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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강 2024년 신년1강(시1:1-6)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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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8회 작성일 24-01-01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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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신년 말씀 1강
말씀 | 시편 1:1-6
요절 | 시편 1:2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행복한 사람은 물질적인 여유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사랑에도 풍성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항상 여유가 있으면 좋지만 인생은 고난도 따르고 가난도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행복할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그야말로 다양한 감정들이 나타납니다. 특히 고난으로 인한 슬픔, 비통함, 회의, 불안, 절망, 외로움과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을 경험합니다. 이런 가운데 악인의 길을 갈 것인가, 의인의 길을 갈 것인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인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또 어떻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시인은 율법 묵상을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우리가 율법 묵상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또 율법 묵상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배우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이란, ‘복되도다! 그 사람은...’, ‘오, 행복한 사람이여!’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수동태로서 이미 하나님이 복 주셔서 복 받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런 상태가 이미 복 받은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누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단수로 쓰여 있고(the man), ‘악인들’(the wicked), ‘죄인들’(sinners), ‘오만한 자들’(scoffers)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악인의 길은 많은 사람이 다니지만 의인의 길은 좁기도 하거니와 걷기가 쉽지 않고 인기도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1절은 복 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세 가지 부정적인 행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르지 아니하며, ’서지 아니하며‘, 앉지 아니하고’. 동사의 의미가 점점 적극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꾀는 잔머리를 굴리고, 악인들의 충고, 조언, 계획으로서 이를 한 번 따라 해 보거나 동조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길은 삶의 방식이나 습관으로서 그 길에 서는 것은 목적과 방향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즉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합니다(시14:1). 그들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아예 습관이나 생활방식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들과 연합의 단계로 가는 것입니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은 꼭 비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신자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적으로도 수준 높고 고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참여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없이 자기 지식, 자기 판단, 자기 능력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허랑방탕한 둘째 아들도 나쁘지만 첫째 아들이 더 나쁩니다. 그는 아버지와 관계없이 자기 의로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 의로 똘똘 뭉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더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지 않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외로울지라도 회개하고 말씀을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아니, 어떻게 악인의 꾀를 따라가지 않으셨어요? 정말 놀랍습니다! 복 받으셨네요!’ 주일에 교회에서 한자리에 모이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복 받은 자리입니다! 예배에 나오는 형제, 자매들이 그렇습니다. 당연한 게 아니라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길을 온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2a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호와의 율법은 십계명을 비롯한 법 조항이나 모세 오경만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교훈 전체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원어로 “그의 즐거움이 여호와의 율법에 있다”(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의미죠. 즉 여호와의 율법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 여호와의 율법에서 단 맛을 느끼는 사람, 그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예배에 오는 사람도 복 받은 사람이지만, 그 말씀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사람, 그 사람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왜 복 있는 사람일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까요? 무엇을 행복의 기준과 조건으로 보고 있습니까? 대부분 소유입니다. 넓은 자기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잘 생기고, 고소득 연봉을 받으면 복 있는 사람으로 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장학금 받고, 더 나아가 취직을 하면 복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만족되지 않으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어불성설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의 정의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 속에서 주어진 약속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주고받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남편’이요, 그의 ‘아버지’시오, 그의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깨닫는 것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계시하실 때, 그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깨지면 에덴 낙원에 있어도 불행합니다(창3:10).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로부터 오지 않고 존재 목적과 의미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그의 율법에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와 방식을 제시하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면 소유에 관계없이 즐겁습니다. 어떻게 살지를 알면 즐겁습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도 즐겁습니다(시65:8). 눈이 오는 것도 즐겁고 비가 와도 즐겁습니다. 반면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솔로몬과 같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성취했지만 그 삶은 헛되고 피곤하고 무익해집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만으로는 의인의 길을 가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깊이 교제하는 것에서 우리는 즐거움을 찾고 외롭지만 의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2b). ‘묵상’(하가,הָגָה)은 구약성경에서 비둘기가 내는 소리(사38:14), 사람이 목구멍으로 내는 소리(시35:28,시115:7)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소나 양이 되새김질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세계의 독서 관습에 따르면 묵상은 큰 소리로 읽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묵상은 내면화된 인지적인 활동이 아니고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어 말을 내뱉으며 숙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시편 119편 147절과 148절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삶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의 상황은 그의 영혼이 먼지 속에 처박히고(25), 눌리고(28), 심한 조롱을 받으며(51), 이유 없이 핍박을 받고(86), 세상에서 거의 망했다고 생각할 정도이며(87), 고난이 매우 심하고(107), 환난과 우환이 미친 상태였습니다(143). 그 어디서도 도움을 바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때 주의 말씀이 시인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기 시편 119편에는 ‘조용히 읊조린다’라는 말이 8번 나온다(시119:15,23,27,48,78,97,99,148).
 위해 새벽부터 눈을 떴습니다. 고관들이 자기를 비방할 때 시인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습니다(23). 그렇게 했을 때, 그는 고난 속에서 율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71). 고난에 두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할 때 고난 속에서도 시인은 율법을 즐거워하고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장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장사를 끝내고 돈을 세는 것이 그렇게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더 재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말씀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왜 말씀을 즐거워할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의 인격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지혜와 돌보심을 체험하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말씀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고난이 있기에 평상시보다 더욱 말씀을 붙잡게 되고 말씀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말씀 묵상을 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그의 선하심과 정의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역사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9:6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즐거워할 분은 남편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자식도 아닙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행복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주의 마음이 어찌 그리 세심하신지요! 그는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시편 119:147, 148을 새번역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새벽이 되었습니다. 혼자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 좀 더 쉬워집니다. 우리가 주일예배에서 주시는 찬양, 기도,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일대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가 주 중에 소감 발표 모임을 이루는 가운데 함께 받은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소감을 쓰고, 준행하는 것이 삶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사람의 행동을 관찰해 보면 무엇이 옳은지 안다고 해서 그대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유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감정적으로 마음이 편한 것을 따라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움과 손해가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치관을 세운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소감을 나눌 때에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고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소감을 발표한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받은 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한 내 삶의 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소감을 나눈다는 것은 깨달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해에는 성경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기보다 내가 만난 성경 이야기를 함께 써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받는 복은 무엇과 같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쉼을 누립니다. 무엇보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통’은 건조하고 가문 기후 속에서도 나무가 사시사철 잎이 마르지 않고 철따라 열매 맺는 것입니다. ‘형통’은 재수 좋게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가 자연히 열매를 맺듯이, 여호와의 율법을 가까이 하여 그 율법에 뿌리를 내리고 영적인 양분을 꾸준히 공급받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형통입니다. 말하자면, 의인의 형통은 예측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관계가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양을 많이 치고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형통하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집에서 왕자처럼 살다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생활할 때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창39:2). 하나님은 그가 노예로 일을 하지만 손을 대는 것마다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정욕의 유혹을 피하다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억울하게 고발당해 다시 하루 아침에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감옥에서도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감옥에서 범사에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창39:23). 요셉은 최악의 환경과 조건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형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지만 교만하지 않고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는 역사에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하고 지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충성하는 삶이 형통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이 횡횡하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가뭄으로 보이는 열매가 없어서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뜻을 알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 형통입니다. 학교나 직장이나 가정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 어려운 동역자들을 돌아보며 사랑하고 섬기는 그것이 형통입니다.

