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18강(12:28-44)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페이지 정보

본문
2012년 봄 마가복음 18강
말씀 | 마가복음 12:28-34
요절 | 마가복음 12:30,31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기독교의 핵심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수없이 반복되는 드라마, 연극, 영화의 주제입니다. 또 사랑은 아무리 말해도 지겹지 않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식상하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간다는 것은 사랑이 자라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유일한 주라는 것은 다신교 문화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유일한 창조주시오 구원자이십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유일한 주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가 있지만 하나이십니다. 그는 나누이지 않습니다. 요10: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높이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서 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은 전신 활동 전체, 특히 정서의 중심이고, 목숨은 육적 생명, 뜻은 지성, 힘은 능력이 머무는 곳들입니다. 결국 인격 전체를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특별한 책입니다. 성경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슬퍼하시는지 무엇에 화를 내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저는 이번에 일본 사람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 신성모독적인 감정을 갖는 것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다신교 사회에서 일왕은 신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 신에게 사과하라는 말은 신성모독과 같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일왕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물론 엄청난 배상금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가 한 나라 전체를 이렇게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에서도 그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잘못되면 역사에 대한 인식, 진실에 대한 인식 등 모든 것이 잘못 나가게 됩니다.
사랑이란 영혼을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정서적으로 감정을 다해야 합니다. 거룩한 감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감정,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고 싶은 그 마음으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성도간의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도 간의 거룩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은 신비롭습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되 힘을 다해야 합니다. 나의 육체적인 힘을 다해야 합니다. 힘을 다하라는 말씀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두 렙돈을 드린 과부와 같이 우리의 진심을 물질로 표현해서 드려야 합니다. 최선의 것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최고의 진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머리를 쓰고, 마음을 쓰고, 힘을 써서 최고,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눅7:47).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말은 많은 죄들을 용서받았다는 뜻입니다. 적게 사랑을 받았다는 말은 적게 용서받았다는 말입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을 돌이켜보면 회개할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많이 받으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가다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가끔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자주, 깊이 받고 또 그 사랑이 쌓일 때 우리는 자기 목숨도 내 놓는 큰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은 많은데 베푸는 것은 너무 적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열매를 드렸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가 헌신한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불평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내가 드린 대로 나오지 않지만 주님을 사랑함으로 헌신한 것들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명령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4:9-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때 모든 다른 의무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이 적용되는 곳에서는 어떤 계명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마음이 공허해지고 고독하고 허무해집니다. 어리석어집니다. 결국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게 될 때 각종 죄를 짓게 됩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지 못할 때 선한 것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적당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린 여인과 같이, 모든 것을 쏟아 붓듯이 열정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만한 자격과 가치를 지닌 분이십니다. 대하 16:9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에게 향하면 우리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만 하지 말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우고 적당히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고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요3:16절에서 사랑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을 때 그는 가장 귀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랑이라는 히브리어는 ‘아하브’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아하브’는 ‘에하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에하브는 “내가 준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을 취하기보다 주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에게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회개하는 마음을 드립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또 우리에게 맡기신 양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나타납니다. 사무엘상15:22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19-2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웃을 사랑하되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한 뿌리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죄인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사랑하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개념을 넓히셨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원수의 죄까지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라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불의를 사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를 목 베이는 박춘권에게 분노와 증오대신 사랑과 기도의 손길을 펴면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마귀 같은 공산당 안재선에게 분노와 증오의 시선을 보내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폈고, 자기를 총살한 인민군에게 분노와 증오의 말을 내 뱉는 대신 그를 위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드린 후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의 피는 아직까지 극도로 세속화되어가는 한국교회를 정화시키는 정화제와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되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과 이기심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기 성취를 이루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행복을 추구하고 그가 자기 성취를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당할 사람을 건지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완악한 죄인을 사랑하여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까지 수많은 죄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속이 문드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속이 문드러지기까지 나중에 자신의 온 몸이 문드러지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저는 한 번에 큰 사랑을 하고 마는 것보다 우리 삶에서 작은 사랑들이 자주 반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한 목자님은 한 학생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고 어려우면 튀김 닭을 사서 집에 심방을 하고 자녀와 같이 극진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는 누구에게나 그런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목자님은 자기 친구가 집이 없는 것을 알고 자기 집에서 재워주고 사랑으로 섬깁니다. 