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11강(7:1-17) 젊은이여, 일어나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486회 작성일 11-04-24 15:18

본문

2011년 누가복음 14강 (부활절 특강)                                       
본문 누가복음 7:1 - 17요절 누가복음 7:14
젊은이여, 일어나라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죽음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 한 마디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는 독자를 잃은 과부를 울지 말라 위로하시고 청년을 말씀하심으로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 젊은 지성인들을 말씀으로 살리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깊이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고치심(1-10)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주 무대였습니다. 가버나움에 세관이 있어서 세리 마태가 여기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 가버나움은 로마 군대의 주둔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이곳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자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이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장로들이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4,5).” 

  당시 로마 시대 기록에는 항해할 때 배가 위험하면 물건 대신에 병든 노예를 바다에 버렸다고 합니다. 때문에 보통 병든 종 한 사람이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사랑하는 종이 병들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그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백부장의 평소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기에게 속해 있던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이 종은 이런 백부장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백부장과 회당, 백부장과 종, 백부장과 유대 장로들의 관계를 볼 때 그는 인격적이고 성숙한 리더였습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 집이 멀지 아니하였을 때에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간청을 합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6,7).” 그는 예수님을 영적 세계의 사령관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질병에게도 명령할 수 있는 분이시오 귀신을 명하사 쫓아내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인간적인 주인 정도가 아니라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으로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앞에 자신은 비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만 하사 자기 하인을 낫게 해 달라고 합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서도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은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위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말이란 단지 소리가 아니라 그 이면에 인격적인 실재가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는가에 따라서 무게가 달라집니다. 권세가 클수록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그 파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씨가 테러를 당하고 나서 “대전은 어떻게 됐어요” 하는 한 마디 때문에 충청도 민심을 사로잡았습니다. 군대에서 연대장의 한 마디에 사병들은 죽고 살기도 합니다.

  백부장의 예수님의 한 말씀에 대한 경외심은 군인으로서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가운데 나온 깨달음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권세자를 통한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군대 생활을 통해서 경험했는데 이를 질병의 세계에 까지 확장해서 이해했습니다. 군대에서 신병들을 훈련시킬 때 상급자의 명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이유 없습니다.” 등입니다. 변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절대 순종을 통해서 상관의 명령에 죽음까지 불사하고 전투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절대순종을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고 그 권세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에게 불가능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만 하사 내 종을 낫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친구들의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돌이키시고 따르는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만한 믿음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말씀만으로 종의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입니다. 공간을 넘어서 말씀만으로 질병을 치료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의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 그 종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에 나았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한 말씀만 잘 들어도 구원을 받습니다. 한 말씀만 역사해도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많은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 말씀만 마음에 새겨도 인생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소감을 쓰고 나서 한마디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남는 한마디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많은 말씀을 듣지만 한 말씀만이라도 믿고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이 한마디를 통해서 죄사함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한 말씀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그 한 말씀이 전 세계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롬 13:13,14절 말씀을 통해서 정욕을 벗어던지고 5세기에 교회를 원수들에게서 구해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창1:1절 말씀을 통해서 창1:31절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고귀한 자아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말씀만 하사 우리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청년아 일어나라(11-17)

