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제 20강(9:18-36) 하나님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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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20강
본문 누가복음 9:18 - 36
요절 누가복음 9:20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맺어질 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또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위엄과 영광이 새겨질 때 기꺼이 그와 함께 고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새롭게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주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무슨 제목으로 기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도록,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전도하시고 또 제자들을 전도자로 세워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과 제자들을 양성하여 사역을 계승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이제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결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자들이 어떻게 알고 있는가, 또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시험을 보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아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있어야 하고 성령의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놓은 첫 번째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혜로운 선생님들은 처음에는 쉬운 문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로 마칩니다. 학생들을 힘들게 하기 위한 시험은 처음부터 어려운 문제를 내서 야코를 죽이고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끝내시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남들 이야기이기에 편안하게 답변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무리는 예수님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단면만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4대 성인군자 중 하나로 봅니다. 인도나 일본과 같은 다신교 사회에서는 예수님을 많은 신들 중의 하나로 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과 피상적인 관계를 맺을 뿐,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맺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파괴하고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구원은 파괴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리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는 주관적인 질문입니다.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묻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자 하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딩동댕. 정답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셨던 대답입니다. 100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어서 대답을 잘 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그 그리스도, 성경에 하나님이 예언하신 그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왕과 선지자, 대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은 구원자, 메시아를 뜻합니다. 왕되신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으로 포로 된 그 백성을 구출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왕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정의와 평화로 통치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을 가르쳐 주시는 선지자이십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인데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를 어두움과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구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거나 고행을 하거나 선행을 하는 등 자력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모든 죄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위해서 필요한 단계는 먼저 자신이 죄인됨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은 죄에 대해서 속수무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제사제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예표하셨습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죄를 사함 받는 길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무한히 악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고 계십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스스로 죄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창3:15절에 처음으로 여자의 후손을 통해 나실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간이 해결 할 수 없는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며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2-14).” 예수님은 자기 피로써 우리를 이기심과 정욕과 미움과 슬픔과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로마서 10:9,10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를 마음으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에 이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고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그는 구원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인 일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메시지가 새롭게 들립니다. 성경이 새로운 책인 것 같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빛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성경책만큼 즐거운 책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와 사람들이 새롭게 보입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딸 이민아 변호사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부모와의 사랑, 한 남자와의 지독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공허했습니다. 늘 외로웠어요. 사랑은 상처가 됐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정체성 위기 속에서 자살충동도 느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났어요. 나를 향한 그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알면서 상처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지금 “땅 끝에 선 아이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겸손과 온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또 많은 분들이 공허하던 마음에 충만함을 느끼고 알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마음에 무거운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느끼던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마음이 가벼워져서 구름 위를 걷는 것과 같이 느낍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매우 사랑스럽게 보이고 원수마저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아는가에 따라서 생과 사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을 알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기를 알게 됩니다. 즉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요 구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경배하고 충성을 다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시는 종이 아닙니다. 내가 종이고 그가 상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이 나의 만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알았다가 그를 만난 후에는 내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나를 다스리시고 내 삶을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일생 동안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많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예수님을 일생 알아가고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자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는 진심어린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단단히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실까요? 이는 아직 하실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셔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 없고, 흠 없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죄악 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입을 다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오해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높이고 그가 대속적인 죽임을 당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지 고난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고난의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후에 일어날 일들을 손바닥을 보듯이 보고 계십니다. 또 그는 이를 위해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또 무리에게 이르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마음이라도 편히 먹고 살고자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삶을 살 때 구원을 받습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삶은 순교자적인 삶입니다. 제자의 실제 삶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때로 제자의 삶이 죽을 맛이 라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렇게 살면 생명이 충만한 삶,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자기가 죽고 생명을 얻는 사람은 천하를 얻은 사람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죽음으로 구원을 완성해가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름으로 영성이 높아져야 합니다.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이 UBF 세계 대표로 취임을 하시면서 제시한 방향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잘 따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뒤에 있는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세 사람이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사실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이 먼저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수제자로 여기시고 이들을 먼저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에 그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로서 빛 자체이신 하늘의 영광으로 충만하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각인되었습니다. 옛날 모세는 시내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과 대화하고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출 34:29-30). 그는 평소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성소에 들어갈 때만 수건을 벗어야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있던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몸 자체가 변화되어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본래 영광스러운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로서 천사들이 입는 옷 색깔입니다. 이는 평화와 순결, 사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천상적인 신분을 말해줍니다. 그 광채는 그 성결함에서 나오는 영광일 것입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과 함께 말을 했습니다. 이는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둘 다 고난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에 고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영광스럽게 변해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고난을 받고 죽은 후에 부활하여 구원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세 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실 원대한 구원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 그들은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영광 가운데 살고 싶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피곤하게 살기보다 영광스러운 가운데 살고 싶습니다. 안일하고 풍요로운 삶에 젖어 있으면 고난을 받아들이기가 싫습니다.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매우 어리석습니다. 초막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또 초막을 짓고 산 꼭대기에서 사는 것은 잠시 동안은 그럴 수 있지만 계속해서 그렇게는 살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초막과 같은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오래도록 살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사모해야 할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소원을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변화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이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구원은 믿음에서 나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자기 부인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손해의식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고난을 싫어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고난에 대한 자세가 달라집니다. 사랑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를 희생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장막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설거지를 하고 섬기면 동역자의 얼굴이 환해지고 아이들도 기뻐합니다. 그러면 가정에 평화가 깃듭니다. 웃음 꽃이 피어납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 이루어집니다. 목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하여 양들을 먹이고 오래 참으면서 양육할 때 양의 얼굴이 밝아집니다. 이때 목자 생활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같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면 관계가 부드럽게 변화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가운데 그를 따르며 영광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9:18 - 36
