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6강(3:1-38) 세례 받으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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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 6 강
말씀 누가복음 3:1-38 요절 누가복음 3:21
세례 받으신 예수님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죄사함을 얻기 위한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우리가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세례 요한의 사역(1-20): 세례 요한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 시대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1,2절을 보면 로마 제국은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째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헤롯 대왕이 죽고 나서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빈들은 조용합니다. 대개 수도사들이 빈 들에 거하면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빈들은 사막과 비슷한 광야입니다. 그곳에서 밤하늘을 보면 하늘이 나와 가장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독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입니다. 세례 요한이 속해 있던 엣세네파는 빈들에서 엄격한 영적인 훈련을 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기도에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의 왕궁이나 성전에 임하지 않고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을까요? 왕궁에 있는 권세자들이나 성전에 있는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부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시할 정도로 교만했습니다. 어떤 분의 표현에 의하면 그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의 말을 20년 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의 말도 듣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겠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받지 않으면 능글능글맞게 변합니다. 요한은 성령이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말씀을 받지 말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듣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목적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사람들이 주의 길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짐으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산 같이 교만한 마음이 깎여서 낮아지고, 움푹 패인 인생의 상처가 메워지고, 구불구불 비뚤어진 마음이 바로 잡혀야 합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했다고 외쳤습니다(사 59:1-2). 그렇다면 주의 오심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기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 중심에 잡힌 것입니다. 헬라 문화에서 죄는 ‘표적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즉 과녁의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무엇을 했는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가’과 관련된 것입니다. 내 마음의 왕좌에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앉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다스려 주시도록 자기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운선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는 인격의 삼요소인 지정의가 다 동원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하고 그 죄로 인해 애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돌이키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죄를 버릴 때 예수님께서 가져가 버리십니다. 그런데 때로 쓰레기를 버렸는데 ‘거부’라는 글씨를 볼 때가 있습니다. 이는 법에 정한 규격 봉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데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거나, 후회 하는데 그치면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신의 이름으로 회개해도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를 고백해야 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멸시하는 것은 죄입니다. 자기를 멸시하는 죄는 창조의 선함을 부정하고 자신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죄를 죽이기 위해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만, 자기를 멸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기부정은 창조의 선함을 확증하고 우리가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고 그 가치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자기 부정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기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합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자기를 멸시하면 치료를 받고자 하나님께 나아온 사람이 그 앞에서 더욱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죄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깊이 받고 말씀에 비추어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 말씀에 기초한 인생 소감을 쓰도록 돕습니다.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온 무리들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회개하도록 어떻게 도왔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은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사단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메시아를 적대하는 자들에 대한 표현입니다(시91:13). 독사는 자기의 모습을 주변 상황에 맞게 잘 위장합니다. 그리고 독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기는 했지만 진실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회개한다고 말은 했지만 행동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와 세속적인 명예심 등, 부패한 마음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그 마음을 찔러 쪼갰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자부심은 강했지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신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뜻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격적인 변화, 곧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야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모든 면에서 그를 닮아갑니다. 만약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인은 도끼로 그 나무를 찍어 불에 던져 넣습니다. 쓸모없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루살렘에 닥칠 앞날의 운명을 감지하고 이런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죄의 개념은 물론이고 죄에 대한 고발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시대 사람들에게 더 이상 간음이란 게 없습니다. 다만 ‘이룰 수 없는 사랑’일뿐입니다. 또 기업체 간부들의 기업비리가 들통이 나도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재수가 없어서 걸렸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죄라도 간과하거나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거룩의 수준을 낮추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북한이라는 도끼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이 도끼를 들어 찍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할 좋은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요한의 책망을 받은 무리가 마음이 찔려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에 대해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와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세리직을 그만 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부정한 사람들로 간주했지만 요한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의를 행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처한 곳에서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물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이에 대해 요한은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좋은 열매란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도 신자 수가 많아지다 보니 좋지 않은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각자가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 좋은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의와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함과 사랑은 각자가 처한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맺혀져야 할 회개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뜻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정결케 하고 그를 거듭나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불은 심판과 함께 정화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38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행하게 될 때 우리의 삶에서 죄가 승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령과 함께, 성령을 따라, 성령에 의해 죄를 죽이는 실천을 계속할 때 그릇된 욕심, 과도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를 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생각이 성결해 집니다. 이런 생활을 계속할 때 열매가 익어가듯이 그리스도의 성품이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둘째, 세례 받으신 예수님(21-22). 21,22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죄인 중 하나 같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기 위해서 죄인 중 하나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요한의 사역을 이어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과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상징합니다. 그는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세상 죄에 대한 형벌을 짊어지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곧 계시나 말씀을 주시려고 한다는 상황적 암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랜 침묵의 기간을 깨시고 다시금 그의 능력과 권위를 행사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울러 이는 예수께서 본래 하늘에 계시던 분이며(요 3:13)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의미합니다.
