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27강(12:1-21)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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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27강
본문 누가복음 12:1 - 21
요절 누가복음 12:15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우리는 행복 즉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서 살고자 합니다. 그러면 어디서 생명의 풍성함이 나오는 것일까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들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 외식하게 됩니다. 소유를 많게 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생명의 넉넉함을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생명의 풍성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외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세상의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십니다. 탐심을 물리치고 자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한 삶을 위해서 자신을 드릴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진정으로 생명의 넉넉함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외식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제자들도 주가가 높아졌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보좌하는 사람들로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이 커질수록 제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도 커졌습니다. 자연히 제자들도 말과 행동에 무게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 때 이들을 섬기는 일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때에 먼저 제자들에게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무리들보다 제자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이 많아지다 보니 문제도 많아지고 좋지 않은 소식도 많이 들려옵니다.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신자들이 많아져서 언론매체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려면 더 인격적인 제자 양육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만 명이 몰려 들 때에 제자들에게 집중하심으로 튼튼한 공동체를 세우기에 힘을 쓰셨습니다. 우리가 좀 힘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대일을 통한 제자 양성에 힘씀으로써 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지만 먼저 제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제자들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들으려고 외식하기 쉽습니다. 외식은 배우와 같이 꾸민다는 뜻입니다. 누룩은 밀가루를 부풀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룩은 적지만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만드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누룩은 한번 물들면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바람이 들어가면 내용도 없으면서 무엇이나 된 사람인 양 외식하기 쉽습니다. 경건의 능력도 없으면서 경건의 모양만 내기 쉽습니다. 100년 이상된 기업의 특징은 품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제자는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실천을 할 때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도 교회에 오면 다 성자가 되는데 나가면 세상 사람과 같이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래야 세상 살기가 더 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글과 언어는 복음적인데 행동이 변화되지 않은 모습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우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친구가 없으십니까? 예수님은 내 친구가 되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주님은 내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주님과 친구 관계를 더 긴밀히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인해 외로우십니까? 주님은 나의 친구가 되십니다. 제자들이 외식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할 자는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제자들은 좀 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힐난하고 그를 잡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이 받을 핍박이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축복하는 말씀을 전하면 듣기 좋아하지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고 바른 말을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도록 하려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절망해야 합니다. 처절한 자기 인식이 있어야 복음을 통한 구원을 영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삶을 힘쓰지 않으면 금방 안일해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살면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주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내 삶을 살려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풍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진정 의미와 만족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풍성한 삶을 살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심을 알아야 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참새는 무가치하게 여기는 새입니다. 독수리 같은 새는 각 나라에서 문장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참새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29절에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두 앗사리온에 네 마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 더 얹어서 다섯 마리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 만큼 하찮은 것이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들의 계산으로는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더 얹어 준 그 참새까지도 잊어버린바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한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심히 기뻐하십니다. 나를 예수님이 피를 흘린 대가로 사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의 머리털 수까지 아시는 분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사정을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사정을 아십니다. 나의 탄식을 아십니다. 나의 한숨 소리와 고민을 아십니다. 나의 염려를 아십니다. 내 마음의 응어리를 아십니다. 상처를 아십니다. 주님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 두려움을 주님께 아뢰십시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서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으로 인해서 핍박을 받을 때 다가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그를 부인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한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특히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고 죽이려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인정하고 증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할 때 타협하기 쉽습니다. 이란에서 유세프 나다르카니 목사는 지난 해 11월 개종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모슬렘 국가에서 개종을 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번 주 열린 세 차례 공판에서 나다르카니 목사는 “신앙과 기독교에 대한 내 마음은 확고하며 이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음 달 5일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란 당국이 그의 사형 결정을 철회하도록 촉구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합니다(10).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법정에 세우고 심문할 때에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우리에게 가르치시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핍박을 받을 때에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고 해서 그들에게 해야 할 말을 준비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할까 너무 염려하다보면 올무에 걸리기 쉽습니다. 자기 꾀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그가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인도하십니다. 이는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에 때로는 도망도 가야하고 변증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가 핍박을 받고 천국에 가기를 원하신다면 깨끗하게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이 세상에 허락하신 기간 동안 마음을 다해서 말씀을 전파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 때 우리는 하루 하루를 허투루 살 수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하루 하루를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형을 명하여 유산을 자신과 나누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신명기에는 장자는 두 몫, 차자는 한 몫을 갖게 명하셨습니다. 유산이 많은 집안에는 대부분 조금 더 많은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합니다. 형제애보다 돈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재산 분배를 중재해 달라는 청년에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의 도움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1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인간의 행복은 많은 부를 소유한데서 오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탐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모든 탐심에는 물질에 대한 탐심, 먹는 것에 대한 식탐, 자는 것에 대한 욕심, 안일에 대한 탐심, 정욕에 대한 탐심, 미에 대한 탐심, 사람들의 인정에 대한 욕심도 있습니다. 잠을 많이 자면 만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 도적 같이 옵니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도 끝이 없습니다. 오래 사는 사람들은 매우 적게 먹습니다. 세상 정보에 대한 탐심도 있습니다. 많은 정보를 알면 자신의 삶을 잘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보를 아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의 영혼이 만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해야 합니다.
