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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38강(19:1-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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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90회 작성일 11-12-11 13:07

본문

2011년 누가복음 제 38 강                                                                 
본문 누가복음 19:1-10
요절 누가복음 19: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고 나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두 요소는 은혜와 진리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 공짜로 베풀어 주시는 호의입니다. 즉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용납입니다. 진리는 실제 그대로입니다. 즉 진리는 사실 그대로가 어떠한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바르게 될 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성장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세리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가 되어 방황하던 데서 예수님을 만나 찾은 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받고 진리를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저주와 멸시의 대상에서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우리도 구원을 받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세리 삭개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여리고에 살았고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여리고는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면서 일곱바퀴 돌면서 소리를 질러 성을 무너뜨리고 처음 점령한 도시였습니다. 종려나무의 성이라고 불리울만큼 종려나무가 많았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조건과 지리적 요건 때문에 여리고는 상업이 발달하고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여기에 큰 세무서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란 이름의 뜻은 순결, 정의인데 부모가 소망 가운데 지어준 이름과는 달리 가장 추하고 욕된 자요 부정부패의 대명사인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허가받은 도둑놈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명문이던 여리고 세무대학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평범한 세리로 출발해서 최연소 세리장으로까지 승진을 할 정도로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의 흐름을 잘 알았고 로마의 개로서 돈 냄새를 잘 맡았습니다. 그는 부자들이 돈을 어디에 숨겨두는지, 어떻게 탈세를 하는지 귀신 같이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잘 거두어들였고 거기서 얼마를 자기의 몫으로 챙겼습니다. 그는 돈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돈을 모으는데 전심전력했습니다. 그는 올해의 세리 상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신입 세리들을 교육하는 전문 강사로서 활약도 했습니다. 그는 키가 작지만 매우 부지런했습니다. 그리고 불독과 같이 한번 물었다 하면 절대로 놓지를 않고 기어이 세금을 받아냈습니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의 악명이 높아갈수록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집은 매우 크고 호화로웠습니다. 뒤에 보면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할 정도로 크고 좋은 집을 소유했습니다.

