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2년 누가복음 제 41강(20:1-26) 모퉁이의 머릿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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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41 강
말씀 누가복음 20:1-26
요절 누가복음 20:17
모퉁이의 머릿돌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포도원을 주고 일하게 하십니다. 이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여 소출을 내고 세를 드림으로 주인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일한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고 싶고 욕심이 생겨서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포도원도 잃어버리고 생명까지 위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시지만 농부들에게 버린 바 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사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포도원을 귀하게 여기고 주인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계속해서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세리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서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성전에 들어와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시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들은 하나님께 권위를 위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관리하고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독할 권한은 산헤드린과 그 대표인 대제사장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 와서 상인들을 내쫓고 매일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자 그들은 화가 났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위임 받은 권위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이권을 앞세우고 또 권위의 주체인양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권위의 주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강도의 소굴과 같던 성전을 청소하고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성전 본래의 기능이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그들은 이런 사건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며 지혜를 얻는 대신에 교만해져서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적반하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은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하늘로부터 오는 권위로 일한 것을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자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습니다. 포도원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인은 산에서 나무를 베고 돌을 제거하고 거름을 주고 망대를 세우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틀을 만들고 좋은 포도 나무를 심어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도록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포도원을 새로 시작할 때 5년째가 되어야 포도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4년 동안 지주는 농부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5년째부터 소출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할 일이 없던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자체가 은혜였습니다. 주인이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주인 의식을 가지고 땀 흘려 일했습니다. 주인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소출을 내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적은 소출을 내기만 하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일하며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종을 보내는 주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주인은 농부들과 관계성을 유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소출자체보다 그들을 축복해 주고 격려해 주고자 보냈습니다. 사실 세금은 관계의 끈일 뿐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감사는커녕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당장에 사람들을 보내어 파면시키고, 계약을 어기고 은혜를 악으로 갚은 그들을 감옥에 쳐 넣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냅니다. 주인은 정말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습니다. 혹시 종들이 농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그랬나 싶어 다른 종들을 잘 교육시켜 보냈습니다. 계속해서 종을 보내는 주인의 마음은 어찌하든지 농부들과 관계성을 맺기 원하고 있습니다. 영적질서를 지키도록 가르치길 원했습니다. 소출 때문에 안달이 난 것이 아니라 영적 자세를 가르치길 원했습니다.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습니다. 주인은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았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참고 용서해주는 주인은 절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자비와 인내를 베풀어주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시86:15).”
농부들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들은 주인을 너무 얕잡아 보았습니다. 주인을 약하게 보고 우습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하는 인간의 악함을 잘 보여줍니다. 농부들은 자신의 분수를 잃어버렸습니다. 너무나 교만해졌습니다. 주인이 멀리 떠나 있으니까 설마 어떻게 할 수 있으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주인으로 착각한 정도가 아니라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계획을 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욕심이 들어왔고 그 욕심이 지나쳐서 종을 때리고 능욕하였습니다. 포도 농사는 잔손이 많이 갑니다. 자기들 힘으로 포도의 모든 것을 수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종들을 보냈을 때 자기들이 수고한 것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투자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수고한 것만 생각하고 자기 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들은 세를 내는 조건으로 오직 은혜로 농사짓고 있다는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하였습니다. 주인은 그들에 대해서 변함없는 마음을 가지고 세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그들과 바른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고자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아들은 주인을 닮았기 때문에 그를 존대하는 것이 곧 자기를 존대함인 줄 알고 기대를 가지고 보냈습니다. 그들이 주인에 대한 존대감을 가져야 소출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대해 경외심과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소출을 잘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의와 인과 신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만 있으면 기쁨으로 드릴 수 있고 더 받을 수 있습니다. 말라기 3: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는데 더 주는 것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주인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면 얼마든지 지원해 주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 탐심을 품었습니다. 그들이 주인의 아들이 왔을 때에라도 돌이켜서 소출을 냈다면 바른 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악하게 행했지만 바로 다른 농부들로 교체하지 않았습니다. 인내하면서 농부들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해서 소출을 내야하고 동시에 소출의 일부를 세로 내는 일을 잘 감당해야 청지기로서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주인의식이 지나쳐서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취하려는 탐심은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도 삼켜버리게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이 상속자인 것을 알면서도 죽이고자 합니다. 마음 상태가 갈수록 고의적이고 악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재산을 강탈하고자 합니다. 탐심이 자라서 살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입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습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고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말했습니다. 주인은 무력하거나 물이 아닙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심판하고 진멸해버립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셔서 죄인들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면 졸지에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 만민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그 권한이 넘어갔습니다. 신약에서는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국과 전세계 캠퍼스를 포도원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캠퍼스에서 일생 복음을 전하며 제자 양성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키운 제자들이 UBF 회원을 넘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UBF는 없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세상 소망이 들어오면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과 헌신이 아깝게 생각됩니다. 영적인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알렉산더 왕이 이끄는 군대가 페르시아를 쳐부수기 위해 전진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군인들은 패전을 결심이라도 한 듯 힘없이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렉산더 왕은 그 이유를 재빠르게 알아차렸습니다. 