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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1년 누가복음 34강(17:1-19) 무익한 종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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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79회 작성일 11-11-13 15:46

본문

2011년 누가복음 제34강                                                       
본문 누가복음 17:1-19
요절 누가복음 17:10
무익한 종의 자세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오늘 우리는 성숙한 제자도에 대해서 주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주님은 실족과 용서에 대한 교훈(1-6), 무익한 종의 교훈(7-10), 감사에 대한 교훈(11-19)을 말씀하십니다. 이 교훈들 중심에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생명력 있는 믿음이 있어야 용서, 겸손, 감사의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과 살아 있는 인격적 관계성을 맺고 배우는 제자라면 능히 성숙한 제자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우리의 영성도 더 깊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실족과 용서(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심하라며 말씀하셨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원어로 스칸달론(영어의 스캔들)으로 원래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 놓는 ‘덫, 올무, 파놓은 함정’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는 실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고의로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누리는 복음의 자유조차도 양들에게 걸림이 된다면 영원히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고전8:13). 우리도 악의로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서로 걸림돌이 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늘 조심하여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판단하기보다는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실족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죄인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 사람들의 허물로 인해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실족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킵니다. 우리가 다 연단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숙한 제자는 죄를 범하는 형제를 볼 때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만 조심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형제에게 관심을 갖고 그를 책망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왜 형제의 죄를 볼 때 책망해야합니까? 그는 내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죄를 방치하게 되면 교회 공동체에 곰팡이가 퍼지듯이 죄가 퍼지게 됩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낮아지고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다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죄에 대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징계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돌보아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영적, 도덕적 진보를 보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의 죄에 대해서 모른 척하지 말고 책망하고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히 12:8). 형제가 회개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야 하냐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나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죄를 짓고 회개한다고 말하면 이 형제가 진짜 회개하는 것인가 의구심이 듭니다.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상습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용서하지 못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는 관계를 끊는 것이 속이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한다는 그의 말을 믿어주고 희망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인간의 의지와 감정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맛본 사람만이 계속해서 상처를 극복하면서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복음 신앙이 있는 사람은 상처를 받아도 빨리 이를 극복합니다. 그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력이 있습니다. 용서에는 관계를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함으로 마음의 상처가 치료됩니다. 형제의 용서를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용서는 공동체가 하나가 되게 합니다.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새롭게 살고자 하는 열정을 덧입게 됩니다.
 
  5,6절은 1-4절과 별도로 ‘믿음의 능력’을 가르치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와 연결해 볼 때 형제의 반복되는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믿음을 더해 달라고 사도들이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곱 번 피해를 주고 일곱 번 와서 회개한다고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데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을 믿어 줄 것인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정말 변화시킬 수 있을까? 믿음이 없으면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냥 차버리든지 관계를 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어떤 죄인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 다시 그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역을 대행해야 합니다. 그들은 현재 자신들의 믿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믿음을 더해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용서란 헬라어로 ‘아페소’인데 ‘보내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먼 곳으로 보내 다시 기억하지 않으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뽕나무는 우리나라의 느티나무와 같이 큰 나무 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뽑힌다는 말은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할 때 쓰는 것입니다. 즉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 상처로 인한 복수심, 저 사람은 아무리 말을 하고 훈련을 받아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깊은 불신, 그 사람 안에 깊이 뿌리가 박혀서 도저히 뽑혀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지독한 죄의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던져짐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사람의 변화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명령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바람과 파도에게 명령하여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먹은 사람에게 에바다 즉 열리라 명령하심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의 귀를 치료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태양과 달을 명하여 멈추게 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때에 합당하다고 믿어지면 이렇게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형제의 마음에, 자매의 마음에 있는 불신아 떠나가라! 마음의 고통아 떠나가라! 병마야 떠나가라! 학생 제자 양성은 어렵다고 여기게 하는 불신아 떠나가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루실 비전을 보여주시도록 기도하고 큰 그림, 좋은 그림을 그려야겠습니다. 홍대 가운데 천명의 영적 리더들을 세워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홍대가 거룩한 땅으로 변화되어 한국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진원지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으로 이 나라를 하나 되게 하는 일에 쓰임 받도록 기도합시다.

