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2년 누가복음 48강(24:1-35)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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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누가복음 제48강
본문 누가복음 24:1-35
요절 누가복음 24:6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어떤 것보다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은 죽음의 세력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희망을 주고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몸으로 다시 살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삶과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짓누르던 죄와 죽음과 율법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오랫동안 예언을 했고 예수님 자신이 미리 말씀했던 것인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짐으로 이 세상에서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생명 가운데 살며 실패와 좌절을 딛고 승리하는 삶을 살며 절망을 이기고 소망 가운데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우리 삶의 실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부활의 역사적 증거 :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국화를 들고 무덤에 가지만 예전에는 향품을 들고 가서 시체에 발랐습니다. 그것이 죽은 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여자들이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을 옮겨줄까 염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무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갈까 염려하여 16명의 로마 군인들이 사방에 네 명씩 지키고 있었고 빌라도의 권위로 인봉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은 장정 20명이 옮겨야 할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무덤에 가서 보니 돌이 이미 굴려 입구에서 옮겨져 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여인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이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습니다(9:21-27, 44-45; 18:31-34). 그들은 시체를 누가 가져갔는지 원망스러웠고 허망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때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말하는 천사만을 대표적으로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누가와 요한은 어떤 일에 보증을 세울 때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더 확실성이 있는 보증이 된다는 유대인의 전통적 사상에 따르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5,6).”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것만 생각하고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을 때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과 천사의 증언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 외에도 열두 사도, 오백여 형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 바울, 세마포, 제자들의 변화, 학자들의 연구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으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안에 이루어진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죄와 죽음과 율법에 갇혀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내가 죄의 형벌을 다 지고 가려고 합니다. 인생을 운명적으로 생각하며 죄책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기만 아는 죄를 무덤까지 가지고 가고자 합니다. 또는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며 살아갑니다. 죽으면 다 끝장이라고 생각하여 허무한 생각, 무의미한 생각,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무기력하게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를 얻고 은혜로 살아갑니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 감동을 받고 주의 일에 헌신합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개척하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언의 말씀을 기억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갈릴리에 계실 때에 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건을 체험함으로써 믿음을 갖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부활을 보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의심을 했습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믿습니다. 그러나 역사 실증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부활 사건의 종말론적 새로움을 무의식적으로 평가절하하게 되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방법에 의하여 부활 사건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 사건은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활은 이 세상 삶의 연장이 아니라 궁극적인 삶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현실이지만 동시에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해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부활 신앙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가 부활 사건의 의미를 증명과 실증에 두지 아니하고, “증인들을 통한 전파”와 “말씀에 대한 믿음”에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과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15:14). 바울은 왜 실증과 증명이 아니라, 전파와 신앙을 부활 사건 이해의 올바른 맥락으로 제시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부활 사건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사건이며, 지금 세계의 연장이 아닌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은 이 세계의 일부분의 사건이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를 선포하는 사건이기에, 그것의 전체 의미 맥락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틀에서 이해되어야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시대가 이미 이 세계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여자들을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하셨을까요? 여자들은 남자보다 전달 능력이 뛰어납니다. 여자들은 입체적인 상황 인식이 남자들보다 뛰어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말이 많습니다. 사건을 보고 느끼고 파악하는 능력이 형제들보다 뛰어납니다. 또한 우리가 말씀보다 체험을 강조해서 전달하기 시작하면 뒤로 갈수록 말이 바뀌게 됩니다. 말 전달하기 게임을 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기적의 현장에 있어도 그것이 말씀으로 해석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사람들은 운이 좋아서 그렇다거나, 우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도 만나지도 않았지만 천사의 증언과 빈 무덤만으로도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었습니다. 부활신앙은 꼭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않고도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믿기를 주님은 도마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했습니다. 가장 잘 믿을 것만 같고, 아니 믿어야만 할 사도들이 믿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지난 이틀 동안 진행되는 상황을 주시하면서 은신처에 함께 숨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과 스승을 부인한 자신의 뻔뻔스러운 행동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자살했습니다.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이 그들의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기쁜 소식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지 않은 본질적인 문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믿기지는 않지만 일어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는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그는 현장을 확인했지만 단지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는 빈 무덤과 부활의 간접적인 증거인 세마포를 보고도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하지 못함으로 여전히 궁금증에 빠졌습니다. 그가 죄책감에 깊이 빠져 있고 두려운 현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두움에서 쉽게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문제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님께 집중해야합니다.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고 살아계신 주님과 교제하도록 인도합니다.
