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8강(4:14-44) 다른 동네에서도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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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8강
본문 누가복음 4:14 - 44
요절 누가복음 4:43
다른 동네에서도 전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캠퍼스에서, 각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가끔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러 올라가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들을 볼 때 격려와 함께 도전을 받습니다. 마음을 먹고 전도하는데 학생들의 대답은 교회에 다녀봤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봤다고 하는데 복음을 배척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고 이들로 인해서 악영향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복음의 맛을 본 사람은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사랑을 느낄 때는 열심히 전도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사랑은 더욱 깊고 뜨거워져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내 삶에 어떤 뜻을 두고 계실까?”라든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등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려주면 당장이라도 순종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주님의 뜻을 찾는 분들에게 희소식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 본 적조차도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을 더는 데 목표를 두고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을 제대로 체험하도록 도울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을 불일 듯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합니까? 또 어떻게 전도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첫째, 말씀의 권세를 믿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16-30).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습니다. 그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듣고 뭇 사람들이 칭송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도록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들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새로운 해석과 진리에 정통한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말씀의 권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다 변화될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이 칭송했다고 해서 그들이 다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배척을 받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들은 말씀 그대로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배척함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한 사람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을 맡은 자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책을 펴서 기록된 데를 찾으셨습니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당시에 회당 예배에서 가르치는 자는 앉았고 회중들은 서 있었습니다. 황금의 입이라는 설교자 크리소스톰 이래로 지금은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너무나 열정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다보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서서 말씀을 가르치다보니 하나 둘 설교자들이 서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오늘날은 이런 형태가 더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영적인 무지와 죄의 포로된 자들이 그의 말씀을 듣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물질에서 안정을 찾고자 하던 사람들이 그 한계를 인식하고 영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물질에 대한 근심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숫자의 포로된 사람이 삶의 진정성을 찾고 숫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 사람이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게임의 포로된 자가 거기서 자유를 얻고 음란의 포로된 자가 자유롭게 되어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진리를 몰라 불신에 매여 있던 사람이 자유하게 되어 믿음의 사람이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두려움의 포로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평강을 누리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두움에 있던 자들이 빛을 보았습니다. 눈 먼자들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눌린 자들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의무에 눌린 사람들이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어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말하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희년에는 노예들을 풀어주고 저당 잡힌 땅을 돌려줍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죄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의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권세 있고 은혜로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은 말씀은 은혜롭게 받았는데 행동은 은혜롭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불일치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들의 마음이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생각으로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자기들보다 더 배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을 보니 배가 아팠습니다. 비교의식이 생기고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말씀을 전하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삼고 실천하면 복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누가 말씀을 전하든 그는 있다가 사라질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용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열등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사람을 잘 아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좌우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중심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받던지 말씀을 배척하고 심판을 받던지 둘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을 잘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것이라고 붕붕 뜨던지 아니면 어떤 놀라운 변화를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담담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26,27).” 흉년에 엘리야에게 도움을 받은 과부는 이방인인 사렙다 과부뿐이었습니다. 엘리사에게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도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예수님께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아직 예수님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준비해서 전할지라도 사람들이 다 그 말씀을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낙담하지 말고 꾸준히 말씀을 가르쳐야합니다. 그러다보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제자로 자라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세계 22억명의 심령에 심기게 되었습니다. 각 가정에서 일생 몇 명의 아이들을 낳아 기르지만 세계 인구는 67억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꾸준히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적인 생명은 말씀을 통해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45억 명이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지옥 불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10억 5천만 명이나 됩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전도는 악한 영과의 싸움인 동시에 치료를 가져옵니다(31-41). 예수님이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에 권위가 있어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힘이 있었습니다. 어떤 힘이 있었습니까? 귀신을 내어 쫓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회당에서 크게 소리지르며 말씀 역사를 훼방했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34).” 귀신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데 정말 귀신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사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서 넘어뜨리고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넘어졌지만 상하지 아니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씀의 권능을 보고 다 놀라 서로 말합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을 내어 쫓는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썩은 것을 도려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합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진리의 말씀을 매우 싫어합니다. 진리를 듣는 사람들을 자기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권위와 능력으로 전해질 때 사탄이 발광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곳에 핍박도 있고 사탄의 역사도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북부에 바탁 족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선교사 부부가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주민들은 모두 무슬림이었습니다. 족장은 이 선교사 부부를 잡아서 죽인 후 토막을 냈습니다.
