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2년 누가복음 40강(19:28-48) 평화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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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누가복음 제 40 강
본문 누가복음 19:28 - 48
요절 누가복음 19:38
평화의 왕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평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다스림을 받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을 닮아갑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소망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영원히 다스려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므나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자발적으로 나아가셨다는 뜻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바로 왕위를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왕, 진리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오르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매우 두렵고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켜서 예루살렘 입성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그의 주권을 나타낸 사실은 나귀 새끼를 징발하시는 모습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매어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누가 어찌하여 푸느냐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주인이 나귀 새끼를 내 주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귀 새끼와 만물의 주인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왕이십니다. 나귀의 그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고 했을 때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나귀의 주인이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영적 권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자동차나 내 생명이라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이 나귀는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나귀가 되었습니다. 가장 존귀하신 왕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쓰임 받고 죽는다면 영광스러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조국을 위해서 쓰임 받다가 죽은 사람들을 우리는 존귀하게 여깁니다. 그의 자손들까지도 보상을 하고 예우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분들을 우리는 귀히 여겨야 합니다. 또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릴 수 있도록 준비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의 몸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관리해서 하나님께서 쓰고자 하실 때 아낌없이 드려야 합니다. 이 나귀 새끼는 바로 이때를 위해서 준비해온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준비하고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제사장이 백성의 속죄를 위한 제물을 바칠 때 멍에를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취하여 드리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민19:2). 이번 제사는 예수님 자신이 흠없는 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것은 스가랴서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시오 평화의 왕이십니다. 대개 왕들은 전쟁을 상징하는 말을 타고 입성합니다. 자신의 위엄을 돋보이기 위해 흰색 말이나 검은 색 말을 탑니다. 김정은도 말을 타고 다니는 모습을 방영함으로 그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를 띠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발이 땅에 끌리면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누구나 다가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알려진 솔로몬도 나귀 새끼를 타고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5-8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은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것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형편과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같이 낮아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지내셨습니다.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같이 하심으로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낮추어 캠퍼스 현장의 소리를 듣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경청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힘들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야 합니다. 그들과 마음을 통하고자 노력할 때 말씀을 제대로 심고 예수님의 제자로 키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사람 잡으실 일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반발하기 쉬웠습니다. 대낮에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잡범으로 몰리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서 보고 말씀에 순종해서 나귀 새끼를 먼저 풀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믿고 단순하게 순종한 것입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 대한 경외심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실 때에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 전적으로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김정일의 장례식 때에 평양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평양 시민들이 그 장례용 자동차가 눈을 밟지 말라고 한 겨울에 자기 겉옷을 벗어서 깔았습니다. 김정일은 북한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임을 드러내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감시 요원들이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발적인 행동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 겉옷을 깔았던 것입니다. 주님께 충성을 바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자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찬양 내용이 무엇입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하신 대로 오신 왕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의 왕이십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천사들은 땅 위에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가져다준 평화가 곧 하늘의 평화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심으로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입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 경배드립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구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롬 10:9,10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한 나라는 누가 왕이 되는가에 따라서 백성들의 행불행이 좌우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의 왕좌에 앉아서 왕노릇하려고 합니다. 연약한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다 책임지려고 합니다. 그로 인해 무기력과 혼란, 좌절과 불안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죄의식과 불안, 두려움을 느낍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지만 인간 조건을 개선한다고 해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음악을 듣고 돈을 모아 놓고 무언가를 성취하지만 공허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자아를 자기 마음의 왕좌로부터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영접할 때 그가 나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다스려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질서와 균형, 담대함과 지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태국은 지금도 왕정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자기 왕을 욕하면 그들은 화를 내고 기꺼이 싸웁니다. 왕에 대한 충성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정파간의 싸움을 하다가도 왕이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리면 절대복종합니다. 왕권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왕조시대에 백성들의 마음이 왕께 대한 충정과 사모함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왕들은 백성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대통령제에서 처음에는 환호하다가 끝날 때쯤에는 실망과 불만을 쏟아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왕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그 백성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건지실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자 사람들은 그를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빵문제를 일생동안 해결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 날 찾아온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주심으로 영생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을 먹을 때 영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이 힘으로 성서한국 세계선교를 위해서 일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땅 끝까지 이루어지도록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합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왕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그의 주권에 굴복하는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청지기입니다. 또한 그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이 세상 역사는 그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세상 왕들이 주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역사의 주로서 그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개인의 주이십니다. 