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2년 누가복음 47강(23:26-56)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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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누가복음 제47강
본문 누가복음 23:26-56
요절 누가복음 23:43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일과 장사지냄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복음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진리를 영접하고 함께 기뻐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십자형을 언도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채찍에 맞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기도하고 심문을 받느라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몸이 피곤하여 지치고 힘이 없어서 십자가를 진채로 넘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시간이 다급해진 군병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온 것을 보고 힘깨나 쓰리라 확신했습니다. 군병들은 그를 붙들어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당시에 시몬은 재수 없게 잡혀서 끔찍한 십자가 사형 틀을 지고 간 것이 께름직했지만 십자가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지만 그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구원을 받고 초대교회 역사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지는 것이 큰 축복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갔습니다. 백성들의 선한 목자요 사랑이 많으셨던 예수님이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볼 때 여인들은 마음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예수님은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자신을 따르는 여인들을 위로하시며 권면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28-31).” 예수님은 여인들이 십자가형을 위해 죽으러 가는 자신을 위해 울기보다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신으로 받을 심판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9:41절에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사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날이 이르면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그들을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유대인들과 그 자녀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심판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부모가 있는 한 그 자녀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17-18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저는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를 볼 때에 외적으로는 편리하고 좋아지겠지만 영적으로는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이 더욱 팽배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이 자라도록 눈물로 물을 주어 자라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닥칠 심판이 너무 무섭기 때문에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이 차라리 복이라고 하십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고 싶어 할 것입니다. 푸른 나무는 쉽게 불이 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타고 만다면 마른 나무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경계선을 넘어섰습니다. 실제로 AD 70년에 이루어진 심판은 끔찍해서 자식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으니 그때 자식이 없던 사람들이 상팔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범죄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행악자로 죽으시는 목적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b)”. 예수님이 아버지께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의 죽음을 모의하고 실행한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합니다. 로마 군인들보다도 유대인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들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짓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에 품은 음욕이 간음이라고 하셨고 형제에 대한 미움이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심각한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잘 몰랐는데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의라는 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지 걸레와 같다고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나요? 예수님이 피 흘려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은혜로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의미를 십자가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말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을 하고 관리들은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자기를 먼저 구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말했습니다. 군인이 볼 때 왕은 자기를 지킬 힘이 있어야 합니다. 군인들은 왕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이라고 하는데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니 조롱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십자가형에 처한 죄수가 숨을 거둘 때까지 앉아서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렇게 심심하게 기다리기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서 그의 힘을 보여주기를 기대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도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은 같은 행악자로부터 비방을 받으실 만큼 비참하게 죽으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자신과 그들을 구원해 보라는 한 죄수의 비방은 종교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조롱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 역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는 그 자신과 자기들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를 버려 구원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조롱당하면서 비난을 받으면서 끝까지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메시아 관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십니다. 그의 마음이 너무도 아프고 아프지만 죄 없는 아들 예수님을 희생하는 방법 외에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길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그를 희생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할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인간을 대속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던 사람들의 행동과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행악자 중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한 사람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그의 책망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조롱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진실 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람 앞에서 자기를 보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하는 형벌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자기 삶을 인정하고 심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자기 실존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지금 까지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 실존도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정확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보았기 때문에 자신도 정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행악자는 예수님을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을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이 행악자는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본래 인간 기초가 있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새로운 모습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과 행위를 지켜보는 가운데 얻은 성령님의 감동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기도가 정확하게 응답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때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될 때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 행악자는 예수님이 비참하게, 저주 받아 죽으시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나라로 가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자기와 함께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로 가신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분은 옳은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로 가신다.”는 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행악자는 예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의 나라로 가신 것이 아니라, 자기 같은 사람도 함께 데려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흉악한 죄인입니다. 