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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2년 누가복음 46강(22:47-23:25)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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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07회 작성일 12-03-25 15:33

본문

2012년 누가복음 제46강                                             
본문 누가복음 22:47-23:25
요절 누가복음 22:70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배반과 예수님의 자기 시인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 고백에서 베드로는 실패하고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정체성이 분명할 때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내면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철저히 깨졌습니다. 그가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새롭게 인식하고 신앙고백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다가왔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앞장서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습니다. 유다는 안부를 나누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우정과 애정의 상징인 입맞춤 인사를 배신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속성이 얼마나 비열하고 가증한 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묻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쓰라린 마음이 묻어나옵니다. 그 된 일을 보며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이에 대한 답변을 듣기도 전에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말고의 귀를 성미 급한 베드로가 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요18:10). 예수님은 그에게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떨어져 나뒹굴던 귀를 다시 붙여주신 것이 아니라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무장해제를 하셨습니다. 그 길이 무력하게 체포되고 수치와 조롱과 죽임을 당하는 길이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무력으로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잡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어둠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어둠의 권세에게 예수님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힘없는 분, 무기력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는데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호언장담처럼 “주님과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짝 따라 가서 그를 변호해야 마땅한데 멀찍이 따르니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자 베드로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를 가까이 따라도 현실적인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계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옥에 갇히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예수님과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가까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멀찍이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자 주님과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이제까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주 가까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주님과 거리를 두자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과 조금씩 거리를 두면 나중에는 그를 부인하는 지경에 까지 가는 것입니다. 나와 주님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주님과 나 사이의 교제는 조금씩 멀어지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약4:8a).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습니다.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습니다. 그는 끼지 말아야 할 자리에 끼어 앉았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베드로도 앉았습니다. 시편 1: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앉아 있느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가정 교회에 함께 앉아 있음으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앉지 말아야 할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세속적인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감추려고 하자 문제가 시작됩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가 불 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주목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는 엉겁결에 이런 말을 듣자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이 여자가. 나 그를 알지 못해”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너도 한패야”라고 말하자 “이 사람아, 나는 아니야”라고 말했습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며 말했습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그러나 베드로가 “이 사람이,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어.”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닭이 분을 참지 못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갑자기 연약해졌을까요? 그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가 큰 소리를 쳤지만 예상하지 못한 여종의 질문에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들고 설쳤지만 한 여종의 부드러운 시험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녀가 이 말을 한 것은 베드로를 꼭 해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버렸습니다. 그는 사탄의 유혹에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엄청난 핍박,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핍박 때문에 무너진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이렇게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탄은 이와 같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공격을 합니다. 사탄은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이브를 이용한 것처럼 베드로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한 여종을 이용했습니다. 사탄의 유혹과 공격은 참으로 간교하게 진행이 됨으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닭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들었을 때 주님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61,6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주목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 따르고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사랑의 시선을 거두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주목하셨습니다. 그의 눈에는 한없는 긍휼과 연약한 제자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시험에서 나오는 길은 주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둘 때 타락의 늪에서 나를 건져주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때 베드로의 눈에서 닭 똥 같은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의 강한 자아가 깨어지면서 흘러내리는 통곡과 오열, 참회의 눈물은 쉼이 없었습니다. (그림1, 그림2, 그림3). 그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요14:26절은 말씀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께서는 주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성령의 은사는 방언, 치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저장해 놓을 때 성령께서는 필요할 때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말씀이 생각나자 베드로에게 회복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방성대곡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는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배반한 자신이 한없이 미워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지 못한 자신, 큰 소리쳤지만 지키지 못한 자신이 미웠습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은혜가 임했다는 말입니다. 눈물이 있을 때 우리의 영성은 풍성해집니다. 베드로는 이후로 닭이 울 때 마다 벌떡벌떡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흐르는 한 우리의 자녀들이 살고 가정이 살고 이 나라가 살아날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메말라버리면 자녀가 죽고 교회가 죽고 나라가 죽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눈물이 있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한편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를 희롱하고 그의 눈을 가리고 때리며 누가 쳤는지 알아맞혀 보라면서 선지자 노릇하라고 놀리며 많은 말로 욕을 했습니다. 날이 새자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공회로 끌어 들여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공회는 산헤드린으로서 유대 최고 법원입니다. 