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2누가복음 43강(21:5-38) 사람들이 인자자 오는 것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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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누가복음 제43강
본문 누가복음 21:5-38
요절 누가복음 21:27
사람들이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우리는 지금 역사의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요? 지금 인류의 종말을 나타내는 운명의 날 시계는 11시 55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핵과학자들과 환경, 정치, 경제적인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5-6), 종말의 징조(7-19), 예루살렘의 멸망(20-24),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을 대하는 태도(25-38) 등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가 종말의 시대를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5-6). 예수님은 종말론의 서론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 중 몇 사람을 가리킵니다. 당시 성전의 아름다운 돌은 솔로몬 행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행각의 길이는 약 470m, 왕실 행각은 160개 기둥으로 장식되었으며, 그 길이는 약 280m였습니다. 제자들은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높이 120m에 달하는 대리석 기둥들을 경이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성전의 기초가 대단히 튼튼했기 때문에 원래 성전 터가 지금까지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 또한 대 헤롯이 바친 사람의 키 크기만한 금제 포도나무, 아그립바가 바친 황금 사슬을 위시하여 각국의 군왕들, 유대인 부호들이 바친 보물들로 성전은 장식되었고,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의 안정성과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상징성 때문에 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제자들에게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 말씀은 베스파시아누스가 68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했다가 네로의 자살 소식을 듣고 로마에 돌아가 황제에 오르고, 다시 그의 아들 디도를 보내어 70년에 다시 포위하고 3일만에 예루살렘 주의에 토성을 완성하고 공격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디도 자신은 성전의 화려함에 감탄하여 이를 보존하고자 하였으나 한 병사가 불붙은 횃불을 성전 안에 던져 전소시켰습니다. 그 후에도 성전은 70여 차례에 걸친 파괴 작업으로 나중에는 그 터전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전이 완성된 것은 주후 63년경인데 헤롯대왕이 기공할 때부터 82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에 멸망한 것을 볼 때 성전을 완성하고 7-8년만에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 외형만 장식하던 종교, 불신자 헤롯의 정치적 의도에서 건립된 성전의 말로는 이와 같이 비참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문화를 볼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많습니다. 컴퓨터의 발달로 인한 정보 통신 과학 문명, 비행기와 우주선, 건축 공학의 발달로 인한 초고층 빌딩들, 놀라운 의학기술 등 내가 살아서 이런 시대를 본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문명들이 종말을 맞이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21개의 문명들이 발생, 성장, 절정, 퇴보, 파멸의 길을 걷는다고 밝혔습니다. 로마 문명도 천년을 갔지만 결국 무너졌습니다. 지금 미국도 절정을 지나서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한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마을과 같습니다. 이렇게 발달한 지구 문명이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의 참되고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제자들 같이 여기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과학문명이 다 지나갈 것들임을 알고 이러한 것들에 매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종말의 징조(7-19). 예수님의 충격적인 예언을 들은 제자들은 언제 성전이 무너지며 그 징조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파괴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로 생각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들이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한 예루살렘 멸망과 인류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2000년 동안 유리방황하였습니다. 그런데 1948년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24절을 보면 마지막 종말의 때에 예루살렘은 다시 한 번 파괴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징조들이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최근의 일들은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재난들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진은 16세기에는 258회, 17세기에는 378회, 18세기에는 640회, 19세기에는 2119회, 20-21세기에는 더 많고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징조들은 구체적으로 거짓 메시야의 출현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짜 예수는 1100명, 한국에만 300명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징조를 구하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쉽게 기만당할 수 있습니다.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살후 2:9,10). 또 난리와 소요의 소문이 많아집니다. 전쟁 소식이 많아지지만 끝은 아직 아닙니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는 2차례의 세계 대전을 비롯하여 한국 전쟁, 월남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리카의 부족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등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습니다. 쓰나미, 핵 발전소에서 일어나는 사고 등과 같은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기상변화와 같은 큰 징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을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는 핍박이 있습니다. 21세기에 세계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핍박이 아니라 국가적인 핍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슬람 국가들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을 죽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들로서 기독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됩니다. 시련을 통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기독교는 성장해왔습니다.