군인들은 여러 전투에서 얻은 노획물들을 몸에 잔뜩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군인들의 행군을 잠깐 멈추게 한 알렉산더는 노획물들을 모두 모아 불태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에 군인들은 심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렇지만 군사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죄의 짐을 잔뜩 짊어진 채 군사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여러 가지 죄의 짐을 회개의 투쟁을 통해 매일 예수님께 내려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지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죽일 것입니다. 건축하다가 쓸모없어 버린 돌은 초라합니다. 그러나 그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구주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초석이 되셨습니다. 구원의 반석, 교회의 반석이 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반석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기준돌이 되십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적하는 자는 깨어집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며 죽이려 하지만, 오히려 자기들이 파멸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무신론자들의 목소리가 거셉니다. 도킨스 같은 사람들, 기독교안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대적한다 할지라도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자신들이 깨어지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내 인생의 모퉁이 돌로 삼을 것인가 버릴 것인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실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몰아내고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나의 왕국을 건설할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고 거기에 인생의 기초를 쌓은 사람들은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그런 인생은 견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밀어내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면 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이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죄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왕권, 주권에 대항하는 역사였습니다. 에덴의 선악과 사건, 바벨탑 사건, 예수님 십자가 배척 사건 등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고 자신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주권싸움에서 결코 인간이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이 판단하시고 최후 심판자가 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주인이시고, 중심이 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가루가 될 것인가, 성전의 돌로 귀히 쓰임 받을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인가, 교만한 사람이 될 것인가와 같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은 대적하시고 낮추시지만 겸손한 사람은 높이십니다. 제자도의 최고 위치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에게 고용된 농부들입니다.
비유를 들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님을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 넘기려 하여 모의하였습니다. 그들은 정탐들을 보내어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당시 세금징수 문제로 인해 유대인의 반로마 감정이 컸습니다. 로마에 세금을 바치라고 말한다면 친로마적인 인물로 백성들의 배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가이사를 대적하는 정치범으로 고소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냐 아니냐의 대답을 요구했는데 그런 대답으로는 어떤 경우이든 궁지에 몰릴 뿐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시며 그들을 침묵하게 만드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예수님의 신적인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뒤의 것에 핵심이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앞의 비유를 피하고자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절묘하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도 드리지 않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고 포도원의 주인행세를 하며 탐욕을 부리는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님을 책잡지 못하고 그 대답에 놀라 침묵하고 맙니다. 자기들과 수준이 달랐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보다 자신의 뜻을 내세우고 관철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세우신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드리지 않고자 하는 욕심과 탐심, 교만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소출을 잘 드림으로 그와 바른 관계를 맺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누가복음 20:1-26
요절 누가복음 20:17
모퉁이의 머릿돌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포도원을 주고 일하게 하십니다. 이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여 소출을 내고 세를 드림으로 주인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일한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고 싶고 욕심이 생겨서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포도원도 잃어버리고 생명까지 위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시지만 농부들에게 버린 바 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사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포도원을 귀하게 여기고 주인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계속해서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세리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서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성전에 들어와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시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들은 하나님께 권위를 위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관리하고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독할 권한은 산헤드린과 그 대표인 대제사장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 와서 상인들을 내쫓고 매일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자 그들은 화가 났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위임 받은 권위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이권을 앞세우고 또 권위의 주체인양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권위의 주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강도의 소굴과 같던 성전을 청소하고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성전 본래의 기능이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그들은 이런 사건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며 지혜를 얻는 대신에 교만해져서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적반하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은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하늘로부터 오는 권위로 일한 것을 알고 있지만 모른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자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습니다. 포도원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인은 산에서 나무를 베고 돌을 제거하고 거름을 주고 망대를 세우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틀을 만들고 좋은 포도 나무를 심어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도록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포도원을 새로 시작할 때 5년째가 되어야 포도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4년 동안 지주는 농부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5년째부터 소출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할 일이 없던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자체가 은혜였습니다. 주인이 타국에 가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주인 의식을 가지고 땀 흘려 일했습니다. 주인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소출을 내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적은 소출을 내기만 하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일하며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종을 보내는 주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주인은 농부들과 관계성을 유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소출자체보다 그들을 축복해 주고 격려해 주고자 보냈습니다. 사실 세금은 관계의 끈일 뿐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감사는커녕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당장에 사람들을 보내어 파면시키고, 계약을 어기고 은혜를 악으로 갚은 그들을 감옥에 쳐 넣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냅니다. 주인은 정말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습니다. 혹시 종들이 농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그랬나 싶어 다른 종들을 잘 교육시켜 보냈습니다. 계속해서 종을 보내는 주인의 마음은 어찌하든지 농부들과 관계성을 맺기 원하고 있습니다. 영적질서를 지키도록 가르치길 원했습니다. 소출 때문에 안달이 난 것이 아니라 영적 자세를 가르치길 원했습니다.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습니다. 주인은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았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참고 용서해주는 주인은 절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자비와 인내를 베풀어주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시86:15).”