이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비둘기는 온유하고 평화스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셨습니다. 그는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 때 죄의 세력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은 사람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잘 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기뻐하심을 입으신 예수님은 이 사실을 사역 기간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는 순간 까지도 간직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라는 이 확신이야말로 그가 어려움들을 감당해 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자 힘을 쓰셨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원동력이요 사역을 감당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십자가를 지고자 결심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어느 마을에 소문이 돌았습니다. ‘건너 마을에 기도하는 제목마다 모두 응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응답되는 기도가 없어 심사가 불편한 한 노인에겐 듣는 즉시 심기가 불편한 얘기였습니다. 노인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다니…’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난 노인이 건너 마을 초입에 들어섰을 때 마침 밭일을 하는 초로의 노인을 만났습니다. 지체 없이 던진 질문. “여보쇼 노인장, 그 말이 진짜요? 이 마을에서는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된다면서요? 그렇다면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는 애긴데… 허풍이죠?” 그 말을 받은 초로의 노인은 이미 비슷한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아본 적이 있는 것처럼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기적이 일어나다마다요. 당신네 마을에서는 당신들의 요구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걸 기적이라고 하죠? 우리 마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의 기도제목이 응답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는 것보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적이 더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 나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매순간 순종하여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매 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심으로 이루셨습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은 신자들의 삶이 되어야 마땅한 줄 압니다. 주의 뜻이 나의 뜻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누가복음 3:1-38 요절 누가복음 3:21
세례 받으신 예수님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죄사함을 얻기 위한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우리가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세례 요한의 사역(1-20): 세례 요한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 시대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1,2절을 보면 로마 제국은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째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헤롯 대왕이 죽고 나서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빈들은 조용합니다. 대개 수도사들이 빈 들에 거하면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빈들은 사막과 비슷한 광야입니다. 그곳에서 밤하늘을 보면 하늘이 나와 가장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독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입니다. 세례 요한이 속해 있던 엣세네파는 빈들에서 엄격한 영적인 훈련을 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기도에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의 왕궁이나 성전에 임하지 않고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을까요? 왕궁에 있는 권세자들이나 성전에 있는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부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시할 정도로 교만했습니다. 어떤 분의 표현에 의하면 그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의 말을 20년 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의 말도 듣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겠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받지 않으면 능글능글맞게 변합니다. 요한은 성령이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말씀을 받지 말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듣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목적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사람들이 주의 길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짐으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산 같이 교만한 마음이 깎여서 낮아지고, 움푹 패인 인생의 상처가 메워지고, 구불구불 비뚤어진 마음이 바로 잡혀야 합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했다고 외쳤습니다(사 59:1-2). 그렇다면 주의 오심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기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 중심에 잡힌 것입니다. 헬라 문화에서 죄는 ‘표적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즉 과녁의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무엇을 했는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가’과 관련된 것입니다. 내 마음의 왕좌에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앉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다스려 주시도록 자기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운선순위가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는 인격의 삼요소인 지정의가 다 동원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하고 그 죄로 인해 애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돌이키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죄를 버릴 때 예수님께서 가져가 버리십니다. 그런데 때로 쓰레기를 버렸는데 ‘거부’라는 글씨를 볼 때가 있습니다. 이는 법에 정한 규격 봉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데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거나, 후회 하는데 그치면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신의 이름으로 회개해도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를 고백해야 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멸시하는 것은 죄입니다. 자기를 멸시하는 죄는 창조의 선함을 부정하고 자신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죄를 죽이기 위해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만, 자기를 멸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기부정은 창조의 선함을 확증하고 우리가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고 그 가치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자기 부정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있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자기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합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자기를 멸시하면 치료를 받고자 하나님께 나아온 사람이 그 앞에서 더욱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죄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깊이 받고 말씀에 비추어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 말씀에 기초한 인생 소감을 쓰도록 돕습니다.