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22강(9:51-10:24)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305회 작성일 11-08-28 15:22

본문

2011년 누가복음 제22강                     
본문 누가복음 9:51 - 10:24
요절 누가복음 10:20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번 주부터 가을 학기가 시작됩니다. 새 학기에 우리의 마음도 새롭게 되어 주님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 기뻐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성취한 결과로 인해서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해서 양을 얻으면 기쁩니다. 제자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기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진정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나를 따르라(9:51-62) :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많았기 때문에 사자들을 앞서 보내사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받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의도로 사마리아인의 마을에 들어왔지만 유대인들의 악행으로 인해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이를 보고 하늘로부터 불을 명하여 저들을 멸하기를 원하시는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예수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영광을 받으실 그 예수님을 몰라보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분노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이 잠시 후면 그의 좋은 동역자요 제자들이 될 것을 보시고 그들 편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인가 묻는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해 주십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편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서 오셨지 심판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거절한다고 해서 그들과 싸우지 아니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는 일은 유쾌한 일이지만 삶에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의해 거부당해도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스스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자신을 평가하는 가치척도로 삼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파 놓은 함정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의 인격에 대해 그다지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스타일의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가를 알려줄 뿐입니다. 또 지금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다음 순간 마음을 바꾸어 우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단번에 우리의 가치가 추락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당신을 거부하면 그의 행동은 당신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그 사람의 호불호와 기대와 생각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거부는 절대로 당신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견해와 상관없이 늘 똑 같은 사람입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나는 스스로를 좋아할 것입니다. 나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이니까요. 우리가 이런 자세로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이기고 미소로 오늘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좋았든 안 좋았든 어제는 지나가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왔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 그는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줄을 알고 있습니다. 영광을 받으러 가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안정이 없습니다. 그는 일생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앞에는 버림받음과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받아야만 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영광이 있습니다. 이상만 가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제자의 길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러시아 빼롬의 개척자이신 문안드레 선교사님이 말했듯이 물질주의로 찌든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생 주와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온 그에게 자립문제는 아직도 미해결인 채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신령한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부르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는 이명박대통령께서 전화를 걸어서 “나와 함께 일해 보면 어떻겠습니까?”라는 초청을 받은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는 기회를 붙잡을 줄 몰랐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 무엇이 더 중요한지 때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6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이는 문자 그대로 장례식에 가지 말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무엇이 시급하고 중요한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가족을 책임지고 나서, 먼저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먼저 자기 일을 하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려 한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내일하라는 것입니다. 내일이 오면 또 내일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복음을 알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는데 내일 하라는 것입니다.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전파, 복음 전파는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족의 행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행복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없는 인간의 행복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밭을 삐뚤삐뚤하게 갈 것입니다. 또 깊이 있게 밭을 갈 수도 없습니다. 자꾸 자기가 떠나온 세상을 돌아보면 롯의 아내와 같이 세상과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몸은 천성을 향해 가면서 마음은 세상을 돌아본다면 다른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때 계산하는 사람들은 자기 꾀에 빠지게 됩니다. 분위기에 맞추어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꿩 먹고 알 먹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면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제대로 된 포도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칠십인을 세워 보내심(10:1-20) :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셨습니다. 열 두 제자들을 둘씩 전도 여행을 보냈었는데 이제는 이들을 포함해서 칠십 명의 제자들을 다시 전도 여행에 보내셨습니다. 지도자는 혼자서 일하지 않습니다. 동역자들과 함께 일합니다. 우리가 말씀 전파를 혼자서 하고자 한다면 매우 제한적이고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함께 한다면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기도제목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추수할 일꾼 일뿐만 아니라 추수할 일꾼들을 모집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 낳는 제자, 추수꾼을 모집하는 추수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할 일은 많지만 일꾼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수꾼, 전도자들을 꾸준히 길러내야 합니다. 전도자가 전도자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보내주십니다(행 13:48). 이를 믿고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그들을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3). 제자들이 어리지만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제자들이지만 믿음으로 각 지역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리지만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믿음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칠십 인들은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까? 4-6절을 보십시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제자들은 단순하고 청빈한 채비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여행을 오래 하려면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짐이 가벼워야 피곤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평안을 비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문안하지 말고 오직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여행을 나온 목적이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전하고자 캠퍼스에 올라갔다가 밥만 먹고 내려온다든지 한번 둘러보고 오면 힘이 빠집니다. 어찌하든지 한 말씀을 심고 와야 합니다. 한 말씀을 분명하게 전하고 오면 성공하는 전도입니다.
 
  그리고 전도자로서 먹을 것, 잘 곳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전도자를 영접하는 사람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신에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인을 믿고 그곳을 센터로 삼고 주변을 전도해 나가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병자들을 고치고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고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열두 제자도 한 일이고 우리도 해야 할 일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던 데서 이제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삶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이 행복할 것 같지만 이는 끝없는 목마름을 가져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 하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십니다. 물댄 동산의 나무와 같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삶은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거리로 나와서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고 말해야 합니다. 심판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십니다. 13-16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행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과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심판이 무섭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배척하는 사람들은 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처받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을 바로 전하면 됩니다.

  제자들은 나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할 때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제자들은 능력을 행함으로 기뻤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기적은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더 놀라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18,19).”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말씀은 칠십명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동안 귀신의 상전인 사탄이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귀신이 사람들에게서 쫓겨날 때마다 사탄의 힘은 약화됩니다. 그의 나라는 파괴됩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는 확장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사탄의 나라가 흔들립니다. 우리는 원수 사탄의 머리를 밟고 그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결코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더욱 담대하게 권능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20).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것은 업적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 구원 받은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업적과 관계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내가 열매를 취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는 뿌리는 일만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인해 영원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가난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도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공해도 그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기록된 것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며 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8:18).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제자들이 깨닫게 된 것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으셨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과 말씀하신 것들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린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하보다 더 귀한 보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을 누리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바냐 3:17절은 말씀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것이 복입니다. 더 큰 복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영원할 것을 아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우리의 생명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압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즐기는 것보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함께 일하며 고난을 받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사랑하고 이들과 함께 고난을 감당하며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인 줄 믿습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50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588 누가복음 이엘리야 1167 10-30
587 누가복음 이엘리야 1157 10-23
586 누가복음 이엘리야 1078 10-16
585 누가복음 이엘리야 1034 10-09
584 누가복음 이엘리야 1190 10-02
583 누가복음 이엘리야 1187 09-25
582 누가복음 이엘리야 1314 09-18
581 누가복음 이엘리야 1170 09-11
580 누가복음 이엘리야 1237 09-04
열람중 누가복음 이엘리야 1306 08-28
578 누가복음 이엘리야 1212 08-21
577 누가복음 이엘리야 1326 08-14
576 누가복음 이엘리야 1296 08-07
575 특강 Joo James 1579 08-06
574 누가복음 이엘리야 1193 07-24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