농부들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들은 주인을 너무 얕잡아 보았습니다. 주인을 약하게 보고 우습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하는 인간의 악함을 잘 보여줍니다. 농부들은 자신의 분수를 잃어버렸습니다. 너무나 교만해졌습니다. 주인이 멀리 떠나 있으니까 설마 어떻게 할 수 있으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주인으로 착각한 정도가 아니라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계획을 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욕심이 들어왔고 그 욕심이 지나쳐서 종을 때리고 능욕하였습니다. 포도 농사는 잔손이 많이 갑니다. 자기들 힘으로 포도의 모든 것을 수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종들을 보냈을 때 자기들이 수고한 것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투자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수고한 것만 생각하고 자기 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들은 세를 내는 조건으로 오직 은혜로 농사짓고 있다는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하였습니다. 주인은 그들에 대해서 변함없는 마음을 가지고 세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그들과 바른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고자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아들은 주인을 닮았기 때문에 그를 존대하는 것이 곧 자기를 존대함인 줄 알고 기대를 가지고 보냈습니다. 그들이 주인에 대한 존대감을 가져야 소출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대해 경외심과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소출을 잘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의와 인과 신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만 있으면 기쁨으로 드릴 수 있고 더 받을 수 있습니다. 말라기 3: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는데 더 주는 것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주인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면 얼마든지 지원해 주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마음, 탐심을 품었습니다. 그들이 주인의 아들이 왔을 때에라도 돌이켜서 소출을 냈다면 바른 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악하게 행했지만 바로 다른 농부들로 교체하지 않았습니다. 인내하면서 농부들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해서 소출을 내야하고 동시에 소출의 일부를 세로 내는 일을 잘 감당해야 청지기로서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주인의식이 지나쳐서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취하려는 탐심은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도 삼켜버리게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이 상속자인 것을 알면서도 죽이고자 합니다. 마음 상태가 갈수록 고의적이고 악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재산을 강탈하고자 합니다. 탐심이 자라서 살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입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습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고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말했습니다. 주인은 무력하거나 물이 아닙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심판하고 진멸해버립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셔서 죄인들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면 졸지에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 만민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그 권한이 넘어갔습니다. 신약에서는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국과 전세계 캠퍼스를 포도원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캠퍼스에서 일생 복음을 전하며 제자 양성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키운 제자들이 UBF 회원을 넘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UBF는 없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세상 소망이 들어오면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과 헌신이 아깝게 생각됩니다. 영적인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알렉산더 왕이 이끄는 군대가 페르시아를 쳐부수기 위해 전진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군인들은 패전을 결심이라도 한 듯 힘없이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렉산더 왕은 그 이유를 재빠르게 알아차렸습니다. 군인들은 여러 전투에서 얻은 노획물들을 몸에 잔뜩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군인들의 행군을 잠깐 멈추게 한 알렉산더는 노획물들을 모두 모아 불태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에 군인들은 심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렇지만 군사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죄의 짐을 잔뜩 짊어진 채 군사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여러 가지 죄의 짐을 회개의 투쟁을 통해 매일 예수님께 내려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지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죽일 것입니다. 건축하다가 쓸모없어 버린 돌은 초라합니다. 그러나 그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구주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초석이 되셨습니다. 구원의 반석, 교회의 반석이 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반석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기준돌이 되십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적하는 자는 깨어집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며 죽이려 하지만, 오히려 자기들이 파멸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무신론자들의 목소리가 거셉니다. 도킨스 같은 사람들, 기독교안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대적한다 할지라도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자신들이 깨어지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내 인생의 모퉁이 돌로 삼을 것인가 버릴 것인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실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몰아내고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나의 왕국을 건설할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고 거기에 인생의 기초를 쌓은 사람들은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그런 인생은 견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밀어내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면 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이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죄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왕권, 주권에 대항하는 역사였습니다. 에덴의 선악과 사건, 바벨탑 사건, 예수님 십자가 배척 사건 등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고 자신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주권싸움에서 결코 인간이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이 판단하시고 최후 심판자가 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주인이시고, 중심이 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가루가 될 것인가, 성전의 돌로 귀히 쓰임 받을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인가, 교만한 사람이 될 것인가와 같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은 대적하시고 낮추시지만 겸손한 사람은 높이십니다. 제자도의 최고 위치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에게 고용된 농부들입니다.
비유를 들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님을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 넘기려 하여 모의하였습니다. 그들은 정탐들을 보내어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당시 세금징수 문제로 인해 유대인의 반로마 감정이 컸습니다. 로마에 세금을 바치라고 말한다면 친로마적인 인물로 백성들의 배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가이사를 대적하는 정치범으로 고소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냐 아니냐의 대답을 요구했는데 그런 대답으로는 어떤 경우이든 궁지에 몰릴 뿐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시며 그들을 침묵하게 만드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예수님의 신적인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뒤의 것에 핵심이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앞의 비유를 피하고자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절묘하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도 드리지 않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고 포도원의 주인행세를 하며 탐욕을 부리는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님을 책잡지 못하고 그 대답에 놀라 침묵하고 맙니다. 자기들과 수준이 달랐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보다 자신의 뜻을 내세우고 관철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세우신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드리지 않고자 하는 욕심과 탐심, 교만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소출을 잘 드림으로 그와 바른 관계를 맺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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