우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변호하는 일로 염려하기보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이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에게 배반을 당하여 핍박자들에게 넘겨지게 되고 몇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무슬림 국가와 공산주의 나라에서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예수님의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인내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인내는 믿음이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인내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무서운 시련과 핍박이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가짜를 구별시켜줍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극심한 핍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념적으로 좌파에 속한 그룹들에 의한 비난과 적대적인 분위기가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많다보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런 미성숙하고 가짜 신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기독교 전체에 악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에 힘을 써야 합니다. 신자들이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생활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캠퍼스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도 우리의 사명지입니다. 특히 사람들은 신자의 삶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루살렘의 멸망(20-24). 예수님은 40년 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앞에서 말한대로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서 68년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습니다. 때마침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일백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을 때 이 예언을 기억한 성도들은 요단강 계곡 베뢰아 지방의 펠라로 피난을 가서 생명을 보존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성안에서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함락됐을 때 110만명이 죽고 9만7천명이 각지에 포로로 잡혀갔다고 합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죽음이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함락은 율법을 범함으로 받은 것이지만 신약에서의 형벌은 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고 자신들이 그렇게 오기를 열망했지만 막상 왔을 때 메시야를 거부하고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통치자들의 지배를 받다가 1948년 5월 독립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67년 6일 전쟁 때에 이스라엘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옛 영토 대부분과 통곡의 벽 일부가 회복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630년대 이슬람교도들인 아랍 사람들이 무력으로 정복하고 솔로몬 성전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대사원을 건축했습니다. 솔로몬 성전터에 세워진 이슬람교의 대사원이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 불화가 그치지 않는 원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에게 지배를 받습니다(롬 11:25, 계11:2).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일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계 140여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복음이 먼저 전 세계에 충만해져야만 세상의 끝이 올 것입니다.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전도종족은 11000여 종족에 이릅니다. 그들은 세계 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복음은 모든 나라에서 모든 나라로의 선교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적 가치를 넘어 선교의 수평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홍대 캠퍼스에 있는 학생들의 80% 이상이 아직도 복음에 대해서 숨겨지고 간과된 채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할 것입니까? 바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날마다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이를 놓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때가 지나면 복음 전도의 문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을 대하는 태도(25-38).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해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일어날 일은 우주적인 혼란입니다. 자연계 자체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 우주가 타락한 인간이 당하는 곤경을 함께 겪어 왔습니다(롬 8장, 벧후 3장). 인간에게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전 우주도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27).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재림하실 때도 구름 가운데 하늘에서 땅으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오셨을 때는 사람들이 잘 몰랐습니다. 본 사람이 있고 못 본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림 때는 모두가 다 보게 되고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헷갈릴 필요도 없고, 미혹에 빠질 일도 없습니다. 안 보고 싶다고 해서 안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영원토록 계속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새로운 세상이 임하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됩니다. 우리는 갱신된 세계와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다시 오셔서 영원한 통치를 하실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한시적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인생관, 좁고 편협한 세계관을 벗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영원과 잇대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번 뿐인 이 세상에서의 삶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고 예수님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임박한 환란과 자연의 재앙에 대한 그림은 우리를 비관적이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큰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회복하고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를 확신 가운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십시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줄기에서 싹이 나고 여름이 가까이 오면 잎사귀들이 무성해집니다. 자연의 변화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듯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4-3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염려하면 방탕하고 술 취하게 되고, 방탕하고 술 취하고 나면 염려가 생기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마음이 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게 될 때 영적인 것에 둔감해져서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므로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덫이 갑자기 짐승을 덮치는 것같이 예수님의 재림은 예측불허입니다. 