몇 년 뒤, 또 다른 선교사가 들어가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살해된 선교사 부부가 하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족장은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삽시간에 온 부족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수마트라 섬 북부에 약 3백만 명 이상의 바탁 족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선교사 부부처럼 가장 먼저 위험 속으로 달려들 수 있을까요? 나중에 오는 이들이 그 희생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죽음을 무릅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희생이 아직은 복음에 적대적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전제 조건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믿고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대응하셨습니다. 그는 악령을 쫓아내실 때 자신의 권세로 쫓아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하여 악령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악령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대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장면은 마가복음 1:29절을 볼 때 베드로를 부르신 이후의 사건입니다. 누가가 차례대로 복음서를 썼지만 어떤 개별적인 사건에서는 주제별로, 지역별로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병은 만성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서 열병을 꾸짖으시자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통해서 가정의 큰 근심을 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얻기 위해서 그의 실제적인 근심들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안식일이 끝나고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습니다.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치료하신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시고 치료해 주셨음을 보여줍니다. 안식일에 하루 종일 일하시고 저녁에 쉬셔야 했지만 예수님은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은 아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악영향을 크게 끼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잠잠하고 있는 것이 복음 역사를 훼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에서 놓임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증거를 통해서 자신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시고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기를 구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묵묵히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선한 일을 한 후에 자기를 감추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을 안다는 식으로 지식 자랑을 해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도울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은밀성이 있을 때 더욱 진가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전도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함으로 능력을 덧입어야 가능합니다(42).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 가신 이유는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신실한 영혼은 진보하고 성경의 감추어진 신비들을 깨닫는다.”고 말했습니다. 침묵과 고독이 오늘날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시끄러운 가운데 지내고 있습니다. 음악 소리, 텔레비전 소리, 라디오 소리, 싸우는 소리, 좀 조용히 삽시다. 침묵과 고독은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침묵과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살피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자신을 알고 또 자신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과 혼란에 대한 두려움 없이 침묵의 은사를 개발해야만 합니다. 또 침묵과 고독은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안에서 기도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묵상기도의 삶을 더욱 깊게 해 줍니다. 기도는 매우 단순하게 되고 거의 말이 없어지고 주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인계받게 되고 점점 더 우리 안에서 기도하는 영이 되십니다. 더 나아가 침묵과 기도는 양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즉 목자가 침묵함으로 양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길러집니다. 우리들에게 묵상과 고요와 내적 침묵 안에서 자양분을 공급받는 능력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침묵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미래를 위한 갱신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매일 아침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은 우리가 침묵과 고독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새벽 기도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새벽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모든 부흥 운동의 뒤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기도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역동적인 활동과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침묵을 지키는 삶에 균형을 유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을수록 그는 더욱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그를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그들을 떠나셔야만 합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예수님은 아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복음을 전하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하셨습니다. 다른 동네들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은 영원한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제자의 삶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는 그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최근들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중국사람, 노랑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에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리고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추수할 일꾼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알아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먼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추수할 일꾼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각 가정 교회들이 홍대 캠퍼스로 나아가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창의적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내가 체험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를 힘씁시다. 특히 50주년 기념 선교대회가 5월 29일에 있는데 양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듣도록 장충체육관을 가득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4:14 - 44
요절 누가복음 4:43
다른 동네에서도 전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캠퍼스에서, 각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가끔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러 올라가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들을 볼 때 격려와 함께 도전을 받습니다. 마음을 먹고 전도하는데 학생들의 대답은 교회에 다녀봤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봤다고 하는데 복음을 배척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고 이들로 인해서 악영향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복음의 맛을 본 사람은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사랑을 느낄 때는 열심히 전도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사랑은 더욱 깊고 뜨거워져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내 삶에 어떤 뜻을 두고 계실까?”라든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등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려주면 당장이라도 순종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주님의 뜻을 찾는 분들에게 희소식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 본 적조차도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을 더는 데 목표를 두고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을 제대로 체험하도록 도울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을 불일 듯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합니까? 또 어떻게 전도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첫째, 말씀의 권세를 믿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16-30).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습니다. 그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듣고 뭇 사람들이 칭송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도록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들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새로운 해석과 진리에 정통한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말씀의 권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다 변화될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이 칭송했다고 해서 그들이 다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배척을 받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들은 말씀 그대로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배척함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한 사람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을 맡은 자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책을 펴서 기록된 데를 찾으셨습니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당시에 회당 예배에서 가르치는 자는 앉았고 회중들은 서 있었습니다. 황금의 입이라는 설교자 크리소스톰 이래로 지금은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너무나 열정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다보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서서 말씀을 가르치다보니 하나 둘 설교자들이 서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오늘날은 이런 형태가 더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영적인 무지와 죄의 포로된 자들이 그의 말씀을 듣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물질에서 안정을 찾고자 하던 사람들이 그 한계를 인식하고 영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물질에 대한 근심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숫자의 포로된 사람이 삶의 진정성을 찾고 숫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 사람이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게임의 포로된 자가 거기서 자유를 얻고 음란의 포로된 자가 자유롭게 되어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진리를 몰라 불신에 매여 있던 사람이 자유하게 되어 믿음의 사람이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두려움의 포로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평강을 누리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두움에 있던 자들이 빛을 보았습니다. 