셋째,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 한편 그날 제자 중에서 다른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엠마오라는 고향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슬픔과 실패감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방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건 꿈이 깨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좀 수치스럽기 까지 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가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침묵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면서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걸어가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들의 불신과 완악함으로 인해서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머리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고정 관념, 선입견, 세상적인 가치관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 눈이 가리어져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예수님은 슬쩍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십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습니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은 누가라고 하는 학자도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당신 간첩 아니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해요?” 예수님은 능청을 떠십니다. 무슨 일인데? 그들은 열을 내면서 설명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어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죠.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해요.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충분한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대화를 하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이럴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죄에서 속량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실제로 자신의 생명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강도 외에는 아직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죄로부터 속량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고 나서 그들의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 관은 예수님의 고난을 대실패, 대좌절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어야 이스라엘을 속량할 수 있었는데 억울하게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소망은 물거품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이해와 해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사건도 왜곡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성경에 기록된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역시 그 예언의 성취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들은 예언된 말씀이 예수님에게 성취된 것을 기억하고 믿었던 여인들과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책망을 받자 그들은 자기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시고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3:15)으로 시작하여 이사야의 고난당하는 종(53장)과 스가랴의 찌른바 된 사람(12:10)과 말라기 언약의 사자(3:1)를 통해 사도들을 구약의 세계로 다시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을 하나로 이어주는 실이며 그 모든 것을 통합시키는 핵심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된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열정이 생깁니다. 예레미야는 20:9절에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에 불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쓰임을 받습니다. 마음에 주님을 위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전도하고 섬기고 제자를 양성하고 죽기까지 헌신합니다. 이런 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또 다른 사람이 불을 붙이게 됩니다. 내 안에 불이 있습니까? 성령의 불이 우리 각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자 예수님은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강권하여 붙잡습니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정체성에 관한 암시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주님의 생전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던 행동이기도 합니다(9:16). 한편으로는 최후의 만찬을 기억나게 합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성만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한 언약의 피를 흘리고 내가 생명을 얻도록 자신의 살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죽은 영혼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감사 기도를 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고 그 떡을 먹는 동안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신앙이 생기자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33-35절을 보십시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들은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도저히 아침까지 참고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그들을 흥분시키고 담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제자들과 함께 부활 수양회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죄와 죽음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음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는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마귀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산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죄인들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후 말할 수 없이 즐거웠던 사십일 간이 끝나고 예수님의 육체적 현현이 그쳤을 때에도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매일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 속에서 실증되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들은 매일 매일 주님의 생생한 임재를 체험하면서 주님과 교제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30년 간 놀라운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복음은 로마에 까지 삽시간에 요원의 불길과 같이 퍼져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300년간의 불같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난폭하게 닥쳐오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고 순교하면서까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도록 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암과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목자님들에게 새 생명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부활신앙으로 실패한 일에 다시 도전하고 승리하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연약한 마음이 변화를 받아 담대한 증인의 삶을 사는 목자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에 두꺼운 커튼을 치고 어두운 방 구석에서 슬피 울던 사람들이 부활의 빛 가운데로 나와서 목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의존심이 많던 사람들이 오직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자립하며 개척하고 목표를 성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새 생명의 역사를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본문 누가복음 24:1-35
요절 누가복음 24:6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어떤 것보다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은 죽음의 세력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희망을 주고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몸으로 다시 살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삶과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짓누르던 죄와 죽음과 율법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오랫동안 예언을 했고 예수님 자신이 미리 말씀했던 것인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짐으로 이 세상에서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생명 가운데 살며 실패와 좌절을 딛고 승리하는 삶을 살며 절망을 이기고 소망 가운데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우리 삶의 실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부활의 역사적 증거 :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국화를 들고 무덤에 가지만 예전에는 향품을 들고 가서 시체에 발랐습니다. 그것이 죽은 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여자들이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을 옮겨줄까 염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무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갈까 염려하여 16명의 로마 군인들이 사방에 네 명씩 지키고 있었고 빌라도의 권위로 인봉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은 장정 20명이 옮겨야 할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무덤에 가서 보니 돌이 이미 굴려 입구에서 옮겨져 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여인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이 부활하실 거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습니다(9:21-27, 44-45; 18:31-34). 그들은 시체를 누가 가져갔는지 원망스러웠고 허망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때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말하는 천사만을 대표적으로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누가와 요한은 어떤 일에 보증을 세울 때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더 확실성이 있는 보증이 된다는 유대인의 전통적 사상에 따르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5,6).”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것만 생각하고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을 때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과 천사의 증언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 외에도 열두 사도, 오백여 형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 바울, 세마포, 제자들의 변화, 학자들의 연구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으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안에 이루어진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죄와 죽음과 율법에 갇혀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내가 죄의 형벌을 다 지고 가려고 합니다. 인생을 운명적으로 생각하며 죄책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기만 아는 죄를 무덤까지 가지고 가고자 합니다. 또는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며 살아갑니다. 죽으면 다 끝장이라고 생각하여 허무한 생각, 무의미한 생각,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무기력하게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를 얻고 은혜로 살아갑니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 감동을 받고 주의 일에 헌신합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개척하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언의 말씀을 기억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갈릴리에 계실 때에 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건을 체험함으로써 믿음을 갖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부활을 보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의심을 했습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믿습니다. 