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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30강(13:10-3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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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56회 작성일 11-10-23 15:40

본문

2011년 누가복음 제30강                                                       
본문 누가복음 13:10 - 35
요절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홍대 정문은 동양에서 가장 큰 정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자유롭게 들어갑니다. 그러나 홍익대 학생이 되는 문은 좁습니다.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 탄생 교회가 있습니다. 말구유 광장을 지나 교회 입구에 도달하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의 높이가 1m 20Cm, 폭이 80Cm 밖에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이 교회로 들어가려면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본래 건축 당시는 높은 문이었으나 정복자들이 말을 타고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문을 좁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군왕과 황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땅에 오기 위해서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기형성 척추염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고통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습니다. 일도 오래 할 수 없습니다. 귀신이 들려서 앓고 있는 것도 괴로운데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는 보기에도 좋지 않았습니다. 걷는 모양도 좋지 않았습니다. 키도 작아지고 아름다운 하늘보다 땅만 보고 다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말씀하시고 안수하셨습니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자는 자신감이 생기고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오랜 세월을 꼬부라져서 살아온 인생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힘든 삶의 무게, 죄의 짐, 낮은 자존감, 질병, 아픔과 상처 등으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귀신이 떠나가고 죄 사함을 받고 상처가 아물어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는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보고 분을 냈습니다. 그리고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굳어서 여인의 처지를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회당장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그들은 안식일에라도 소나 나귀가 외양간에 매어 있는 것을 보면 풀어내어 끌고 가서 물을 먹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이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상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려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소나 나귀보다 무가치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의 자매라는 것입니다. 회당장은 율법이라는 허울 좋은 종교적 겉치레 때문에 사랑이 메말라 있었습니다. 율법을 알고 가르치는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라 생각하면서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은 쓰레기 취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책망하시고 진리를 말씀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결박에서 우리를 풀어주십니다. 사탄의 결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악한 습관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오랫동안 매어 살던 미신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염려와 두려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위선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을 때 사탄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하나님 나라 비유를 겨자 씨와 누룩의 힘을 빌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을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여 있던 데서 풀어주시고 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사탄에게서 풀려난 사건은 곧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된 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대단하고 야단스럽게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이 치유되는 것처럼 조용하게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힘있게 건설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18,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입니다. 볼펜으로 콕 찍은 점의 크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라면 5m 높이가 됩니다. 그 위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작게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떨어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세계 30억 명 이상이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홍익대학에서도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1:1 역사, 소망 없어 보이는 한 영혼을 돕는 일이 바로 하나님 역사입니다. 큰 행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사랑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누룩은 어떠합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누룩은 작은 밀을 굵게 갈아 반죽하여서 띄운 것으로, 빵을 만들 때 반죽한 가루 속에 넣어 부풀게 하는 발효소입니다. 이것은 술의 원료로도 씁니다. 성서 시대의 효모(yeast)는, 잘 발효한 묵은 가루 반죽 한 덩어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잘 시큼하게 되는 맛 위에 냄새 고약한 빵을 만들게 되므로, 오늘에 있어서는 이스트(yeast 효모)를 씁니다. 한 덩이 누룩이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 말씀의 역사요 사랑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와 교회에서 누룩과 같이 되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훈련을 받고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복음이 기적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여쭈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 사람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구원을 받았을까? 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을까? 등등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명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만큼 자기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한 관심보다 스스로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그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 받는 사람이 적은 지 많은 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주지 않으시고 진정 그가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답해 주십니다.

  2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좁은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서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죄짐을 버리고 들어가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동사로서 현재 명령형입니다. 원어로 힘쓰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적과 다투다, 위험에 대해 투쟁한다는 뜻입니다. 고대의 경기장이나 투기장에서 격렬하게 힘써서 시합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죽을 힘을 다해 투쟁하고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구원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단어가 현재형으로 나타난 것은 신앙생활의 현재적 의미에 가치를 두는 것으로, 기도 생활, 경건 생활, 믿음 생활에 적극 노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고 이제는 쉬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판단하십니다. 판단자이신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값싼 은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정말 소중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가치를 두고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종교생활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 생활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편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따르는 생활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생명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또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들어가도록 초청하고 이 일을 위해 헌신하는 생활입니다.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만 이 길은 힘들어서 사람들을 이리로 초청하지 못하겠다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이해가 되지만 그렇게 해서는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될 뿐입니다. 자기는 구원을 받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지옥에 있다면 그것이 잘하는 일입니까? 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넓은 길로 들어가도록 초청하는 것은 쉽습니다. 누구든지 그리고 들어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은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고 또 현재 즐기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인기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돕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애써야 합니다.

  세상에서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도 좁은 문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노는 것을 절제하고 전력투구합니다. 때로는 잠을 줄이면서 투쟁합니다. 세상에서 썩어질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도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는데 영생을 얻기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나중에 들어가기를 구해도 얻지 못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나중으로 미루다가 기회를 놓칩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구원의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닫힙니다. 집 주인이 나를 보고 들어가도 좋아, 됐어 해야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들어가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한 번 닫은 후에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말하는데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주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경도 공부하고 교회에도 다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교회에 와서 먹고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안다고 표현한 말씀은 경험하여 안다, 사귀어 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기보다는 일방적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대화가 없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소홀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마음을 배우지 않습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주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아는 데서 자라가야 합니다. 전적인 헌신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런 헌신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의 관계성이 맺히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을 화합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능력이 생겨야 순종도 할 수 있습니다. 순종해야 체험도 깊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안에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고 주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헌신합니다. 주님을 아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에 허기진 사람과 같아서 끊임없이 말씀을 사모하고 그 사랑을 사모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선한 일을 사모합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난과 죽음이 와도 그들이 받은 사명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작은 사랑을 버리고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 사람은 성경을 공부하고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행악하는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자기중심적으로 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행악하는 모든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떠납니다. 불신앙의 결과는 주님과 완전한 분리를 선고받습니다. 결국 이들은 엄중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예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동서남북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빈부귀천, 인종,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꼭 들어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 와 있지 라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중국 사람들이 많이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겸손하게 소원을 가지고 찾는 자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주님은 먼저 된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나중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현재 힘써야 합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우리는 넓은 문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 탄생 교회의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11개의 돌기둥이 4줄로 들어선 궁전과 같은 형태의 예배실이 나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면서 이 땅에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 앞에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편한 대로 살기보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 혼자 들어가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돕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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