재림의 날이 덫처럼 멸망을 가져오는 날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것들로 둔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최후의 기회나 협상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이미 결정한 선택이 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그 날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캠퍼스 선교, 가정과 직장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가정생활에 충실한 것, 캠퍼스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삶은 장사하는 사람과 같고, 농부와 같이 인내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삶이 팍팍하기 때문에 순간순간 염려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염려대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면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새 성전인 교회는 끝없이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과 계속해서 그에게 말씀을 배우는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누가복음 21:5-38
요절 누가복음 21:27
사람들이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우리는 지금 역사의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요? 지금 인류의 종말을 나타내는 운명의 날 시계는 11시 55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핵과학자들과 환경, 정치, 경제적인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5-6), 종말의 징조(7-19), 예루살렘의 멸망(20-24),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을 대하는 태도(25-38) 등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가 종말의 시대를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5-6). 예수님은 종말론의 서론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 중 몇 사람을 가리킵니다. 당시 성전의 아름다운 돌은 솔로몬 행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행각의 길이는 약 470m, 왕실 행각은 160개 기둥으로 장식되었으며, 그 길이는 약 280m였습니다. 제자들은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높이 120m에 달하는 대리석 기둥들을 경이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성전의 기초가 대단히 튼튼했기 때문에 원래 성전 터가 지금까지도 일부 남아 있습니다. 또한 대 헤롯이 바친 사람의 키 크기만한 금제 포도나무, 아그립바가 바친 황금 사슬을 위시하여 각국의 군왕들, 유대인 부호들이 바친 보물들로 성전은 장식되었고,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건물의 안정성과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상징성 때문에 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제자들에게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 말씀은 베스파시아누스가 68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했다가 네로의 자살 소식을 듣고 로마에 돌아가 황제에 오르고, 다시 그의 아들 디도를 보내어 70년에 다시 포위하고 3일만에 예루살렘 주의에 토성을 완성하고 공격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디도 자신은 성전의 화려함에 감탄하여 이를 보존하고자 하였으나 한 병사가 불붙은 횃불을 성전 안에 던져 전소시켰습니다. 그 후에도 성전은 70여 차례에 걸친 파괴 작업으로 나중에는 그 터전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전이 완성된 것은 주후 63년경인데 헤롯대왕이 기공할 때부터 82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에 멸망한 것을 볼 때 성전을 완성하고 7-8년만에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 외형만 장식하던 종교, 불신자 헤롯의 정치적 의도에서 건립된 성전의 말로는 이와 같이 비참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문화를 볼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많습니다. 컴퓨터의 발달로 인한 정보 통신 과학 문명, 비행기와 우주선, 건축 공학의 발달로 인한 초고층 빌딩들, 놀라운 의학기술 등 내가 살아서 이런 시대를 본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문명들이 종말을 맞이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21개의 문명들이 발생, 성장, 절정, 퇴보, 파멸의 길을 걷는다고 밝혔습니다. 로마 문명도 천년을 갔지만 결국 무너졌습니다. 지금 미국도 절정을 지나서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한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마을과 같습니다. 이렇게 발달한 지구 문명이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의 참되고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제자들 같이 여기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과학문명이 다 지나갈 것들임을 알고 이러한 것들에 매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종말의 징조(7-19). 예수님의 충격적인 예언을 들은 제자들은 언제 성전이 무너지며 그 징조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파괴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로 생각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들이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한 예루살렘 멸망과 인류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2000년 동안 유리방황하였습니다. 그런데 1948년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24절을 보면 마지막 종말의 때에 예루살렘은 다시 한 번 파괴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징조들이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최근의 일들은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재난들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진은 16세기에는 258회, 17세기에는 378회, 18세기에는 640회, 19세기에는 2119회, 20-21세기에는 더 많고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징조들은 구체적으로 거짓 메시야의 출현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짜 예수는 1100명, 한국에만 300명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징조를 구하는 일에만 매달린다면 쉽게 기만당할 수 있습니다.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살후 2:9,10). 또 난리와 소요의 소문이 많아집니다. 전쟁 소식이 많아지지만 끝은 아직 아닙니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는 2차례의 세계 대전을 비롯하여 한국 전쟁, 월남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리카의 부족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등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습니다. 쓰나미, 핵 발전소에서 일어나는 사고 등과 같은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기상변화와 같은 큰 징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 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을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는 핍박이 있습니다. 21세기에 세계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핍박이 아니라 국가적인 핍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슬람 국가들은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을 죽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들로서 기독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됩니다. 시련을 통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기독교는 성장해왔습니다.