빠뜻한 생활비를 쪼개 불우 어린이를 후원해 오다 교통사고로 숨진 중국음식점 배달원 김우수씨는 어린이 후원을 시작한 이후 5년 동안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같은 돈이지만 생명을 살리는 돈이 있습니다. 같은 천원이지만 십 만원 같이 값진 돈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값어치가 달라집니다.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지만 잘 쓰는 것은 예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풍년이 들어 창고에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의 말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주어가 나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오늘날도 손대는 일마다 대박이 터져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돈을 모아서 해외로 여행을 떠나고 골프를 치고 좋은 차와 좋은 아파트를 구입하고 마음에 맞는 배우자를 만나서 살면 행복하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성취를 위해서 일하고 또 일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서 성취감을 맛보면서 원하는 대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잠언 23:5절에 보면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수리처럼 날아갈 수 있는 돈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세상에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는 말씀을 볼 때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시간의 청지기입니다. 재산의 청지기입니다. 내가 수고하고 알뜰하게 모아 놓았다고 그 재산이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놓으신 것입니다. 나의 건강과 시간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청지기로서 내가 관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다가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면 오늘 밤이라도 내 놓아야 합니다.
생명의 부요함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한 수고가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생명까지 드린 순교자들, 일생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타국에 나가 헌신하는 선교사들, 복음 전도와 제자 양성에 헌신하는 청년 사역자들의 수고를 주님은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냉수 한 컵 대접한 것까지도 다 기억하시고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청춘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드린 종들의 수고를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시간을 드리고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드린 헌신을 주님은 넘치게 보상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나의 소유를 이 세상에 쌓아 두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은사와 정열과 돈을 주님과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쓰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행복을 누릴 때는 언제입니까? 또 어디서 행복을 찾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캠퍼스 복음 운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제자로 키우는 삶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며 물질을 사용하는 여러분을 주님께서 넘치게 축복해 주시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12:1 - 21
요절 누가복음 12:15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우리는 행복 즉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서 살고자 합니다. 그러면 어디서 생명의 풍성함이 나오는 것일까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들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 외식하게 됩니다. 소유를 많게 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생명의 넉넉함을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생명의 풍성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외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세상의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십니다. 탐심을 물리치고 자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한 삶을 위해서 자신을 드릴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진정으로 생명의 넉넉함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외식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제자들도 주가가 높아졌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보좌하는 사람들로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이 커질수록 제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도 커졌습니다. 자연히 제자들도 말과 행동에 무게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 때 이들을 섬기는 일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때에 먼저 제자들에게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무리들보다 제자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이 많아지다 보니 문제도 많아지고 좋지 않은 소식도 많이 들려옵니다.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신자들이 많아져서 언론매체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려면 더 인격적인 제자 양육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만 명이 몰려 들 때에 제자들에게 집중하심으로 튼튼한 공동체를 세우기에 힘을 쓰셨습니다. 우리가 좀 힘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대일을 통한 제자 양성에 힘씀으로써 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지만 먼저 제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제자들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들으려고 외식하기 쉽습니다. 외식은 배우와 같이 꾸민다는 뜻입니다. 누룩은 밀가루를 부풀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룩은 적지만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만드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누룩은 한번 물들면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바람이 들어가면 내용도 없으면서 무엇이나 된 사람인 양 외식하기 쉽습니다. 경건의 능력도 없으면서 경건의 모양만 내기 쉽습니다. 100년 이상된 기업의 특징은 품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제자는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실천을 할 때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도 교회에 오면 다 성자가 되는데 나가면 세상 사람과 같이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래야 세상 살기가 더 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글과 언어는 복음적인데 행동이 변화되지 않은 모습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우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친구가 없으십니까? 예수님은 내 친구가 되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주님은 내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주님과 친구 관계를 더 긴밀히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인해 외로우십니까? 주님은 나의 친구가 되십니다. 제자들이 외식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할 자는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제자들은 좀 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힐난하고 그를 잡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이 받을 핍박이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축복하는 말씀을 전하면 듣기 좋아하지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고 바른 말을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도록 하려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절망해야 합니다. 처절한 자기 인식이 있어야 복음을 통한 구원을 영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삶을 힘쓰지 않으면 금방 안일해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살면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주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내 삶을 살려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풍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진정 의미와 만족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풍성한 삶을 살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심을 알아야 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참새는 무가치하게 여기는 새입니다. 