즉 십자가형을 당해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 정도 되면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은 사치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자의식 때문에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만이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기 같은 죄인을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이것은 성경의 핵심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는 정말 위대한 믿음, 아름다운 믿음, 순결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무지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에 이 행악자가 감동을 받아 변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무죄한 분의 죽임이기 때문에 행악자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 행악자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구원할 수 있으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끝나실 분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기 때문에 너도 구원할 수 없고 우리도 구원할 수 없다”고 소리칠 때, 그는 십자가에 달려서 무능하게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의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메시아의 고난의 의미를 그는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추종자들의 믿음을 합친 것보다 더 강했습니다. 제자들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죄수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옆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외적인 모든 상황들은 그 왕국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려 주었는데도 말입니다. 오직 홀로 현재의 수치를 넘어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믿음은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입니까! 이 이름 없는 흉악범의 믿음을 통해서 저자 누가는 그 유명한 데오빌로 각하에게, 혹은 당시 제자 공동체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라는 정말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이 믿음에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입니다. 낙원은 에덴동산을 가리킵니다. 이 장소는 아름다움과 기쁨과 안식의 장소입니다(사 51:3, 고후 12:4, 계 2:7). 인간이 죄 때문에 잃어버린 원래의 낙원에 그는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니라 죽음은 그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높임을 받는 승귀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목적지, 곧 도착은 승천인 것입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흉악한 죄인인 행악자와 함께 낙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법을 어기고 악한 생활을 해 오다가 결국 사형장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 직면하자 예수님께로 돌아왔고 그에 대한 믿음을 은혜로 갖게 되었습니다. 이 강력하고 놀라운 대화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서도 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용서 기도를 하신 분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죽임당하고 있는 행악자를 구원하는 용서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실천하셨습니다.
한 행악자의 구원과 바라바의 석방을 연결해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인하여 죽을 자를 대신해서 죽는 대속적인 구원의 방편입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라바의 석방을 통해서는 역설적으로 이 진리가 드러났고, 한 행악자의 구원을 통해서는 있는 그대로 구원의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던지 아니면 허무에 빠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세상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도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그 허무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오직 내세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고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그는 예수님이 그와 같은 형벌을 받을 악행을 범하신 적이 없지만 위엄과 용기와 심지어 용서하는 말씀으로 죽임 당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이방 군인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로마 장교는 예수님 사후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라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자기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세마포로 싸고 귀인들을 위한 새 무덤에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요셉은 장례식을 통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의 구주이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이 복음을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23:26-56
요절 누가복음 23:43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일과 장사지냄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복음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진리를 영접하고 함께 기뻐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십자형을 언도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채찍에 맞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기도하고 심문을 받느라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몸이 피곤하여 지치고 힘이 없어서 십자가를 진채로 넘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시간이 다급해진 군병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온 것을 보고 힘깨나 쓰리라 확신했습니다. 군병들은 그를 붙들어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당시에 시몬은 재수 없게 잡혀서 끔찍한 십자가 사형 틀을 지고 간 것이 께름직했지만 십자가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지만 그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구원을 받고 초대교회 역사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지는 것이 큰 축복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갔습니다. 백성들의 선한 목자요 사랑이 많으셨던 예수님이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볼 때 여인들은 마음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예수님은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자신을 따르는 여인들을 위로하시며 권면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28-31).” 예수님은 여인들이 십자가형을 위해 죽으러 가는 자신을 위해 울기보다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신으로 받을 심판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9:41절에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사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날이 이르면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그들을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유대인들과 그 자녀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심판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부모가 있는 한 그 자녀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17-18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저는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를 볼 때에 외적으로는 편리하고 좋아지겠지만 영적으로는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이 더욱 팽배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이 자라도록 눈물로 물을 주어 자라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닥칠 심판이 너무 무섭기 때문에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이 차라리 복이라고 하십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고 싶어 할 것입니다. 푸른 나무는 쉽게 불이 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타고 만다면 마른 나무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경계선을 넘어섰습니다. 실제로 AD 70년에 이루어진 심판은 끔찍해서 자식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으니 그때 자식이 없던 사람들이 상팔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범죄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행악자로 죽으시는 목적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b)”. 예수님이 아버지께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의 죽음을 모의하고 실행한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합니다. 로마 군인들보다도 유대인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들 중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짓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에 품은 음욕이 간음이라고 하셨고 형제에 대한 미움이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심각한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잘 몰랐는데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의라는 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지 걸레와 같다고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나요? 