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온 무리들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회개하도록 어떻게 도왔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은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란 사단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메시아를 적대하는 자들에 대한 표현입니다(시91:13). 독사는 자기의 모습을 주변 상황에 맞게 잘 위장합니다. 그리고 독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기는 했지만 진실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회개한다고 말은 했지만 행동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와 세속적인 명예심 등, 부패한 마음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그 마음을 찔러 쪼갰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자부심은 강했지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신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뜻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격적인 변화, 곧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야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모든 면에서 그를 닮아갑니다. 만약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인은 도끼로 그 나무를 찍어 불에 던져 넣습니다. 쓸모없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루살렘에 닥칠 앞날의 운명을 감지하고 이런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죄의 개념은 물론이고 죄에 대한 고발도 점차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시대 사람들에게 더 이상 간음이란 게 없습니다. 다만 ‘이룰 수 없는 사랑’일뿐입니다. 또 기업체 간부들의 기업비리가 들통이 나도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재수가 없어서 걸렸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죄라도 간과하거나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거룩의 수준을 낮추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북한이라는 도끼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이 도끼를 들어 찍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할 좋은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요한의 책망을 받은 무리가 마음이 찔려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에 대해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와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세리직을 그만 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부정한 사람들로 간주했지만 요한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의를 행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처한 곳에서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물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이에 대해 요한은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좋은 열매란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도 신자 수가 많아지다 보니 좋지 않은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각자가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 좋은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의와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함과 사랑은 각자가 처한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맺혀져야 할 회개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뜻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정결케 하고 그를 거듭나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불은 심판과 함께 정화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38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행하게 될 때 우리의 삶에서 죄가 승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령과 함께, 성령을 따라, 성령에 의해 죄를 죽이는 실천을 계속할 때 그릇된 욕심, 과도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를 약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생각이 성결해 집니다. 이런 생활을 계속할 때 열매가 익어가듯이 그리스도의 성품이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둘째, 세례 받으신 예수님(21-22). 21,22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죄인 중 하나 같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기 위해서 죄인 중 하나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요한의 사역을 이어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과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상징합니다. 그는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세상 죄에 대한 형벌을 짊어지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곧 계시나 말씀을 주시려고 한다는 상황적 암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랜 침묵의 기간을 깨시고 다시금 그의 능력과 권위를 행사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울러 이는 예수께서 본래 하늘에 계시던 분이며(요 3:13)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의미합니다.
이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비둘기는 온유하고 평화스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셨습니다. 그는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 때 죄의 세력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은 사람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잘 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기뻐하심을 입으신 예수님은 이 사실을 사역 기간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는 순간 까지도 간직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라는 이 확신이야말로 그가 어려움들을 감당해 내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자 힘을 쓰셨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원동력이요 사역을 감당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십자가를 지고자 결심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어느 마을에 소문이 돌았습니다. ‘건너 마을에 기도하는 제목마다 모두 응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응답되는 기도가 없어 심사가 불편한 한 노인에겐 듣는 즉시 심기가 불편한 얘기였습니다. 노인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다니…’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난 노인이 건너 마을 초입에 들어섰을 때 마침 밭일을 하는 초로의 노인을 만났습니다. 지체 없이 던진 질문. “여보쇼 노인장, 그 말이 진짜요? 이 마을에서는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된다면서요? 그렇다면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는 애긴데… 허풍이죠?” 그 말을 받은 초로의 노인은 이미 비슷한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아본 적이 있는 것처럼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기적이 일어나다마다요. 당신네 마을에서는 당신들의 요구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걸 기적이라고 하죠? 우리 마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의 기도제목이 응답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는 것보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적이 더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 나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매순간 순종하여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매 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심으로 이루셨습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은 신자들의 삶이 되어야 마땅한 줄 압니다. 주의 뜻이 나의 뜻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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