  둘째, 무익한 종의 자세(7-10). 예수님은 제자의 자세에 대해서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를 기초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믿음의 능력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큰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간직해야 할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위대한 용서를 통해서 사람을 얻고 변화를 체험하였을 때 간직해야 할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한 종이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그더러 밖에서 수고했으니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기진하도록 일하고 돌아온 종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명령한대로 일을 잘 했다고 종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리더들에게 섬김의 리더십을 말하는 오늘날 이런 문화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으로 능력을 행하고, 형제를 용서하여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나서 주님의 인정을 받고 섬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헌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면 스탭 목자나 일을 책임 맡은 분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어떤 보상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야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요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기 의가 마음에 자리 잡게 되면 리더를 판단하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수고한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데모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의 어떤 선행도 하나님 편에서는 공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든 그것은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온 정성으로 명령받은 일을 완수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마음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장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 하나님의 종이라고 기록된 사람은 모세와 여호수아와 바울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종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일한 모세와 여호수아와 바울에 비하면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봉사를 무익한 봉사로, 우리 자신들을 무익한 종들로 부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이 어떤 것인지 알고 또 그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믿고 안다면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자기 인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무슨 일을 성취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신 결과이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의 결과입니다. 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써서 종교개혁을 완성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무덤에 비석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래서 스위스에 가도 그의 무덤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분이 그의 기념비를 세우고자 시도했다가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죤 칼빈의 뜻이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선교사로 수고한 언더우드 후손들의 태도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언더우드의 외손녀가 한국에서 작년에 있었던 에딘버러 100주년 기념 선교 대회에 참석하여 한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조상들이 한국에서 일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들도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영웅처럼 높이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이런 겸손한 자세로 인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9,10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가 어떠한지를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갖는 것이 마땅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 보좌 앞에 앉아 있던 이십 사 장로들도 면류관을 벗어 주님께 드리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9-10).”

  우리 목자님들은 자기가 직장에서 땀 흘려 일을 하고 번 돈을 주님께 드리고 또 시간을 내어 헌신합니다. 그리고도 무슨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전문인 선교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수고하고 헌신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하나님의 일을 파송 받은 각 나라에서 감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같은 사람으로서 동역자들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고 또 인정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드린 헌신을 냉수 한 바가지라도 다 기억하고 갚아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익한 종과 같이 주님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고백이 있어야겠습니다. 그것이 은혜를 계속 감당하고 깊어지는 길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헌신을 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는 대신에 자기 아들을 버리기까지 나를 사랑하사 구원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은혜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빚을 갚는다고 큰소리치지 말아야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영광스러운 구속 역사에 불러 주시고 써 주시는 하나님께 오직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셋째, 감사(11-19). 앞에서 주님께서 종된 우리에게 사례할 필요가 없다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주님께 감사를 표현해야 함을 나병환자들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는데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가다가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치료가 불가능해 보이던 나병이 깨끗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하고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과 맥이 통합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사람이 화장실 들어가기 전의 마음과 들어간 후 나올 때의 마음이 다릅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감사할 줄을 모르는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은혜 망각증의 대표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다가 나음을 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매우 흔히 범하는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긍휼을 덧입지만 소수의 사람만이 감사를 표현합니다. 가장 감사하리라 기대되었던 유대인들이 감사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배은망덕한 죄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어떠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사마리아 사람은 겨자 씨만한 믿음, 생명력이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병에서 나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은 후에도 주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생기려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또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믿음을 선물로 받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얻지 못한 더 풍성한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힌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을 축복하시는 말씀,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감사도 믿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지 근성이 있으면 감사하지 않고 더 받으려고만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문둥병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고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기억할 때 마음으로부터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제사입니다(시50:23). 감사는 잊어먹기 전에 그때 그때 해야 합니다. 감사할 때 주님과 바른 관계가 맺힙니다.

  주님은 감사가 넘치는 사람에게 주님과의 관계가 맺혀지고 생명이 풍성해지는 은혜를 주십니다. 감사는 주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해 줍니다. 감사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게 해 줍니다. 작은 감사 속에는 더 큰 감사를 만들어 내는 기적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속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사랑도 당연하고 내가 받는 대우도 당연하고 내가 하는 일도 당연하고 내가 지금 건강한 것도 당연 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을 감사하기 시작하면 고마운 마음은 더욱 커집니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감사제목을 찾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고 감사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숙한 제자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살아 있는 믿음, 생명력이 있는 믿음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맡은 바 일을 다 한 다음에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갖는 겸손을 유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리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이 더욱 성숙해지고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 주가 추수 감사주일인데 감사제목을 적극적으로 찾아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풍성하게 드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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