눈 먼자들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눌린 자들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의무에 눌린 사람들이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어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말하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희년에는 노예들을 풀어주고 저당 잡힌 땅을 돌려줍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죄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의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권세 있고 은혜로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은 말씀은 은혜롭게 받았는데 행동은 은혜롭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불일치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들의 마음이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생각으로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자기들보다 더 배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을 보니 배가 아팠습니다. 비교의식이 생기고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말씀을 전하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삼고 실천하면 복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누가 말씀을 전하든 그는 있다가 사라질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용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열등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사람을 잘 아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좌우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중심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받던지 말씀을 배척하고 심판을 받던지 둘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을 잘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것이라고 붕붕 뜨던지 아니면 어떤 놀라운 변화를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담담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26,27).” 흉년에 엘리야에게 도움을 받은 과부는 이방인인 사렙다 과부뿐이었습니다. 엘리사에게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도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예수님께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아직 예수님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준비해서 전할지라도 사람들이 다 그 말씀을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낙담하지 말고 꾸준히 말씀을 가르쳐야합니다. 그러다보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제자로 자라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세계 22억명의 심령에 심기게 되었습니다. 각 가정에서 일생 몇 명의 아이들을 낳아 기르지만 세계 인구는 67억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꾸준히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적인 생명은 말씀을 통해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45억 명이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지옥 불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10억 5천만 명이나 됩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전도는 악한 영과의 싸움인 동시에 치료를 가져옵니다(31-41). 예수님이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에 권위가 있어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힘이 있었습니다. 어떤 힘이 있었습니까? 귀신을 내어 쫓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회당에서 크게 소리지르며 말씀 역사를 훼방했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34).” 귀신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데 정말 귀신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사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서 넘어뜨리고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넘어졌지만 상하지 아니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씀의 권능을 보고 다 놀라 서로 말합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을 내어 쫓는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썩은 것을 도려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합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진리의 말씀을 매우 싫어합니다. 진리를 듣는 사람들을 자기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권위와 능력으로 전해질 때 사탄이 발광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곳에 핍박도 있고 사탄의 역사도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북부에 바탁 족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선교사 부부가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주민들은 모두 무슬림이었습니다. 족장은 이 선교사 부부를 잡아서 죽인 후 토막을 냈습니다.
몇 년 뒤, 또 다른 선교사가 들어가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살해된 선교사 부부가 하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족장은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삽시간에 온 부족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수마트라 섬 북부에 약 3백만 명 이상의 바탁 족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선교사 부부처럼 가장 먼저 위험 속으로 달려들 수 있을까요? 나중에 오는 이들이 그 희생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죽음을 무릅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희생이 아직은 복음에 적대적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전제 조건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믿고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대응하셨습니다. 그는 악령을 쫓아내실 때 자신의 권세로 쫓아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하여 악령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악령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대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장면은 마가복음 1:29절을 볼 때 베드로를 부르신 이후의 사건입니다. 누가가 차례대로 복음서를 썼지만 어떤 개별적인 사건에서는 주제별로, 지역별로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병은 만성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서 열병을 꾸짖으시자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통해서 가정의 큰 근심을 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얻기 위해서 그의 실제적인 근심들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안식일이 끝나고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습니다.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치료하신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시고 치료해 주셨음을 보여줍니다. 안식일에 하루 종일 일하시고 저녁에 쉬셔야 했지만 예수님은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은 아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악영향을 크게 끼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잠잠하고 있는 것이 복음 역사를 훼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에서 놓임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증거를 통해서 자신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시고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기를 구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묵묵히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선한 일을 한 후에 자기를 감추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을 안다는 식으로 지식 자랑을 해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도울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은밀성이 있을 때 더욱 진가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전도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함으로 능력을 덧입어야 가능합니다(42).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 가신 이유는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신실한 영혼은 진보하고 성경의 감추어진 신비들을 깨닫는다.”고 말했습니다. 침묵과 고독이 오늘날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시끄러운 가운데 지내고 있습니다. 음악 소리, 텔레비전 소리, 라디오 소리, 싸우는 소리, 좀 조용히 삽시다. 침묵과 고독은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침묵과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살피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자신을 알고 또 자신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과 혼란에 대한 두려움 없이 침묵의 은사를 개발해야만 합니다. 또 침묵과 고독은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안에서 기도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묵상기도의 삶을 더욱 깊게 해 줍니다. 기도는 매우 단순하게 되고 거의 말이 없어지고 주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인계받게 되고 점점 더 우리 안에서 기도하는 영이 되십니다. 더 나아가 침묵과 기도는 양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즉 목자가 침묵함으로 양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길러집니다. 우리들에게 묵상과 고요와 내적 침묵 안에서 자양분을 공급받는 능력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침묵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미래를 위한 갱신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매일 아침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은 우리가 침묵과 고독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새벽 기도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새벽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모든 부흥 운동의 뒤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기도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역동적인 활동과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침묵을 지키는 삶에 균형을 유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을수록 그는 더욱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그를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그들을 떠나셔야만 합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예수님은 아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복음을 전하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하셨습니다. 다른 동네들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은 영원한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제자의 삶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는 그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최근들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중국사람, 노랑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에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리고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추수할 일꾼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알아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먼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추수할 일꾼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각 가정 교회들이 홍대 캠퍼스로 나아가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창의적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내가 체험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를 힘씁시다. 특히 50주년 기념 선교대회가 5월 29일에 있는데 양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듣도록 장충체육관을 가득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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