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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23강(10:25-42) 너도 이와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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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237회 작성일 11-09-04 15:47

본문

2011년 누가복음 제23강                                                               
본문 누가복음 10:25 - 42
요절 누가복음 10:37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오늘 영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율법을 행할 때 얻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구하는 율법사에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신의 대답에 스스로 빠져 버렸음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행위에 의한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는 율법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에 본질에 대해서는 실로 무지하였습니다.
  2 라운드에서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참된 이웃이 누구인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천금의 무게를 가진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이 영생을 얻는 것인데 영생이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율법교사로서 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뜨고는 있지만 증이 없는 예수님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을 받도록 하고 영원한 새 생명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생은 죄와 멸망에서 구원을 얻은 새 생명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이라 함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로마서 6:2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즉 영생이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율법사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대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50%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 질문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더 배우기 위해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율법을 계속해서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고 할 때 얼마나 피곤하고 힘겹겠습니까?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율법을 항상 다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도 하고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고자 하는 소원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유를 갖고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것은 “너는 율법을 현재 어떻게 적용하느냐”라는 반문입니다. 당시 율법사들은 율법을 타인에게만 적용시켰을 뿐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율법사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십계명을 함축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크게 하나님께 대한 부분과 사람에 대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단언하건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행해보려고 하다가 깊이 절망했습니다. 이런 절망감 때문에 구원자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굳이 그리스도가 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이 율법사는 이 말씀을 굳게 믿고 율법을 행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시도는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나름대로 이를 잘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착각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영적인 눈을 뜨기 전까지는 자신이 율법을 흠 없이 행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나에게 진정 영생이 있는가?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종교의 본질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가 생각한 이웃은 자기 아내나 가족, 친척, 동족 등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을 같은 민족이나 같은 종교적 공동체로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평민들을 이웃에서 배제시켰습니다. 쿰란 공동체에서 어둠의 아들들은 이웃에 들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율법사에게 사마리아인과 타국인들은 이웃에서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무시하고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었습니다. 서로 원수와 같이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비유를 들어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미터, 여리고는 해면에서 250미터가 낮은 곳이라 거의 1킬로미터 높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가 30킬로미터인데, 내려오는 길에 수많은 굴과 계곡이 있어서 구덩이, 동굴에 강도들이 숨어서 있다가 습격을 했다고 합니다. 이 험한 지형은 5세기까지 ‘피의 길’로 불리웠습니다. 강도들은 한 사람을 습격하여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귀중품,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피하여 지나갔다는 말은 강도 만난 자를 피하여 반대편의 길로 돌아갔음을 의미합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무시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여행하는 중에 강도 만난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처지를 누구보다 더 잘 이해했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요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희생하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다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맸습니다. 기름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포도주는 방부제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강도 만난 자를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부탁을 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세요.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겠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숙박비는 하루에 한 데나리온의 1/12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므로 이는 24일의 숙박비에 해당이 됩니다. 그는 희생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영생을 얻는 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돌보는 데서 옵니다. 이렇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이 영생을 얻습니다. 율법사는 “누가 내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누가 그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다시 물으십니다. 이것은 결국 이웃이 정해지면 그를 사랑하겠다는 율법사의 생각을 모든 사람에게 자신은 이웃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이웃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감싸 안고 치료해 주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자는 자신이 또 다른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한 이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가가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특징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타나야 할 마음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주변에 찢기고 강도 맞고 상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전 중국대사요 통일부 장관이었던 김하중대사는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중국에 있으면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2004년 겨울에 그는 당시 61세였던 이영희(가명)라는 한국 여성이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중국에 가서 중국인들의 밀출국을 알선한 혐의로 1998년 6월에 체포되어 2001년에 징역 12년의 형을 받고 수감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편지에 “저는 감옥에서 빨리 나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믿는 대사님께서 저를 이곳에서 내보내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이 편지를 드립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김하중 대사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주위에서 이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는 1차, 2차 특별대책반을 가동해서 중국 외교부, 사법부, 최고인민법원 등에 수감자의 조기 석방을 요청하는 공한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계속 기도하면서 중국 사법부장을 면담했고 결국 2006년 11월 20일 이영희 씨는 가석방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그녀가 8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니 돈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구체적인 금액을 하나님께 말씀드렸더니 “더 주라”고 했습니다. “그럼 두 배로 주겠습니다.” “좀 더 주어라.” “그럼 네 배로 주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했습니다. 나중에 서울에 갔던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오랫동안 중국에서 복역해서 가족도 찾을 수 없고 집이 없어서 막막했는데 대사님이 주신 돈으로 작은 셋방을 얻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남은 평생 그를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김하중 대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강도당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도를 만나서 고통하고 있습니까? 영혼의 강도인 사탄으로 인해서 상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짓고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명을 잃고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죽음과 같은 해산의 고통을 당합니다. 사람은 결국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라는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허무와 무의미로 인해서 인생을 살지만 거반 죽은 사람과 같이 됩니다. 죄책감과 허무의식으로 무기력해서 씻지도 않고 먹지도 못하고 죽은 자와 같이 누워 지냅니다. 진화론을 배우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세상 일락을 좇아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못된 사람을 만나서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을 치료하고 돌보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기회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영적으로 강도 맞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죄와 사탄의 공격으로 마음이 강도 맞은 사람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돌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에베소서 2:8-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선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실천이 선한 행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지 사랑의 실천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믿음과 사랑의 실천은 영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사 나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으로 우리의 허물이 아물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상처가 싸매지며 나음을 받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물 붓듯이 부어졌습니다. 무정한 사람이 긍휼의 사람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적인 사람으로, 포악한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받아서 강도 맞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종의 벽을 넘어서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식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지식에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바른 믿음은 행함이 따릅니다. 건전한 믿음이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를 아는 데서 자라가야 합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사랑이 증가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가 현재적으로 영생을 누리려면 아는데 그치지 말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사랑을 실천할 때 영생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낍니다. 만족을 느낍니다. 자신만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담대해집니다. 우리는 함께 여러 모양으로 사랑의 수고를 하고 짐을 나누어지는 가운데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길 갈 때에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와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참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탁을 하는 마르다의 마음은 자기 의와 마리아에 대한 판단으로 속이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는 자신을 칭찬해 주시면서 마리아에게 가서 언니 마르다를 도우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대했습니다. 마르다는 사랑의 수고를 하는데 기쁨이 없었습니다. 영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마르다의 내면은 율법사와 비슷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수고를 하는데 그것으로 지치고 피곤해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1, 4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마르다가 많은 일로 염려하기보다 한 가지만이라도 좋다고 하십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심으로 많은 반찬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수고하면서 예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밥과 김치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앞 사건과 이 사건은 모순이라기보다는 보완적입니다. 마르다의 사랑의 실천도 중요하고 마리아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한데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많은 일로 근심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마음을 다해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느끼는 것은 먼저 그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데 자기 의가 생기면 생겼던 기쁨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렇다고 영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영생은 있지만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내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의 수고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이런 영적인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자기 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이런 자세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영생은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서 풍성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는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많은 말을 하기보다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영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형제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는 것도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소통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다음 주에는 기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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