독수리 같은 새는 각 나라에서 문장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참새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29절에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두 앗사리온에 네 마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 더 얹어서 다섯 마리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 만큼 하찮은 것이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들의 계산으로는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더 얹어 준 그 참새까지도 잊어버린바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한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심히 기뻐하십니다. 나를 예수님이 피를 흘린 대가로 사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의 머리털 수까지 아시는 분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사정을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사정을 아십니다. 나의 탄식을 아십니다. 나의 한숨 소리와 고민을 아십니다. 나의 염려를 아십니다. 내 마음의 응어리를 아십니다. 상처를 아십니다. 주님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 두려움을 주님께 아뢰십시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서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으로 인해서 핍박을 받을 때 다가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그를 부인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한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특히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고 죽이려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인정하고 증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할 때 타협하기 쉽습니다. 이란에서 유세프 나다르카니 목사는 지난 해 11월 개종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모슬렘 국가에서 개종을 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번 주 열린 세 차례 공판에서 나다르카니 목사는 “신앙과 기독교에 대한 내 마음은 확고하며 이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음 달 5일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란 당국이 그의 사형 결정을 철회하도록 촉구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합니다(10).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법정에 세우고 심문할 때에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우리에게 가르치시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핍박을 받을 때에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고 해서 그들에게 해야 할 말을 준비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할까 너무 염려하다보면 올무에 걸리기 쉽습니다. 자기 꾀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그가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인도하십니다. 이는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을 때에 때로는 도망도 가야하고 변증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가 핍박을 받고 천국에 가기를 원하신다면 깨끗하게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이 세상에 허락하신 기간 동안 마음을 다해서 말씀을 전파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 때 우리는 하루 하루를 허투루 살 수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하루 하루를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형을 명하여 유산을 자신과 나누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신명기에는 장자는 두 몫, 차자는 한 몫을 갖게 명하셨습니다. 유산이 많은 집안에는 대부분 조금 더 많은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합니다. 형제애보다 돈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재산 분배를 중재해 달라는 청년에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의 도움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1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인간의 행복은 많은 부를 소유한데서 오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탐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모든 탐심에는 물질에 대한 탐심, 먹는 것에 대한 식탐, 자는 것에 대한 욕심, 안일에 대한 탐심, 정욕에 대한 탐심, 미에 대한 탐심, 사람들의 인정에 대한 욕심도 있습니다. 잠을 많이 자면 만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 도적 같이 옵니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도 끝이 없습니다. 오래 사는 사람들은 매우 적게 먹습니다. 세상 정보에 대한 탐심도 있습니다. 많은 정보를 알면 자신의 삶을 잘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보를 아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의 영혼이 만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해야 합니다.
빠뜻한 생활비를 쪼개 불우 어린이를 후원해 오다 교통사고로 숨진 중국음식점 배달원 김우수씨는 어린이 후원을 시작한 이후 5년 동안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같은 돈이지만 생명을 살리는 돈이 있습니다. 같은 천원이지만 십 만원 같이 값진 돈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값어치가 달라집니다.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지만 잘 쓰는 것은 예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풍년이 들어 창고에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의 말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주어가 나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오늘날도 손대는 일마다 대박이 터져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돈을 모아서 해외로 여행을 떠나고 골프를 치고 좋은 차와 좋은 아파트를 구입하고 마음에 맞는 배우자를 만나서 살면 행복하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성취를 위해서 일하고 또 일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서 성취감을 맛보면서 원하는 대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잠언 23:5절에 보면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수리처럼 날아갈 수 있는 돈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세상에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는 말씀을 볼 때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시간의 청지기입니다. 재산의 청지기입니다. 내가 수고하고 알뜰하게 모아 놓았다고 그 재산이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놓으신 것입니다. 나의 건강과 시간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청지기로서 내가 관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다가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면 오늘 밤이라도 내 놓아야 합니다.
생명의 부요함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한 수고가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생명까지 드린 순교자들, 일생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타국에 나가 헌신하는 선교사들, 복음 전도와 제자 양성에 헌신하는 청년 사역자들의 수고를 주님은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냉수 한 컵 대접한 것까지도 다 기억하시고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청춘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드린 종들의 수고를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시간을 드리고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드린 헌신을 주님은 넘치게 보상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나의 소유를 이 세상에 쌓아 두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은사와 정열과 돈을 주님과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쓰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행복을 누릴 때는 언제입니까? 또 어디서 행복을 찾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캠퍼스 복음 운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제자로 키우는 삶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며 물질을 사용하는 여러분을 주님께서 넘치게 축복해 주시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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