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10강(5:17-39)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11년 누가복음 제10강
본문 누가복음 5:17 - 39
요절 누가복음 5:32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이 땅에 전도하러 오셨습니다. 바다 같은 이 땅에서 어부 같이 사람을 취하는 삶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삶입니다. 회개시킨다는 말이 좀 부담스럽지만 죄로 인해서 고통하고 신음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은혜롭고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까? 병으로 고통 하는 사람이 의사를 만나 치료받는 것이 소망이듯이 죄인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이 시간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죄짐을 모두 예수님께 내려놓고 나음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힘차게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아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시자요 송사자로 와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건 없건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각자 시급하게 생각하는 병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거기에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는데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의 병이 가장 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좁은 집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 빼곡히 앉아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사람들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아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람마다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어려움을 겪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나가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음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등감과 죄의식, 화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고자 하는 것과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달라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죄사함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주고자 하는데 젊은이들은 이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을 너무 의지하기 때문에 교만해서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깨지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소원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과 시도입니다. 그들은 접근성이 가장 뛰어난 곳을 찾아내서 집중 공략했습니다. 지붕에서 예수님 바로 앞으로 중풍병자의 상을 달아 내리는 것이야 말로 기발한 시도였습니다. 그들은 방향과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야 한다는 의지가 분명했고 또 친구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만 배상할 생각까지 하고 이런 일을 했을 것입니다. 이 일에 희생이 따르지만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했습니다.
“이기는 정주영, 지지 않는 이병철”이라는 책에 보면 정주영 회장의 빈대의 교훈이 나옵니다. 그 징그러운 빈대가 그리 끈질기고 또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젊은 시절, 노동자 합숙소에서 잘 때, 빈대를 피하고자 테이블 위에 잤습니다. 그런데 빈대가 테이블 다리를 타고 올라 와서 잠을 못 잤습니다. 궁여지책으로 각 다리에 빈대가 못 오도록 물을 담은 양재기를 놓았는데, 평화도 잠시 며칠 후 빈대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서 사람이 누워 있는 지점에서 툭툭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빈대도 자기 목적을 위해 저렇게 끈질기고 머리를 쓰는데, 하물며 사람인 내가 무얼 못 하랴하며, 중도에 포기함이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가면서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분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친구에 대한 사랑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무례함이나, 새치기나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왜 그 사람에게 죄 용서를 선언하실까요?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중풍 병보다 죄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보셨습니다. 죄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 죄가 무엇이든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마음에 얹혀 있던 짐이 떨어져 나가서 힘이 생깁니다. 치료가 일어납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신성 모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해주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심판하는 권세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으로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자학하고 후회한다고 죄가 씻어집니까? 비눗물을 먹는다고 죄가 씻어집니까? 고행을 하면 어떨까요?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일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벗어나는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사죄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죄를 시인하고 고백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가 작용하게 하여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 후에 예수님께서 나가사 세관을 지나가실 때 레위라 하는 세리를 보셨습니다. 보셨다는 말은 주목해서 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고민을 보셨습니다. 레위는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회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돈을 많이 긁어모았지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도리어 돈을 벌면 벌수록 사람들의 욕을 먹어야 합니다. 그는 방향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얼마든지 더 선하게, 의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 방향만 바꾸어 주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질을 보셨습니다. 물론 그가 자질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은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그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주저 없이 따른 것을 볼 때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자기를 불러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자기 같은 공인된 죄인을 제자로 불러주신 부르심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감사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기쁨을 세리와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는 세리 인생과 아름다운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세리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즐거움이었습니다. 그의 잔치는 웃고 떠들고 기쁨의 잔치였습니다. 그 잔치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더욱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마음이 시끄럽고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세리와 죄인은 사기꾼이나 강도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사실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죄인은 부정해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인과 교제하면 자기도 더럽혀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과 같이 거룩한 분은 자기들과 함께 하고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눈이 시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죄인들을 보는 시각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어떻게 다르셨습니까?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건강한 사람은 병원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예방 차원에서 진료를 위해서 가는 것은 필요합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보다 병든 자에게 필요합니다.