사람이 걸음을 걷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내가 원해서 한국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현재의 부모를 원해서 그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해서 현재의 아내나 남편과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나를 통해서 탄생하고 양육을 받는 자녀들도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청지기로서 그의 주권에 순종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전 세계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과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 세상은 그의 왕권을 인정하는 사람들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왕권이란 그의 주권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받을 심판으로 인해 그는 우셨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오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십니까? 40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돌만도 못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장자로 택하사 만민 구원 역사에 쓰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이 왕되심을 거부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예수님은 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여기서 우셨다는 단어는 에클라우센인데 이는 흐느껴 울다, 큰소리로 울부짖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을 때는 에다크뤼오센으로 분을 삭히며 조용히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부패와 영적 무지, 그들의 죄악을 보실 때 비난하고 판단하기보다 소리 내어 엉엉 우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보고 판단하기보다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들과 교회를 비난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며 울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심령이 살아 있고 복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할 심판을 내다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평화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그들에게 40년 후인 AD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한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2000년동안 나라를 잃고 세계를 방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빠짐이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인 것을 깨닫고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평화로운 때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큰 복입니다. 이 복을 잘 감당하고 나누어 주는 것이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기도하시며 말씀을 묵상하고자 하셨습니다.그러나 성전이 장사하는 자들로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유월절에는 디아스포라들이 세계 각 곳에서 다 몰려듦니다. 이들이 성전에 들어가려면 반 세겔 즉 노동자 하루 품삯인 7만원 정도의 성전세를 내야 하는데, 환전을 하는 과정에서 종교지도자들이 고용한 환전상들이 높은 수수료를 매겨 이득을 취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일년 된 흠이 없는 양들을 내야 하는데 제사장들이 흠을 찾아서 자기들이 기른 양을 비싸게 팔아먹었습니다. 본래 예루살렘 성 입구에 짐승을 파는 시장이 있었는데 가야바 때에 이방인의 뜰로 옮겨졌습니다. 이로 인해 이방인들이 성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사하는 소리로 성전이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며 쫓아내셨습니다.
성전은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장소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통회자복하고 죄사함을 받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성전을 깨끗이 청소를 하신 다음 날마다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바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힘써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장소가 말씀공부와 기도로 채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얼마 후에 봄 학기가 시작되는데 예수님을 본 받아 이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본래의 기능으로 충만하도록 힘씁시다. 또한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죄악된 요소들, 안일, 편리주의, 이기주의, 물질주의, 음란 등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다 몰아내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채우기를 힘씁시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더욱 거룩하게 변화되고 선한 열매가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 받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왕좌에 예수님이 오셔서 다스리시도록 자아를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왕되심을 삶 가운데서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앞에 순복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눈물을 본받아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기보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합시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넘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한 열매가 가득 맺힐 줄 믿습니다. 우리의 왕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19:28 - 48
요절 누가복음 19:38
평화의 왕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평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다스림을 받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을 닮아갑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소망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영원히 다스려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므나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자발적으로 나아가셨다는 뜻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바로 왕위를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왕, 진리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오르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매우 두렵고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켜서 예루살렘 입성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그의 주권을 나타낸 사실은 나귀 새끼를 징발하시는 모습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매어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누가 어찌하여 푸느냐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주인이 나귀 새끼를 내 주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귀 새끼와 만물의 주인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왕이십니다. 나귀의 그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고 했을 때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나귀의 주인이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영적 권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자동차나 내 생명이라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이 나귀는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나귀가 되었습니다. 가장 존귀하신 왕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쓰임 받고 죽는다면 영광스러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조국을 위해서 쓰임 받다가 죽은 사람들을 우리는 존귀하게 여깁니다. 그의 자손들까지도 보상을 하고 예우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분들을 우리는 귀히 여겨야 합니다. 또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릴 수 있도록 준비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의 몸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관리해서 하나님께서 쓰고자 하실 때 아낌없이 드려야 합니다. 이 나귀 새끼는 바로 이때를 위해서 준비해온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준비하고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제사장이 백성의 속죄를 위한 제물을 바칠 때 멍에를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취하여 드리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민19:2). 이번 제사는 예수님 자신이 흠없는 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것은 스가랴서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시오 평화의 왕이십니다. 대개 왕들은 전쟁을 상징하는 말을 타고 입성합니다. 자신의 위엄을 돋보이기 위해 흰색 말이나 검은 색 말을 탑니다. 김정은도 말을 타고 다니는 모습을 방영함으로 그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를 띠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발이 땅에 끌리면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누구나 다가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알려진 솔로몬도 나귀 새끼를 타고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5-8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은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것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형편과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같이 낮아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지내셨습니다.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같이 하심으로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낮추어 캠퍼스 현장의 소리를 듣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경청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힘들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야 합니다. 그들과 마음을 통하고자 노력할 때 말씀을 제대로 심고 예수님의 제자로 키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사람 잡으실 일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반발하기 쉬웠습니다. 