대개 70명으로 구성되며 최고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그들은 해가 뜨기 전에 공회를 열어 재판을 시작함으로 불법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법대로 하려고 구색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고 심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말할지라도 그들이 믿지 아니할 것이요 물어도 그들이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은 죽으시지만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후 다시 하나님 나라로 가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고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70b).” 이는 ‘내가 그라’(I AM WHO I AM)는 출 3:14절 말씀을 사용하심으로써 당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신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세 가지 표현을 썼습니다.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세 칭호는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그리스도의 나심이었습니다(2:11, 26). 그리스도로 나신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32; 8:28).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유대 법정에서 열린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정죄하는 재판이라기보다는 그의 죽음의 성격을 규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법자의 동류’로 체포되셨지만 재판 과정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판을 받으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범법자로서 심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부당하고 억울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메시아적인 고난의 사명을 감당하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 받으시고 재판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분명하게 밝히심으로 사형선고를 받으십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였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우리는 가장 복된 인생, 복된 가정, 복된 민족으로 살 수 있습니다. 매일 신명기 양식 말씀을 묵상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말씀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과 대학생들에게 가르쳐서 그대로 살도록 돕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제자 양성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자 양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대일로 가르치고 그대로 살며 그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형식으로든 전할 수 있다면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목요일 새벽 1시에 나에녹 목자님의 전화를 받고 서울 성모 병원에 가서 간암 말기로 임종을 눈앞에 둔 나승덕형제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그날 오후에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인생이 짧은 봄날과 같습니다. 잠깐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 와서 생명을 누리다가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그것보다 복된 삶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이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의미 있는 삶을 산다면 얼마나 값진 삶입니까? 우리 목자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양들에게 전하고 이들을 제자로 키우는 것으로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증거를 들은 그들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고 하면서 더 이상 증거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신성모독죄로 처형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바로 구원자로서 내 대신 죽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대신해서 그는 죽으십니다. 유대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내렸지만 그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형집행권이 있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떤 죄목으로 고발합니까? 23:2절을 보십시오.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 법정에서는 종교적인 이단으로 정죄하고, 로마 법정에서 빌라도에게는 정치적 반역자로 고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정권에 반역을 주도하는 왕으로 몰아갑니다. 본래 그들은 정치적인 왕을 원했고 그런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런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의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자 배신감을 느끼고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나 모순된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빌라도는 그들의 고발대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합니다. 그것은 반역죄에 해당하고, 사형선고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 있는 질문에 네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왕이라고 하셨을지라도 유대인들이 고소하는 그런 죄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어찌하든지 이 사건에 말려들지 않고자 애를 씁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으로서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 알고 그에게 보냅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만나 그에게서 무슨 이적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무 말로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헤롯은 그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빌라도에게 도로 보냅니다. 그도 예수님에게서 무슨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으면 그냥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때려서 놓고자 합니까? 예수님은 유대와 로마 당국에 의해서 여섯 번에 걸쳐서 심문을 받았지만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괘씸죄는 있다고 생각하여 타협점을 찾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면 연민이 생길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명절에 그들에게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하는 로마의 관례에 따라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보내고자 합니다. 빌라도는 무고한 사람을 처형했다는 책임을 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놓고자 말했지만 그들은 다시 소리를 지릅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합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님은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노예나 로마 시민권이 없는 사람으로서 큰 죄를 지은 사람, 로마에 반역죄를 지은 사람을 벌하는 로마의 사형도구였습니다. 로마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인 키케로(Cicero, BC 106-43)는 “십자가형은 짐승 같고 무시무시한 극악한 형벌이며 가혹하고 수치스러운 고난이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형은 가공할 살해 방법이었습니다. 죽기 전까지 희생자의 고통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못을 박으면 고통은 가중되지만 출혈로 인해 사망 시간이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십자가에 달리면 죄수가 힘을 잃고 몸의 무게 때문에 호흡이 힘들어지면서 질식하여 죽게 딥니다.

  유대인들은 왜 이런 혐오스러운 처형을 원했을까요? 그들은 그 많고 많은 사형제도 중에 왜 ‘십자가형’을 택할까요? 그들이 예수님을 무조건 비참하게 죽이자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으로 사형을 당한다면 그의 생애와 가르침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음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시켰습니다(갈 3:13). 예수님이 처형을 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형에 의한 죽음이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형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낙인찍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지심으로써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해방시킨 예수님의 구원사역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빌라도가 최고의 권력을 가졌지만 일반 민중이 요구하는 대로 십자가형을 언도했습니다. 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직업 정치인으로서 타협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권리와 존엄성을 지닌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정치적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결국 어둠의 세력 때문입니다. 그들이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그 뒤에서 어둠의 세력이 힘을 쓴 것입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빌라도도 어둠의 세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이성을 중시하는 그가 어떻게 죄 없으신 예수님은 처형을 당하게 하고, 죄인인 바라바는 놓아 줄 수 있습니까? 마땅히 행한 잘못에 따라 중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중벌에서 벗어나고, 죄가 없는 예수님은 가장 무거운 중벌인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적인 구원진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천 년 전부터 예언한 그대로 언약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심판과 형벌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찬양합니다.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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