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병이 들어서 암 말기가 되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든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사탄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재산도 빼앗고 자녀들도 빼앗고 친구들에게 엄청 욕을 먹습니다. 그래도 욥은 자기의 의를 지켰습니다. 문제는 그가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기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그들에게 반박을 하면서 생깁니다. 그는 자기의 원통함을 풀어 주실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소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1)?” “트집을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1).” 하나님 앞에 선 욥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3-6).”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모든 율법을 지켜 스스로 흠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크리스천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빛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고전15:9). 시간이 지나서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습니다(엡 7:8). 말년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을 이렇고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를 볼 때 죄에 대한 인식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동시에 더욱 겸손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에 대한 기준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 것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죄를 죽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뻔뻔하게 계속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내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마음을 찢으며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은 고통스럽지만 상쾌해집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이제는 선한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함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은 병든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을 불러 놓고 사랑만 해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인 사랑 표현은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회개하도록 돕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문둥병자의 병을 고쳐주지 않고 좋은 옷을 입혀주는 것과 같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지는 않고 좋은 음식만 대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돕기보다는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드는 일에 빠져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이클 호튼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잘 살게 만드는 코치가 아닙니다. 사회적 성공, 행복한 결혼생활,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 없이 더 잘 사는 사람 많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방법 말고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호튼 교수는 “미국인 대부분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만 믿음, 신앙, 교리가 아닌 감정, 경험을 원한다”며 “진리가 무엇인지보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 또는 유익한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우리가 힘써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일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보다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며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신다고 불평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 비평의 대상입니다. 요한도 비평하고 예수님도 비평합니다. 그들은 속이 시끄럽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금식을 해서라도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합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과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긍휼히 여시기고 그들에게 한 말씀을 비유로 해 주십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새 포도주는 복음입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을 공부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찢고 애통하는 회개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깨끗하고 건강하게 됩니다.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이 회개하고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본문 누가복음 5:17 - 39
요절 누가복음 5:32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이 땅에 전도하러 오셨습니다. 바다 같은 이 땅에서 어부 같이 사람을 취하는 삶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삶입니다. 회개시킨다는 말이 좀 부담스럽지만 죄로 인해서 고통하고 신음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은혜롭고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까? 병으로 고통 하는 사람이 의사를 만나 치료받는 것이 소망이듯이 죄인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이 시간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죄짐을 모두 예수님께 내려놓고 나음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힘차게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아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시자요 송사자로 와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건 없건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각자 시급하게 생각하는 병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거기에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는데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의 병이 가장 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좁은 집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 빼곡히 앉아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사람들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아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람마다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어려움을 겪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나가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음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등감과 죄의식, 화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고자 하는 것과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달라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죄사함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주고자 하는데 젊은이들은 이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을 너무 의지하기 때문에 교만해서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깨지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소원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과 시도입니다. 그들은 접근성이 가장 뛰어난 곳을 찾아내서 집중 공략했습니다. 지붕에서 예수님 바로 앞으로 중풍병자의 상을 달아 내리는 것이야 말로 기발한 시도였습니다. 그들은 방향과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야 한다는 의지가 분명했고 또 친구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만 배상할 생각까지 하고 이런 일을 했을 것입니다. 이 일에 희생이 따르지만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했습니다.