  오늘날은 영적인 가뭄입니다. 제자양성도 가뭄입니다. 성경에 관심 있는 양,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양이 가물에 콩 나듯 합니다. 그러면 목자 생활의 의욕을 잃고 그만두거나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길로 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율법 속에서 이런 상황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찾고 변함없이 목자로 사는 것이 형통입니다. 우리가 건강을 잃거나, 물질적으로 어렵지만 사랑에는 더욱 풍성할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어렵지만 서로를 불쌍히 여기면서 살 때 거기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전반부에는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후반부에는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 사람들의 승리가 나옵니다.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두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란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자가 행복할 때 양도 행복합니다. 아내가 행복해야 자녀들이 행복합니다. 행복은 가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풍성함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자유함을 누리며, 동역자들들과 교제할 때에 행복합니다.

  넷째, 하나님이 의인들의 길을 인정하십니다. 의인이 모든 일에 다 형통한 삶을 산다면 악인들은 어떠할까요? 4,5절을 보십시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겨’는 가벼운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날아갑니다. 겨는 시냇가에 굳게 뿌리를 박고 최악의 기후를 견뎌내고 열매를 맺은 나무와 대조됩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을 가면 당장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드시 심판의 때가 옵니다. 나의 능력, 물질적인 복으로 견뎌내기 어려운 때가 옵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아니고서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 앞에 서야 할 때가 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살다가, 보이지 않는 인생의 뿌리를 어디에 두고 살았는지 드러나게 되는 날이 옵니다. 그가 의인의 길을 걸어왔는지, 악인의 길을 걸어왔는지 판명 나는 날이 옵니다.

  세상에서는 악인들과 죄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는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인정하다’는 말은 ‘알다’(know)로서, 속속들이 경험하여 안다는 의미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말할 때 전형적으로 쓰이는 동사입니다. 하나님이 의인들의 길을 알아주시고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악인은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my way’를 가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자기 뜻대로 살고 싶어하죠. 남에게 간섭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싶어 합니다. 반면에 의인은 여호와의 뜻을 묻고, 찾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요, 여호와를 주인이요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후에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살았어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 아니면 망한 인생입니다. 진정한 ‘이생망’은 나의 존재 목적과 의미, 삶의 방식을 여호와의 율법에서 찾지 않고 내가 원하는 계획과 방식대로 산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고, 율법 안에서 길을 찾은 사람들만 여호와가 인정하십니다. 최후에 여호와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최종적으로 형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새해도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즐거워함으로 형통한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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