대낮에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잡범으로 몰리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서 보고 말씀에 순종해서 나귀 새끼를 먼저 풀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믿고 단순하게 순종한 것입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 대한 경외심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실 때에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 전적으로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김정일의 장례식 때에 평양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평양 시민들이 그 장례용 자동차가 눈을 밟지 말라고 한 겨울에 자기 겉옷을 벗어서 깔았습니다. 김정일은 북한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임을 드러내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감시 요원들이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발적인 행동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 겉옷을 깔았던 것입니다. 주님께 충성을 바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자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찬양 내용이 무엇입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하신 대로 오신 왕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의 왕이십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천사들은 땅 위에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가져다준 평화가 곧 하늘의 평화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심으로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입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 경배드립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구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롬 10:9,10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한 나라는 누가 왕이 되는가에 따라서 백성들의 행불행이 좌우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의 왕좌에 앉아서 왕노릇하려고 합니다. 연약한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다 책임지려고 합니다. 그로 인해 무기력과 혼란, 좌절과 불안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죄의식과 불안, 두려움을 느낍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지만 인간 조건을 개선한다고 해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음악을 듣고 돈을 모아 놓고 무언가를 성취하지만 공허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자아를 자기 마음의 왕좌로부터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영접할 때 그가 나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다스려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질서와 균형, 담대함과 지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태국은 지금도 왕정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자기 왕을 욕하면 그들은 화를 내고 기꺼이 싸웁니다. 왕에 대한 충성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정파간의 싸움을 하다가도 왕이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리면 절대복종합니다. 왕권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왕조시대에 백성들의 마음이 왕께 대한 충정과 사모함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왕들은 백성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대통령제에서 처음에는 환호하다가 끝날 때쯤에는 실망과 불만을 쏟아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왕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그 백성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건지실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자 사람들은 그를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빵문제를 일생동안 해결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 날 찾아온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주심으로 영생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을 먹을 때 영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이 힘으로 성서한국 세계선교를 위해서 일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땅 끝까지 이루어지도록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합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왕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그의 주권에 굴복하는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청지기입니다. 또한 그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이 세상 역사는 그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세상 왕들이 주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역사의 주로서 그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개인의 주이십니다. 사람이 걸음을 걷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내가 원해서 한국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현재의 부모를 원해서 그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해서 현재의 아내나 남편과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나를 통해서 탄생하고 양육을 받는 자녀들도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청지기로서 그의 주권에 순종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전 세계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과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 세상은 그의 왕권을 인정하는 사람들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왕권이란 그의 주권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받을 심판으로 인해 그는 우셨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오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십니까? 40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돌만도 못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장자로 택하사 만민 구원 역사에 쓰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이 왕되심을 거부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예수님은 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여기서 우셨다는 단어는 에클라우센인데 이는 흐느껴 울다, 큰소리로 울부짖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을 때는 에다크뤼오센으로 분을 삭히며 조용히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부패와 영적 무지, 그들의 죄악을 보실 때 비난하고 판단하기보다 소리 내어 엉엉 우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보고 판단하기보다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들과 교회를 비난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며 울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심령이 살아 있고 복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할 심판을 내다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평화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그들에게 40년 후인 AD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한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2000년동안 나라를 잃고 세계를 방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빠짐이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인 것을 깨닫고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평화로운 때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큰 복입니다. 이 복을 잘 감당하고 나누어 주는 것이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기도하시며 말씀을 묵상하고자 하셨습니다.그러나 성전이 장사하는 자들로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유월절에는 디아스포라들이 세계 각 곳에서 다 몰려듦니다. 이들이 성전에 들어가려면 반 세겔 즉 노동자 하루 품삯인 7만원 정도의 성전세를 내야 하는데, 환전을 하는 과정에서 종교지도자들이 고용한 환전상들이 높은 수수료를 매겨 이득을 취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일년 된 흠이 없는 양들을 내야 하는데 제사장들이 흠을 찾아서 자기들이 기른 양을 비싸게 팔아먹었습니다. 본래 예루살렘 성 입구에 짐승을 파는 시장이 있었는데 가야바 때에 이방인의 뜰로 옮겨졌습니다. 이로 인해 이방인들이 성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사하는 소리로 성전이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며 쫓아내셨습니다.
성전은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장소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통회자복하고 죄사함을 받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성전을 깨끗이 청소를 하신 다음 날마다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바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힘써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장소가 말씀공부와 기도로 채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얼마 후에 봄 학기가 시작되는데 예수님을 본 받아 이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본래의 기능으로 충만하도록 힘씁시다. 또한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죄악된 요소들, 안일, 편리주의, 이기주의, 물질주의, 음란 등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다 몰아내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채우기를 힘씁시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더욱 거룩하게 변화되고 선한 열매가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 받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왕좌에 예수님이 오셔서 다스리시도록 자아를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왕되심을 삶 가운데서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앞에 순복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눈물을 본받아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기보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합시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넘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한 열매가 가득 맺힐 줄 믿습니다. 우리의 왕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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