“이기는 정주영, 지지 않는 이병철”이라는 책에 보면 정주영 회장의 빈대의 교훈이 나옵니다. 그 징그러운 빈대가 그리 끈질기고 또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젊은 시절, 노동자 합숙소에서 잘 때, 빈대를 피하고자 테이블 위에 잤습니다. 그런데 빈대가 테이블 다리를 타고 올라 와서 잠을 못 잤습니다. 궁여지책으로 각 다리에 빈대가 못 오도록 물을 담은 양재기를 놓았는데, 평화도 잠시 며칠 후 빈대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서 사람이 누워 있는 지점에서 툭툭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빈대도 자기 목적을 위해 저렇게 끈질기고 머리를 쓰는데, 하물며 사람인 내가 무얼 못 하랴하며, 중도에 포기함이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가면서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분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친구에 대한 사랑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무례함이나, 새치기나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왜 그 사람에게 죄 용서를 선언하실까요?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중풍 병보다 죄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보셨습니다. 죄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 죄가 무엇이든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마음에 얹혀 있던 짐이 떨어져 나가서 힘이 생깁니다. 치료가 일어납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신성 모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해주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심판하는 권세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으로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자학하고 후회한다고 죄가 씻어집니까? 비눗물을 먹는다고 죄가 씻어집니까? 고행을 하면 어떨까요?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일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벗어나는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사죄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죄를 시인하고 고백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가 작용하게 하여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 후에 예수님께서 나가사 세관을 지나가실 때 레위라 하는 세리를 보셨습니다. 보셨다는 말은 주목해서 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고민을 보셨습니다. 레위는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회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돈을 많이 긁어모았지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도리어 돈을 벌면 벌수록 사람들의 욕을 먹어야 합니다. 그는 방향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얼마든지 더 선하게, 의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 방향만 바꾸어 주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질을 보셨습니다. 물론 그가 자질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은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그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주저 없이 따른 것을 볼 때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자기를 불러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자기 같은 공인된 죄인을 제자로 불러주신 부르심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감사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기쁨을 세리와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는 세리 인생과 아름다운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세리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즐거움이었습니다. 그의 잔치는 웃고 떠들고 기쁨의 잔치였습니다. 그 잔치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더욱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마음이 시끄럽고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세리와 죄인은 사기꾼이나 강도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사실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죄인은 부정해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인과 교제하면 자기도 더럽혀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과 같이 거룩한 분은 자기들과 함께 하고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눈이 시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죄인들을 보는 시각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어떻게 다르셨습니까?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건강한 사람은 병원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예방 차원에서 진료를 위해서 가는 것은 필요합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보다 병든 자에게 필요합니다.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병이 들어서 암 말기가 되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든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사탄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재산도 빼앗고 자녀들도 빼앗고 친구들에게 엄청 욕을 먹습니다. 그래도 욥은 자기의 의를 지켰습니다. 문제는 그가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기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그들에게 반박을 하면서 생깁니다. 그는 자기의 원통함을 풀어 주실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소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1)?” “트집을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1).” 하나님 앞에 선 욥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3-6).”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모든 율법을 지켜 스스로 흠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크리스천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빛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고전15:9). 시간이 지나서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습니다(엡 7:8). 말년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을 이렇고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를 볼 때 죄에 대한 인식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동시에 더욱 겸손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에 대한 기준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 것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죄를 죽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뻔뻔하게 계속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내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마음을 찢으며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은 고통스럽지만 상쾌해집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이제는 선한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함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은 병든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을 불러 놓고 사랑만 해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인 사랑 표현은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회개하도록 돕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문둥병자의 병을 고쳐주지 않고 좋은 옷을 입혀주는 것과 같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지는 않고 좋은 음식만 대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돕기보다는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드는 일에 빠져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이클 호튼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잘 살게 만드는 코치가 아닙니다. 사회적 성공, 행복한 결혼생활,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 없이 더 잘 사는 사람 많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방법 말고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호튼 교수는 “미국인 대부분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만 믿음, 신앙, 교리가 아닌 감정, 경험을 원한다”며 “진리가 무엇인지보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 또는 유익한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우리가 힘써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일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보다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며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신다고 불평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 비평의 대상입니다. 요한도 비평하고 예수님도 비평합니다. 그들은 속이 시끄럽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금식을 해서라도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합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과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긍휼히 여시기고 그들에게 한 말씀을 비유로 해 주십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새 포도주는 복음입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을 공부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찢고 애통하는 회개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깨끗하고 건강하게 됩니다.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이 회개하고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2c79f8382b16dd70e3e6620cb6339e6d.hwp (0byte)
36회 다운로드 | DATE : 2011-05-22 15:07:3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