‘소감’,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양성 및 파송’, ‘사회봉사’, ‘북한 선교’입니다. 이 모든 정신과 사역의 핵심은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 양성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요절은 디모데후서 2:2절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입니다. 이는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설립자인 도슨 트로트맨이 처음 외우도록 했던 성경 구절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가르쳤고, 바울은 디모데를 가르쳤습니다. 우주의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 분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살다가 죽으신 끝에 그 수고의 대가로 얻은 것은 고작 제자 몇 명이라니 실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든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바울의 모형을 따랐다면 교회는 한 세대 동안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는 “내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고 일생을 바쳤던 대중 전도 집회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결코 완수 할 수 없으나,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하는 이 전략으로는 가능하다”(The Holy Spirit, Waco: Word, 1978, p147)고 고백했습니다. 대중 전도 방법으로 숫자를 늘려가는 더하기 식의 전도로는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 배가의 원리로는 복음으로 온 세계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셨습니다. 그곳에는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온 무리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현장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양들의 문제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평지로 내려오셔서 그들을 삶 속에서 동역자로 키우셨습니다. 제자 양성은 함께 살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 양성 프로그램도 필요하지만 제자는 도제 교육을 통해서 재생산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삶 속에서 배웁니다. 예수님이 앞서 가시면 그 본을 보면서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리지만 처음부터 사람들 속에서 섬기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지식의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훈련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리지만 마음과 마음이 부딪치면서 예수님을 배우도록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제자를 세우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제자를 키우는 일에 공동체가 헌신해야 합니다. 내 양, 네 양 할 것 없이 공동체가 몇 명의 제자를 합심하여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몇 명의 학생 양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대학생 제자 양성은 어려운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이번 선교대회에 참석하신 선교사님들은 남긴 제자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또 가정 교회를 통해서 맺은 열매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각 나라에서 맺은 열매를 보고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제자 양성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때 비전이 생깁니다.
제자 양성은 전도와 양육과 훈련과 파송의 단계를 거칩니다. 양육의 수고는 하루아침에 끝날 수 없습니다. 목자가 영육간에 고갈되는 단계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실 주님과 복음 역사를 위해서 고갈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고갈되는 것을 적절히 채움을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고 달려가도 곤비치 않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을 때 제자 양성을 지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과 함께 일생 동안 예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50년 동안 캠퍼스 제자 양성과 233개국 중 아직 개척되지 않은 140개국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이끌어 나갈 일꾼들을 키우는 일에 헌신합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깊이 누리며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6:1-19요절 누가복음 6:13
사도로 부르셨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필요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제자들에게 집중하셨습니다. 그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이 시대를 섬기는 지혜를 배우고 사도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열 두 사도를 세우게 된 배경(1-11) :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 제자들은 안식일이지만 매우 바빴습니다. 회당에서 예배를 보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심방 다니느라 점심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끼니를 걸렀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밀 이삭을 훑어 손으로 비비어 입 속에 털어 넣었습니다. 이제 밀 이삭을 씹으려는 찰나 그 장면을 포착한 바리새인들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조항을 만들고 그 조항마다 시행 세칙 여섯 가지를 포함시켜 총 234가지의 금지 조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기 스위치도 켜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차를 운전하는 것도 금지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종이를 끊거나 찢는 것, 화장실의 휴지를 뜯는 것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유대인은 오직 미리 끊겨진 종이만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사랑하사 그들에게 안식일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다윗이 주라고 칭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일하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훑어 먹은 일을 변호하십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사랑이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일하느라 밥 먹을 겨를도 없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훑어 먹는 것을 보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빵 하나라도 건네주어야 마땅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법을 지키는 것은 쉽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선언하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제정하신 분이십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안식일을 지내야 참 쉼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살 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쉼이 없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실 때에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손 마른 것으로 인해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움츠러들었습니다. 오른손 마른 문제가 그의 마음도 마르게 하고 운명적인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는 오른손이 말라서 취직도 하지 못하고 탁구나 권투 같은 운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른손 마른 문제만 해결하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전 세계 인구 중 10억명이 장애인이라는 공식 보고서가 처음 발간되었습니다. 청력 손실 인구가 1억 2420만명, 망막 굴절 1억 2190만명, 우울증 9870만명입니다. 관절염도 4340만명이나 됩니다. 장애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장애만 없어지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강영우 박사는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강영우 학생은 수년간 방황했고 자살도 여러 차례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된 석은옥 여사의 도움을 받아서 결국 박사학위를 따고 그 자녀들을 훌륭한 사람들로 양육하여 명문가를 이루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인생이 놀랍게 바뀌었습니다.