예수님이 피 흘려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은혜로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의미를 십자가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말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을 하고 관리들은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자기를 먼저 구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말했습니다. 군인이 볼 때 왕은 자기를 지킬 힘이 있어야 합니다. 군인들은 왕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이라고 하는데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니 조롱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십자가형에 처한 죄수가 숨을 거둘 때까지 앉아서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렇게 심심하게 기다리기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서 그의 힘을 보여주기를 기대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도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은 같은 행악자로부터 비방을 받으실 만큼 비참하게 죽으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자신과 그들을 구원해 보라는 한 죄수의 비방은 종교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조롱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 역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는 그 자신과 자기들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를 버려 구원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조롱당하면서 비난을 받으면서 끝까지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메시아 관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십니다. 그의 마음이 너무도 아프고 아프지만 죄 없는 아들 예수님을 희생하는 방법 외에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길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그를 희생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할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인간을 대속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던 사람들의 행동과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행악자 중 십자가에 못 박힌 다른 한 사람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그의 책망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조롱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진실 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람 앞에서 자기를 보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하는 형벌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자기 삶을 인정하고 심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자기 실존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지금 까지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 실존도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정확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보았기 때문에 자신도 정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행악자는 예수님을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을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이 행악자는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본래 인간 기초가 있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새로운 모습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과 행위를 지켜보는 가운데 얻은 성령님의 감동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기도가 정확하게 응답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때 우리 자신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될 때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 행악자는 예수님이 비참하게, 저주 받아 죽으시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나라로 가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자기와 함께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로 가신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분은 옳은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로 가신다.”는 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행악자는 예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의 나라로 가신 것이 아니라, 자기 같은 사람도 함께 데려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흉악한 죄인입니다. 즉 십자가형을 당해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 정도 되면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은 사치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자의식 때문에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만이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기 같은 죄인을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이것은 성경의 핵심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는 정말 위대한 믿음, 아름다운 믿음, 순결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무지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에 이 행악자가 감동을 받아 변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무죄한 분의 죽임이기 때문에 행악자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 행악자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구원할 수 있으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끝나실 분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기 때문에 너도 구원할 수 없고 우리도 구원할 수 없다”고 소리칠 때, 그는 십자가에 달려서 무능하게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의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메시아의 고난의 의미를 그는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추종자들의 믿음을 합친 것보다 더 강했습니다. 제자들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죄수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옆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외적인 모든 상황들은 그 왕국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려 주었는데도 말입니다. 오직 홀로 현재의 수치를 넘어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믿음은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입니까! 이 이름 없는 흉악범의 믿음을 통해서 저자 누가는 그 유명한 데오빌로 각하에게, 혹은 당시 제자 공동체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라는 정말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이 믿음에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입니다. 낙원은 에덴동산을 가리킵니다. 이 장소는 아름다움과 기쁨과 안식의 장소입니다(사 51:3, 고후 12:4, 계 2:7). 인간이 죄 때문에 잃어버린 원래의 낙원에 그는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니라 죽음은 그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높임을 받는 승귀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목적지, 곧 도착은 승천인 것입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흉악한 죄인인 행악자와 함께 낙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법을 어기고 악한 생활을 해 오다가 결국 사형장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 직면하자 예수님께로 돌아왔고 그에 대한 믿음을 은혜로 갖게 되었습니다. 이 강력하고 놀라운 대화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서도 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용서 기도를 하신 분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죽임당하고 있는 행악자를 구원하는 용서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실천하셨습니다.
한 행악자의 구원과 바라바의 석방을 연결해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인하여 죽을 자를 대신해서 죽는 대속적인 구원의 방편입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라바의 석방을 통해서는 역설적으로 이 진리가 드러났고, 한 행악자의 구원을 통해서는 있는 그대로 구원의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던지 아니면 허무에 빠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세상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도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그 허무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오직 내세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고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그는 예수님이 그와 같은 형벌을 받을 악행을 범하신 적이 없지만 위엄과 용기와 심지어 용서하는 말씀으로 죽임 당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이방 군인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로마 장교는 예수님 사후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라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자기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세마포로 싸고 귀인들을 위한 새 무덤에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요셉은 장례식을 통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의 구주이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이 복음을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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