요절 누가복음 9:20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맺어질 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또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위엄과 영광이 새겨질 때 기꺼이 그와 함께 고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새롭게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주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무슨 제목으로 기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도록,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전도하시고 또 제자들을 전도자로 세워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과 제자들을 양성하여 사역을 계승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이제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결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자들이 어떻게 알고 있는가, 또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시험을 보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아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있어야 하고 성령의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놓은 첫 번째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혜로운 선생님들은 처음에는 쉬운 문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로 마칩니다. 학생들을 힘들게 하기 위한 시험은 처음부터 어려운 문제를 내서 야코를 죽이고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끝내시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남들 이야기이기에 편안하게 답변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무리는 예수님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단면만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4대 성인군자 중 하나로 봅니다. 인도나 일본과 같은 다신교 사회에서는 예수님을 많은 신들 중의 하나로 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과 피상적인 관계를 맺을 뿐,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맺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파괴하고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구원은 파괴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리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는 주관적인 질문입니다.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묻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자 하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딩동댕. 정답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셨던 대답입니다. 100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어서 대답을 잘 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그 그리스도, 성경에 하나님이 예언하신 그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왕과 선지자, 대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은 구원자, 메시아를 뜻합니다. 왕되신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으로 포로 된 그 백성을 구출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왕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십니다. 그는 왕으로서 정의와 평화로 통치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을 가르쳐 주시는 선지자이십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인데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를 어두움과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구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거나 고행을 하거나 선행을 하는 등 자력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모든 죄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위해서 필요한 단계는 먼저 자신이 죄인됨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은 죄에 대해서 속수무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제사제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예표하셨습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죄를 사함 받는 길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는 “무한히 악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고 계십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스스로 죄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창3:15절에 처음으로 여자의 후손을 통해 나실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간이 해결 할 수 없는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며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2-14).” 예수님은 자기 피로써 우리를 이기심과 정욕과 미움과 슬픔과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로마서 10:9,10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를 마음으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에 이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고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그는 구원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인 일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메시지가 새롭게 들립니다. 성경이 새로운 책인 것 같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빛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성경책만큼 즐거운 책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와 사람들이 새롭게 보입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딸 이민아 변호사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부모와의 사랑, 한 남자와의 지독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공허했습니다. 늘 외로웠어요. 사랑은 상처가 됐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정체성 위기 속에서 자살충동도 느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났어요. 나를 향한 그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알면서 상처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지금 “땅 끝에 선 아이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겸손과 온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또 많은 분들이 공허하던 마음에 충만함을 느끼고 알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마음에 무거운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느끼던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마음이 가벼워져서 구름 위를 걷는 것과 같이 느낍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매우 사랑스럽게 보이고 원수마저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아는가에 따라서 생과 사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을 알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기를 알게 됩니다. 즉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요 구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왕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경배하고 충성을 다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시는 종이 아닙니다. 내가 종이고 그가 상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이 나의 만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알았다가 그를 만난 후에는 내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나를 다스리시고 내 삶을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일생 동안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많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예수님을 일생 알아가고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자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는 진심어린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단단히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실까요? 이는 아직 하실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셔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 없고, 흠 없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죄악 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입을 다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오해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높이고 그가 대속적인 죽임을 당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지 고난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고난의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후에 일어날 일들을 손바닥을 보듯이 보고 계십니다. 또 그는 이를 위해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또 무리에게 이르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마음이라도 편히 먹고 살고자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삶을 살 때 구원을 받습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삶은 순교자적인 삶입니다. 제자의 실제 삶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때로 제자의 삶이 죽을 맛이 라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렇게 살면 생명이 충만한 삶,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자기가 죽고 생명을 얻는 사람은 천하를 얻은 사람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죽음으로 구원을 완성해가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름으로 영성이 높아져야 합니다.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이 UBF 세계 대표로 취임을 하시면서 제시한 방향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잘 따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뒤에 있는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세 사람이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사실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이 먼저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수제자로 여기시고 이들을 먼저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에 그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로서 빛 자체이신 하늘의 영광으로 충만하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각인되었습니다. 옛날 모세는 시내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과 대화하고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출 34:29-30). 그는 평소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성소에 들어갈 때만 수건을 벗어야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있던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몸 자체가 변화되어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본래 영광스러운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로서 천사들이 입는 옷 색깔입니다. 이는 평화와 순결, 사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천상적인 신분을 말해줍니다. 그 광채는 그 성결함에서 나오는 영광일 것입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과 함께 말을 했습니다. 이는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둘 다 고난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에 고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영광스럽게 변해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고난을 받고 죽은 후에 부활하여 구원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세 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실 원대한 구원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 그들은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영광 가운데 살고 싶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피곤하게 살기보다 영광스러운 가운데 살고 싶습니다. 안일하고 풍요로운 삶에 젖어 있으면 고난을 받아들이기가 싫습니다.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매우 어리석습니다. 초막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또 초막을 짓고 산 꼭대기에서 사는 것은 잠시 동안은 그럴 수 있지만 계속해서 그렇게는 살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초막과 같은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오래도록 살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사모해야 할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소원을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변화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이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구원은 믿음에서 나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자기 부인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손해의식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고난을 싫어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고난에 대한 자세가 달라집니다. 사랑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를 희생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장막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설거지를 하고 섬기면 동역자의 얼굴이 환해지고 아이들도 기뻐합니다. 그러면 가정에 평화가 깃듭니다. 웃음 꽃이 피어납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 이루어집니다. 목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하여 양들을 먹이고 오래 참으면서 양육할 때 양의 얼굴이 밝아집니다. 이때 목자 생활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같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면 관계가 부드럽게 변화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가운데 그를 따르며 영광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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