오른손이 말라 운명적인 삶을 살고 있던 이 사람도 안식일에 예수님이 전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치료를 받아 새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른손 마른 사람에 대한 긍휼이 없습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이 그로 인해서 겪어야 할 슬픔과 아픔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소하는 일을 위해 그 샤프한(명민한) 머리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칼날로 사람을 자르기는 하는데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돕기를 원하셨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셨다면 굳이 지금 그를 고쳐주기보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만나서 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이들이 말씀을 바로 보고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고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안식일은 쉬어야 하지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장 바쁘셨습니다. 안식일에 쉬지도 못하고 안식일이 더 바쁘다고 투덜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편하다고 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바쁘면서도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삶을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이름 아래 어찌하여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고자 시도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볼 때 눈뜬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는 부끄럽게 여기던 마른 오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마른 손을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많은 문들이 소감을 통해 자기의 죄와 상처를 드러내고 내면의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그는 예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가 순종했을 때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일에 함께 하시고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진리가 분명해졌습니다. 이를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찬양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태도를 볼 때 탄식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새로운 자세로 연구하기보다 안일한 자세로 장로의 유전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규례를 자꾸 만들어 백성들의 어깨에 짐을 지웠습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으로 백성들을 판단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말씀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훼방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애를 썼습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말씀을 새롭게 연구하여 생수를 마시고 전하지 않으면 세상 문화에 오염되고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홍대 주변에 목마른 가슴을 안고 몰려드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런 시대의 문제들을 안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둘째, 열 두 사도를 부르신 예수님(12-19) : 이때에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싸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부패하여 양들이 죽어가는 그 시대를 어떻게 섬겨야 할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듣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가 밤새워 기도했다는 것은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애를 썼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중대한 사역의 변화를 기도하신 후에 결정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맡은 인류 구속 역사의 책임감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임감이 사람을 키웁니다. 지금 우리는 자다가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여름 수양회를 앞두고 있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임이 앞으로 50년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깨어 기도함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밤새워 기도하신 후에 어떤 방향을 잡으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날이 밝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에 마음의 어두움이 걷히고 밝아지셨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밝은 새 역사를 이룰 믿음이 생기셨습니다. 그 밝은 길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신 것입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가 있었고 그 중에 70명의 제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셨는데 이는 새이스라엘인 교회의 기초석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각 족속들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열둘 중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집중하셨고 그 중에서도 베드로 한 사람을 세우는 일에 더욱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과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셨습니다.
사도란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작은 예수가 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사도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전도의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그 열매를 보존하기 위해서 양육 사역을 하는 제자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 훈련을 하셨습니다. 제자 훈련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영적 성숙과 영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영적인 일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열두 명이라는 사도들에게 집중하였습니다. 사도들을 택하신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영적인 소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배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어부, 세리, 열심당원, 심지어 배반할 자까지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고 마태와 같이 돈이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석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조각가의 손에 들린 원석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듬으사 보배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이 많지만 택하여 열매를 맺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바로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은 못할지라도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있는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 말고 잘 키워야 합니다. 현재 자라나는 리더들을 잘 양육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한 사람을 위한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분산시킬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그 부르심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겠지만 제자 훈련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한다면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즉 훈련하고 있는 그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만큼 따라오지 않는다고 압박하지 말고 인내함으로 일용할 양식 훈련, 소감 훈련, 전도 훈련, 섬기는 훈련, 순종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고 영적으로 자라도록 깨어서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일대일과 가정 교회, 팀모임을 통해서 제자 훈련을 꾸준히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50주년 기념 선교대회와 선교사 목자 세미나를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는 이번 대회에서 UBF의 정신과 사역과 비전을 정리했습니다. 정신은 ‘성경 중심의 정신’, ‘대학생 제자양성의 정신’, ‘세계선교와 자비량의 정신’, ‘공동체 정신’, ‘주는 정신’, ‘구유 정신’, ‘개척 정신과 자립 정신’입니다. 사역은 ‘제자 양성 및 가정교회’, ‘일대일 성경공부’, ‘일용할 양식’, ‘소감’,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양성 및 파송’, ‘사회봉사’, ‘북한 선교’입니다. 이 모든 정신과 사역의 핵심은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 양성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요절은 디모데후서 2:2절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입니다. 이는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설립자인 도슨 트로트맨이 처음 외우도록 했던 성경 구절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가르쳤고, 바울은 디모데를 가르쳤습니다. 우주의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 분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살다가 죽으신 끝에 그 수고의 대가로 얻은 것은 고작 제자 몇 명이라니 실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든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바울의 모형을 따랐다면 교회는 한 세대 동안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는 “내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고 일생을 바쳤던 대중 전도 집회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결코 완수 할 수 없으나,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하는 이 전략으로는 가능하다”(The Holy Spirit, Waco: Word, 1978, p147)고 고백했습니다. 대중 전도 방법으로 숫자를 늘려가는 더하기 식의 전도로는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 배가의 원리로는 복음으로 온 세계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셨습니다. 그곳에는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온 무리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현장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양들의 문제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평지로 내려오셔서 그들을 삶 속에서 동역자로 키우셨습니다. 제자 양성은 함께 살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 양성 프로그램도 필요하지만 제자는 도제 교육을 통해서 재생산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삶 속에서 배웁니다. 예수님이 앞서 가시면 그 본을 보면서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리지만 처음부터 사람들 속에서 섬기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지식의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훈련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리지만 마음과 마음이 부딪치면서 예수님을 배우도록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제자를 세우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제자를 키우는 일에 공동체가 헌신해야 합니다. 내 양, 네 양 할 것 없이 공동체가 몇 명의 제자를 합심하여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몇 명의 학생 양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대학생 제자 양성은 어려운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이번 선교대회에 참석하신 선교사님들은 남긴 제자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또 가정 교회를 통해서 맺은 열매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각 나라에서 맺은 열매를 보고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제자 양성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때 비전이 생깁니다.
제자 양성은 전도와 양육과 훈련과 파송의 단계를 거칩니다. 양육의 수고는 하루아침에 끝날 수 없습니다. 목자가 영육간에 고갈되는 단계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실 주님과 복음 역사를 위해서 고갈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고갈되는 것을 적절히 채움을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고 달려가도 곤비치 않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을 때 제자 양성을 지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과 함께 일생 동안 예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50년 동안 캠퍼스 제자 양성과 233개국 중 아직 개척되지 않은 140개국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이끌어 나갈 일꾼들을 키우는 일에 헌신합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깊이 누리며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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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회 다운로드 | DATE : 2011-06-12 15: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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