  그 후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습니다. 나인이란 즐거움, 아름다움이란 뜻인데 오늘은 성 전체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였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왔습니다. 생명의 주님은 성으로 들어오시고 죽은 자를 실은 상여는 성을 나오는 중에 생명과 죽음의 행렬이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장례 행렬에 참여한 이유는 한 청년의 죽음이 인간으로서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외로운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얼마 전에 남편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막막하였습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은 남아 있는 아들을 잘 키워서 남편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며 살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여인에게 삶의 의미요 보람이었습니다. 자신은 굶어도 아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보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과부로서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어려웠지만 아들을 청년이 되기까지 키우는 재미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이 청년은 많은 재능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앞으로 큰 일을 할 인물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갑작스런 사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순식간에 마을에 다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여인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무릎에 힘이 빠져서 몸을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실신을 하였습니다. 여인이 깨어나 한없이 슬픈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하나님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죽이려면 나를 죽이시지 왜 아들을 죽이셨습니까?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너무 하십니다. 여인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고 적신으로 돌아갑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죽음은 인간을 슬프게 합니다. 죽음 앞에 우리는 너무나 무력합니다. 죽음은 블랙홀과 같이 모든 것을 삼켜버립니다. 이 여인의 희망, 삶의 의미, 안정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죽음은 여인에게 살고 싶은 의욕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한참 꽃피우려던 젊은 청년의 무한한 가능성과 꿈이 사라졌고 그 어머니의 삶의 즐거움과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과부에게 있어 남은 삶은 떨어지는 목련꽃과 같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누가 이 여인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슬픔에 공감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마음이 나갔다고 했습니다. “His heart sent out to her and he said, "Don't cry."” “울지 말라.” 보통 인간이 이런 말을 했다면 무책임한 말이고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실컷 울라고 하든지 말없이 함께 슬퍼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함께 슬퍼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눈물을 그치게 하십니다.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인간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울지 말라”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은 애정을 갖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여인의 마음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이 넘쳤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당하고 이겨보신 사람만이 줄 수 그런 평안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울지 말라” 명하심으로 여인은 울음을 그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멘 자들이 섰습니다. 예수님은 관에 누워있는 청년에게 이르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의 주로서 죽은 아들을 살려서 그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울고 있던 과부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멸하노니 일어나라.” 청년은 어떤 존재여야 합니까? 청년은 헬라어로 ‘네아니스코스’인데 ‘젊은, 어린, 새로운’이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청년은 말만 들어도 어려보이고 새롭습니다. 청년은 새싹과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사람의 외모보다 내적인 자세가 청춘을 결정한다고 읊었습니다. “청춘이란 인간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라네. 장밋빛 뺨,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늠름한 의지, 빼어난 상상력, 불타는 정열, 삶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선함이라네. 청춘은 겁 없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말하는 것이라네. 때로는 스무 살 청년에게서가 아니라 예순 살 노인에게서 청춘을 보듯이,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버려서 늙어간다네. …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라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이십 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이 없다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 세 일지라도 영원히 청춘의 소유자라네.”

  저는 오늘날 청년들에게서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봅니다.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고, 크게 웃고, 자신만만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깊이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서 미래가 불확실해 보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서 운명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은 큰데 현실이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에 불만족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이성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체험이 없기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사실 진리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서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불살라 헌신할만한 인생의 비전과 목표가 없기 때문에 낮에도 밝은 햇빛을 받으며 방바닥에 누워 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꼭 해야만 할 일이 아니라면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죄로 인한 존재의 비참함을 체험하고 허무한 생각으로 무기력합니다. 헤쳐 나가야 할 일들과 자신의 무력함을 생각할 때 돈이나 벌어서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한마디로 위대한 일을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기보다 적당히 타협하고 사명을 회피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부대끼며 살면서도 외로움을 느끼며 눈물을 흘립니다. 청년들은 거친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많습니다. 사탄의 발톱에 찢긴 상처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관 속에 누워 있는 모습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불신이 있을 때, 교만한 마음을 가질 때, 독선과 자기 중심이 될 때,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힐 때, 세상 욕심에 휘둘리며 살 때, 기쁨이 사라지고 죽은 자 같이 무기력하게 됩니다. 각자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관 속에 들어가 누워 있으면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여기가 내 자리지 하며 자기 모멸감에 빠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어서 관속에 누워 있는 시체를 향하여 큰 소리로 “청년아!” 부르십니다. 죽음의 세력 속에 감추어져 있는 청년, 누워 있는 청년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청년의 모습에서 이 청년이 본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십니다. 그에게 있는 가능성,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재능들, 그가 성취해야 할 일들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청년의 모습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의 인생을 위해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어머니에게 슬픔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이 청년을 향해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부르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 어두움 속에서 “빛이 있으라” 명하신 그 말씀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명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가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의 쇠사슬을 끊고 죽은 청년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어서 누워 있는 청년을 살려 자유롭게 합니다.

  저는 믿음의 눈으로 여기에 앉아 계신 청년들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명령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여러분의 삶에 실패가 있을지언정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나 도전하십시오.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말려 주시면 자신있게 그 줄을 놓아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다른 길, 더 좋은 길이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사 크신 능력으로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습니다. 주님은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대언하였을 때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들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었습니다. 그가 다시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자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였습니다. 이 시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사 죽은 청년들을 살리시고 여호와의 군대로 세워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여호와의 군대로 세워주옵소서.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51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573 누가복음 이엘리야 1205 07-17
572 누가복음 이엘리야 1311 07-10
571 누가복음 이엘리야 1283 07-03
570 누가복음 이엘리야 1324 06-26
569 누가복음 이엘리야 1288 06-19
568 특강 이엘리야 1571 06-15
567 누가복음 이엘리야 1327 06-12
566 특강 이엘리야 1676 06-05
565 누가복음 이엘리야 1388 05-22
564 누가복음 이엘리야 1482 05-15
563 누가복음 이엘리야 1510 05-08
562 특강 김호세아 2150 05-02
열람중 누가복음 이엘리야 1487 04-24
560 누가복음 이엘리야 1436 04-17
559 누가복음 이엘리야 1478 04-10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