우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변호하는 일로 염려하기보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이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에게 배반을 당하여 핍박자들에게 넘겨지게 되고 몇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무슬림 국가와 공산주의 나라에서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예수님의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인내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인내는 믿음이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인내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무서운 시련과 핍박이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가짜를 구별시켜줍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극심한 핍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념적으로 좌파에 속한 그룹들에 의한 비난과 적대적인 분위기가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많다보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런 미성숙하고 가짜 신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기독교 전체에 악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에 힘을 써야 합니다. 신자들이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생활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캠퍼스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도 우리의 사명지입니다. 특히 사람들은 신자의 삶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루살렘의 멸망(20-24). 예수님은 40년 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앞에서 말한대로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서 68년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습니다. 때마침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일백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을 때 이 예언을 기억한 성도들은 요단강 계곡 베뢰아 지방의 펠라로 피난을 가서 생명을 보존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성안에서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함락됐을 때 110만명이 죽고 9만7천명이 각지에 포로로 잡혀갔다고 합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죽음이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함락은 율법을 범함으로 받은 것이지만 신약에서의 형벌은 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고 자신들이 그렇게 오기를 열망했지만 막상 왔을 때 메시야를 거부하고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통치자들의 지배를 받다가 1948년 5월 독립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67년 6일 전쟁 때에 이스라엘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옛 영토 대부분과 통곡의 벽 일부가 회복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630년대 이슬람교도들인 아랍 사람들이 무력으로 정복하고 솔로몬 성전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대사원을 건축했습니다. 솔로몬 성전터에 세워진 이슬람교의 대사원이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 불화가 그치지 않는 원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에게 지배를 받습니다(롬 11:25, 계11:2).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일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계 140여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복음이 먼저 전 세계에 충만해져야만 세상의 끝이 올 것입니다.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전도종족은 11000여 종족에 이릅니다. 그들은 세계 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복음은 모든 나라에서 모든 나라로의 선교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적 가치를 넘어 선교의 수평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홍대 캠퍼스에 있는 학생들의 80% 이상이 아직도 복음에 대해서 숨겨지고 간과된 채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할 것입니까? 바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날마다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이를 놓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때가 지나면 복음 전도의 문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을 대하는 태도(25-38).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해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일어날 일은 우주적인 혼란입니다. 자연계 자체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 우주가 타락한 인간이 당하는 곤경을 함께 겪어 왔습니다(롬 8장, 벧후 3장). 인간에게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전 우주도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27).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재림하실 때도 구름 가운데 하늘에서 땅으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오셨을 때는 사람들이 잘 몰랐습니다. 본 사람이 있고 못 본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림 때는 모두가 다 보게 되고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헷갈릴 필요도 없고, 미혹에 빠질 일도 없습니다. 안 보고 싶다고 해서 안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영원토록 계속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새로운 세상이 임하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됩니다. 우리는 갱신된 세계와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다시 오셔서 영원한 통치를 하실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한시적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인생관, 좁고 편협한 세계관을 벗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영원과 잇대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번 뿐인 이 세상에서의 삶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고 예수님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임박한 환란과 자연의 재앙에 대한 그림은 우리를 비관적이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큰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회복하고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를 확신 가운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십시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줄기에서 싹이 나고 여름이 가까이 오면 잎사귀들이 무성해집니다. 자연의 변화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듯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4-3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염려하면 방탕하고 술 취하게 되고, 방탕하고 술 취하고 나면 염려가 생기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마음이 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게 될 때 영적인 것에 둔감해져서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므로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덫이 갑자기 짐승을 덮치는 것같이 예수님의 재림은 예측불허입니다. 재림의 날이 덫처럼 멸망을 가져오는 날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것들로 둔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최후의 기회나 협상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이미 결정한 선택이 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그 날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캠퍼스 선교, 가정과 직장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가정생활에 충실한 것, 캠퍼스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삶은 장사하는 사람과 같고, 농부와 같이 인내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삶이 팍팍하기 때문에 순간순간 염려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염려대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면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새 성전인 교회는 끝없이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과 계속해서 그에게 말씀을 배우는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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