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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21강(9:37-50)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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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211회 작성일 11-08-21 15:10

본문

2011년 누가복음 제21강                                             
본문 누가복음 9:37 - 50       
요절 누가복음 9:48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우리는 살면서도 끊임없이 산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위대한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후회없는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 우리는 진정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을 하면서 산다면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가진 우리에게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 오르신 후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이때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도움을 청했습니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38,39).” 가업을 이을 외아들이 귀신에 잡혀서 발작을 하는 모습을 볼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아버지는 많은 시간을 근심과 걱정 속에서 보냈을 것입니다. 이 아이가 나가서 놀다가 길에서 발작을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놀다가 발작을 하여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님은 아이의 장래를 생각할 때 매우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 아이로 인해서 집안은 항상 긴장이 되었습니다. 돈으로는 귀신도 부릴 수 있다지만 그것도 빈말이었습니다. 아이를 고쳐보고자 귀신을 쫓아낸다는 바리새인들에게도 가보고, 어제는 제자들에게도 부탁을 했지만 실패하자 낭패하여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 원망하는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제자들도 별 볼일 없다는 말입니다. 아이가 귀신에 잡혀서 발작을 하다가 몹시 상한 다음에 귀신이 겨우 떠나가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소망이 생겨 이렇게 나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산에 가셨고 제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도움을 바랐는데 제자들은 서로 나서기는 하지만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아버지는 폼만 잡고 실제적인 능력이 없는 제자들을 볼 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아버지의 지적이 제자들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를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려운 양을 돕지 못해서 내게 넘겼는데 나도 마찬가지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기 의가 깨져서 겸손해지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원망하는 아버지의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41절을 보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믿음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불신앙을 뜻합니다. 그리고 ‘패역’하다는 뜻은 진리에서 빗나가고 타락한 그들의 그릇된 삶이 항상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양자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신앙은 증거와 이적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진리를 거부하는 데서 생깁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질책하신 ‘세대’란 문자적으로 혈통, 친족, 동시대인들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책망을 받는 대상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아이의 아버지, 서기관들,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홉 제자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한 책망의 대상은 아홉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한 실망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고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제자들이지만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많이 공부하고 많은 간증을 듣고 보았으면서도 믿음이 자라지 않는 이들을 보면 답답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조금만 힘들면 잠수해 버리는 이들을 볼 때 많은 인내가 요구됩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서 오래 참고 연약한 믿음을 받아주고 사랑하고 간절히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양들의 믿음은 목자 마음대로 생기지 않고 자라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 있는 말씀과 기적으로 제자들을 도우셨는데도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더 함께 하고 더 오래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한 형제를 만났는데 그는 한 목자님께 목자님이 기도해서 하나님이 계신지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기적을 보면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기적을 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우리가 하루 하루 건강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또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보면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귀신들려 고통하던 아버지가 바라던 것들은 자신의 아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상적인 삶, 기적적인 삶을 매일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 질병에 대해서, 불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정말 시시한 일로부터 문제가 생기고 불거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작은 문제들을 잘 극복하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어떻게 낫게 하십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귀신은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 대한 불신을 사람들에게 심고자 했습니다. 귀신은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의 장난에 꿈쩍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와 위엄으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이 더러운 귀신아 그 아이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떠나가고 아이는 온전해졌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뚱맞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44).”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고 나서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도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산에서 내려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후에 또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게 될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 세대의 불신과 패역함을 고치십니다. 불신이 충만한 환경에서는 귀신이 운동장에서 뛰놀듯이 자유롭게 활동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귀신에 농락당하기가 쉽습니다. 악인은 진리를 거짓이라, 거짓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고 합니다. 귀신은 이런 패역한 사람들을 가지고 놉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파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상한 마음, 죄로 인한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피 앞에 무장해제를 당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우리는 사탄과 귀신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되자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모든 비밀을 깨닫고 담대한 복음의 증거자들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싸움꾼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복음에는 사탄의 진을 파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둘째, 겸손한 사람.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평소에도 경쟁심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가 가깝고 영광을 받을 때가 다가온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은 분명하고 예루살렘에 가시면 왕으로 등극을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거기에 가기 전에 조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고 세 제자는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홉 제자들과 세 제자들 사이에, 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서열다툼이 생겼습니다. 서로 내가 총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소한도 나는 무슨 자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회를 보아도 자매님들은 사랑을 독점하고자 함으로, 형제들은 정복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소원으로 가득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이유는 인정문제도 있지만 거기에 돈이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는 매우 적고 사람들은 많다보니 사람이 모인 곳에는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성취욕과 안정을 위한 욕망이 이를 더욱 부추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47,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변론에 대해서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방치하지 않으시고 합당한 내면 투쟁의 방향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큰 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린 아이를 영접할 정도로 겸손하고 사랑이 많습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들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많고, 호기심이 충만하고, 활동적입니다. 한편으로 어린 아이들은 미성숙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아이들은 시끄럽습니다. 제 멋대로 입니다. 미국의 한 식당에서는 아이들의 이런 점 때문에 아이들을 출입금지를 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들 가진 부모들에게서 많은 말을 듣고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중요한 모임을 할 때 애들은 가라고 말합니다.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대하면 일반적으로 신경이 많이 쓰이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로 위대한 사람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을 영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영접하려면 마음이 겸손해야 합니다. 또 사랑이 많아야 합니다.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자기를 아이들의 수준으로 낮추어 대화를 하고 그의 부족한 점들을 받아 주어야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린 아이도 성숙해 지고 어른스러워집니다.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은 유익이 별로 없습니다. 잔손이 많이 갑니다. 한마디로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 같은 우리들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를 영접하여 큰 자로 키우십니다. 의학계에서 새로 나온 논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매일 매일 먹는 음식이 유전자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소한 생각이 뇌의 구조를 바꿉니다. 생각 하나하나가 뇌 구조를 쉬지 않고 바꿉니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뇌에 배선을 만듭니다. 같은 생각을 여러 번 반복하면 습관으로 굳어 버립니다. 성격도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뀝니다. 그러니 생각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고 그 상태를 단단히 유지해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뇌구조가 거기에 맞게 변경될 것입니다(윌리엄 제임스 하버드대학 심리학 교수). 우리가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원하는 상태로 뇌를 바꿈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짜증스러운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고, 두려운 일들에 도전하다 보면 자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을 영접하다보면 자신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위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관용의 사람. 49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이 왜 이 문제를 들고 나왔을까요? 요한은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굉장히 편협하고 배타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제자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자 했습니다. 독재자들은 획일화, 동질화를 추구합니다. 그래야 통치하기가 편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틀리다는 생각도 많습니다. 우리가 최고라는 생각도 비슷합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 지도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넓은 마음, 포용성, 관용의 자세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나를 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에너지가 생깁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의 원수라고 생각하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긴장이 되고 불안해집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이 사람은 나를 위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애정이 생기고 다정다감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공하고 타인도 친구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성 속에서 풍성함을 깊이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한 가지 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하고,한 가지 색은 찬란한 빛을 이루지 못하며, 한 가지 맛은 진미(珍味)를 내지 못합니다. 나와 다른 것은 불편함과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로 통일되면 훨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을 잃어버린 생태계는 결국 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협주곡이 듣기 좋은 이유는 여러 악기가 서로 자웅을 겨루면서도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느리고 더디더라도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고 같이 가는 것이 모두가 함께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제자로서 믿음의 사람, 겸손한 사람, 관용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런 마음이 제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기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은 태평양과 같이 넓어서 수많은 인종들이 그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감으로 평범한 가운데서 비범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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