그러나 역사 실증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부활 사건의 종말론적 새로움을 무의식적으로 평가절하하게 되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방법에 의하여 부활 사건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 사건은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활은 이 세상 삶의 연장이 아니라 궁극적인 삶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현실이지만 동시에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해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부활 신앙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가 부활 사건의 의미를 증명과 실증에 두지 아니하고, “증인들을 통한 전파”와 “말씀에 대한 믿음”에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과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15:14). 바울은 왜 실증과 증명이 아니라, 전파와 신앙을 부활 사건 이해의 올바른 맥락으로 제시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부활 사건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사건이며, 지금 세계의 연장이 아닌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은 이 세계의 일부분의 사건이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를 선포하는 사건이기에, 그것의 전체 의미 맥락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틀에서 이해되어야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시대가 이미 이 세계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여자들을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하셨을까요? 여자들은 남자보다 전달 능력이 뛰어납니다. 여자들은 입체적인 상황 인식이 남자들보다 뛰어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말이 많습니다. 사건을 보고 느끼고 파악하는 능력이 형제들보다 뛰어납니다. 또한 우리가 말씀보다 체험을 강조해서 전달하기 시작하면 뒤로 갈수록 말이 바뀌게 됩니다. 말 전달하기 게임을 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기적의 현장에 있어도 그것이 말씀으로 해석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사람들은 운이 좋아서 그렇다거나, 우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도 만나지도 않았지만 천사의 증언과 빈 무덤만으로도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었습니다. 부활신앙은 꼭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않고도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믿기를 주님은 도마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했습니다. 가장 잘 믿을 것만 같고, 아니 믿어야만 할 사도들이 믿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지난 이틀 동안 진행되는 상황을 주시하면서 은신처에 함께 숨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과 스승을 부인한 자신의 뻔뻔스러운 행동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자살했습니다.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이 그들의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기쁜 소식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지 않은 본질적인 문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믿기지는 않지만 일어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는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그는 현장을 확인했지만 단지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는 빈 무덤과 부활의 간접적인 증거인 세마포를 보고도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하지 못함으로 여전히 궁금증에 빠졌습니다. 그가 죄책감에 깊이 빠져 있고 두려운 현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두움에서 쉽게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문제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님께 집중해야합니다.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고 살아계신 주님과 교제하도록 인도합니다.
셋째,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 한편 그날 제자 중에서 다른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엠마오라는 고향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슬픔과 실패감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방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건 꿈이 깨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좀 수치스럽기 까지 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가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침묵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면서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걸어가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들의 불신과 완악함으로 인해서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머리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고정 관념, 선입견, 세상적인 가치관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 눈이 가리어져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예수님은 슬쩍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십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습니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은 누가라고 하는 학자도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당신 간첩 아니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해요?” 예수님은 능청을 떠십니다. 무슨 일인데? 그들은 열을 내면서 설명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어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죠.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해요.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충분한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대화를 하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이럴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죄에서 속량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실제로 자신의 생명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강도 외에는 아직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죄로부터 속량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고 나서 그들의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 관은 예수님의 고난을 대실패, 대좌절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어야 이스라엘을 속량할 수 있었는데 억울하게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소망은 물거품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이해와 해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사건도 왜곡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성경에 기록된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 역시 그 예언의 성취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들은 예언된 말씀이 예수님에게 성취된 것을 기억하고 믿었던 여인들과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책망을 받자 그들은 자기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시고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3:15)으로 시작하여 이사야의 고난당하는 종(53장)과 스가랴의 찌른바 된 사람(12:10)과 말라기 언약의 사자(3:1)를 통해 사도들을 구약의 세계로 다시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을 하나로 이어주는 실이며 그 모든 것을 통합시키는 핵심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된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열정이 생깁니다. 예레미야는 20:9절에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에 불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쓰임을 받습니다. 마음에 주님을 위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전도하고 섬기고 제자를 양성하고 죽기까지 헌신합니다. 이런 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또 다른 사람이 불을 붙이게 됩니다. 내 안에 불이 있습니까? 성령의 불이 우리 각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자 예수님은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강권하여 붙잡습니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정체성에 관한 암시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주님의 생전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던 행동이기도 합니다(9:16). 한편으로는 최후의 만찬을 기억나게 합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성만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한 언약의 피를 흘리고 내가 생명을 얻도록 자신의 살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죽은 영혼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감사 기도를 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고 그 떡을 먹는 동안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신앙이 생기자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33-35절을 보십시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들은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도저히 아침까지 참고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그들을 흥분시키고 담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제자들과 함께 부활 수양회를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죄와 죽음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음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는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마귀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산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죄인들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후 말할 수 없이 즐거웠던 사십일 간이 끝나고 예수님의 육체적 현현이 그쳤을 때에도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매일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 속에서 실증되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들은 매일 매일 주님의 생생한 임재를 체험하면서 주님과 교제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30년 간 놀라운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복음은 로마에 까지 삽시간에 요원의 불길과 같이 퍼져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300년간의 불같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난폭하게 닥쳐오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고 순교하면서까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도록 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암과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목자님들에게 새 생명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부활신앙으로 실패한 일에 다시 도전하고 승리하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연약한 마음이 변화를 받아 담대한 증인의 삶을 사는 목자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에 두꺼운 커튼을 치고 어두운 방 구석에서 슬피 울던 사람들이 부활의 빛 가운데로 나와서 목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의존심이 많던 사람들이 오직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자립하며 개척하고 목표를 성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새 생명의 역사를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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