  그의 외적인 삶과 달리 내적인 삶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지위와 돈 앞에 굽신거렸지만 뒤돌아서면 침을 뱉고 욕을 했습니다. “아, 재수없는 놈 만났네. 퉤!” 그가 이를 악물고 눈을 감고 세리의 일을 했지만 밤마다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는 그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내가 동족들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아이들은 학교에서 세리의 아들이라며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아내는 돈을 갖다 줄 때는 좋아하지만 그를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무시를 받는 그의 마음은 비참했습니다. 왕노릇을 해야 할 가정에서도 풀이 죽고 기가 꺾였습니다. 그는 직장에서 돌아오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고독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마음의 고통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돈이 무엇인지 돈이 웬수였습니다. 오늘도 직장에 나아가서 돈 때문에 사람들과 싸울 일을 생각하면 피곤했습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이기고 돈을 많이 소유한 부자가 되었지만 그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웃음이 없었습니다. 웃어도 냉소적인 웃음뿐이었습니다. 그는 할 말도 별로 없었습니다. 누구와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결속이 없는 그의 삶은 메말랐습니다. 결속은 하나님 성품의 근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과 관계를 맺고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웃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이때 그의 마음은 우울했고, 삶이 무의미하다는 감정에 빠졌습니다. 무의미하다는 느낌을 목적이 없는 것으로 혼돈하기 때문에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일의 성취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나 더욱 고립으로 몰아갈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이라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깨졌을 때 그는 자신은 나쁜 놈이라는 느낌과 죄의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그는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사랑의 빈 그릇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고립된 생활은 때로 그를 격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고립감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술과 음식과 일과 물질주의와 파괴적인 관계에 중독이 되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코 만족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와 관계를 잘 맺는 것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 “똘복이”였습니다. “똘복이”는 그가 밖에서 돌아올 때면 변함없이 나와 꼬리를 흔들고 자기에게 엉겨붙으며 맞아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애완견과는 깊은 마음의 교제를 나누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삶에 한 줄기 서광이 비추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세리로 일하던 레위가 사표를 내고 예수라는 선지자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문이 세관에도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예수라는 분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하여 여리고를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 싶은 열망이 용솟음쳤습니다(3a). 예수님이 누구신가? 이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삭개오가 품게 된 의문입니다. 그는 문둥병자도 고쳐주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녀를 구하시고 용서해 주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의 초청이나 목자님들의 사랑과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은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진 소원은 기복적인 것에서 더 의미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것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소원은 바로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나는 누구입니까?”로 모아집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을 알 때 찾을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할 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볼 수 가 없었습니다(3b).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깡충깡충 뛰어봤지만 사람들의 등짝만 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방해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들의 양보를 얻어서 예수님을 보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키 작은 서러움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우울한 생각을 하며 포기하기 쉬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자신을 좀 더 고친 다음에 나가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술, 담배를 다 끊고 나가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교적인 가정 분위기 속에서 제사지내는 문제가 걸림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 교회에 나가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일에 빠져 바쁘게 지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또 내가 교회에 착실히 나가면 친구들이 놀리지 않을까 핍박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원하지만 먼 거리로 인해서 예배에 참석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삭개오에게 예수님을 만나는데 장애물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목자로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자신과 타인과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생각들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내게 있어서 어떤 면이 사람들을 쫓아버린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내 죄는 다른 사람의 죄보다 더 악하다, 나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나의 필요가 다른 사람을 숨막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  사람들이 나를 언젠가는 떠나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왜곡된 생각들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런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삭개오는 특유의 넉살과 추진력과 아이디어로 문제를 극복할 길을 찾았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그가 지나가실 길을 예상하고 그 앞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세리장이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이 너무 컸기 때문에 남산처럼 나온 배로 나무를 기어올라가는 것이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나무에서 미끄러졌지만 이를 극복하고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자존심과 체면을 내려놓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고, 의존적인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몰래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자기를 쳐다보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의 자애로우신 눈길이 그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평화를 보았습니다. 목자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 예수님은 그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영적인 소원을 아셨습니다. 그가 이제까지 겪어온 인생의 상처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잃은 양을 찾듯이 삭개오를 찾으셨고 그를 찾은 기쁨에 속히 내려오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일이 잘 풀리면 나아가겠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긴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본문에 속히, 급히, 오늘 이라는 단어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은혜 받을 만한 때를 만났을 때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삭개오의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아시는 예수님, 자기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불러주시는 예수님, 자기를 찾으시는 예수님, 자기 집에 유하겠다고 요청하시는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에 삭개오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짐으로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는 조롱 받는 자리에서 급히 내려왔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를 영접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인된 죄인인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시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걸어가는 삭개오의 발걸음은 춤을 추듯 경쾌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새 생명을 얻습니다. 거듭나 새 사람이 됩니다. 새 피조물이 됩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거듭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탄의 조롱과 비난도 있습니다. 의심과 회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과 함께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뭇 사람이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7).” 당시 세리는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기피인물 일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로움과 사람들의 따돌림으로 고통받던 삭개오를 이해하시고 그와 교제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비난을 온 몸으로 받으셨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을 만나 교제하고 사랑과 은혜를 받자 삭개오의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사랑의 그릇이 채워지자 만족감, 행복이 넘쳤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물동이를 그대로 두고 이웃들에게 은혜를 전하러 간 것과 같이 삭개오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자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긍휼이 샘솟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소유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고 섬기는 사람, 나누어 주는 사람, 정말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았으면 네 갑절을 갚겠다고 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으로 취한 것을 돌려 줄때에는 1/5을 덧붙여 갚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6:5;민 5:7). 또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4배로 갚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습니다(출 22:1;삼하 12:6). 따라서 삭개오의 이같은 선언은 당시 율법이 정하는 도적질에 상당하는 배상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삭개오 자신이 그 같은 정도의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셈입니다. 이같은 삭개오의 파격적인 행위는 자기중심적 삶을 부정하고 새로이 방향을 바꾸는 전격적인 회개의 표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회개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참회나 죄에 대한 단순한 고백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적 행동을 동반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안에서 은혜뿐만 아니라 진리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진리에 기초한 행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사귐을 갖자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물질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나누어주는데도 기쁨이 넘칩니다. 그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요 마음의 풍요로움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줍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는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계승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버림 받은 아들이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로서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린 자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받으면서 존귀한 자녀로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죄를 짓고 결속이 깨진 사람입니다. 아담의 타락이래로 사람들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나 이 세상을 방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자 인생의 목적도 잃어버리고, 의미도 잃고 사명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과 진리와 거룩함과 의를 잃어버렸습니다. 역사도 열정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잃어버리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자행자지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은 양떼를 찾는 선한 목자로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내 대신 자기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아버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의 나라를 상속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잃어버린 자, 믿음을 갖고 있다고 타락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그를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잃은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 하신 이후에 우리에게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청년들을 찾아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한량없은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잃어버렸던 나를 찾아주신 예수님의 마음, 긍휼의 마음, 예수님의 소망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동역자들과 사랑의 관계, 결속을 이루면서 만족과 기쁨을 누릴 때, 잃어버린 자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을 힘있게 감당하고 구원하는 역사에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섬기는 삶을 살다가 지치고 마음이 상한 분들이 있습니다. 힘들면 쉬웠다 가면 되고, 짐이 무거우면 나누면 되고, 지혜가 부족하면 구하면 됩니다. 나 혼자 안 되면 동역자들과 합심해서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섬기는 양의 변화를 볼 때 모든 고난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목자의 그 고난과 희생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찾고 있는 잃어버린 자는 누구입니까? 그를 찾아 섬기면서 예수님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섬기면서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나의 성장을 위해서, 나의 상급을 위해 마련하신 기회이자 축복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헤매이며 상처받고 찢기고 피곤해진 목자님들께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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