우리가 양에게 쏟는 사랑을 동역자들에게 동일하게 쏟을 수 있습니다. 한 사모님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 사모님을 심방하여 돌보고 대화를 해 줍니다. 손을 잡고 대화할 때 어려움을 겪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 외에 제가 알지 못하는 사랑, 또 말하지 못한 더 큰 사랑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뜨겁게 열심히 사랑할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가 이웃을 이와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은 누구입니까? 먼저 그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기회가 되는 대로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말로, 선물로, 먼저 인사함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사랑은 연습하고 훈련해야 자라납니다. 우리가 열심히 또 뜨겁게 힘써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자기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사이에, 우리 공동체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작지만 많은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캠퍼스와 이 나라와 세계에 세워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2:28-34
요절 | 마가복음 12:30,31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기독교의 핵심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수없이 반복되는 드라마, 연극, 영화의 주제입니다. 또 사랑은 아무리 말해도 지겹지 않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식상하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간다는 것은 사랑이 자라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유일한 주라는 것은 다신교 문화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유일한 창조주시오 구원자이십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유일한 주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가 있지만 하나이십니다. 그는 나누이지 않습니다. 요10: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높이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서 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은 전신 활동 전체, 특히 정서의 중심이고, 목숨은 육적 생명, 뜻은 지성, 힘은 능력이 머무는 곳들입니다. 결국 인격 전체를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특별한 책입니다. 성경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슬퍼하시는지 무엇에 화를 내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저는 이번에 일본 사람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 신성모독적인 감정을 갖는 것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다신교 사회에서 일왕은 신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 신에게 사과하라는 말은 신성모독과 같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일왕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물론 엄청난 배상금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가 한 나라 전체를 이렇게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에서도 그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잘못되면 역사에 대한 인식, 진실에 대한 인식 등 모든 것이 잘못 나가게 됩니다.
사랑이란 영혼을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정서적으로 감정을 다해야 합니다. 거룩한 감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감정,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고 싶은 그 마음으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성도간의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도 간의 거룩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은 신비롭습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되 힘을 다해야 합니다. 나의 육체적인 힘을 다해야 합니다. 힘을 다하라는 말씀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두 렙돈을 드린 과부와 같이 우리의 진심을 물질로 표현해서 드려야 합니다. 최선의 것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최고의 진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머리를 쓰고, 마음을 쓰고, 힘을 써서 최고,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눅7:47).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말은 많은 죄들을 용서받았다는 뜻입니다. 적게 사랑을 받았다는 말은 적게 용서받았다는 말입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을 돌이켜보면 회개할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많이 받으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가다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가끔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자주, 깊이 받고 또 그 사랑이 쌓일 때 우리는 자기 목숨도 내 놓는 큰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은 많은데 베푸는 것은 너무 적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열매를 드렸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가 헌신한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불평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내가 드린 대로 나오지 않지만 주님을 사랑함으로 헌신한 것들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명령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4:9-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때 모든 다른 의무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이 적용되는 곳에서는 어떤 계명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마음이 공허해지고 고독하고 허무해집니다. 어리석어집니다. 결국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게 될 때 각종 죄를 짓게 됩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지 못할 때 선한 것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적당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린 여인과 같이, 모든 것을 쏟아 붓듯이 열정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만한 자격과 가치를 지닌 분이십니다. 대하 16:9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에게 향하면 우리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만 하지 말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우고 적당히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고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요3:16절에서 사랑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을 때 그는 가장 귀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랑이라는 히브리어는 ‘아하브’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아하브’는 ‘에하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에하브는 “내가 준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을 취하기보다 주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에게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회개하는 마음을 드립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또 우리에게 맡기신 양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나타납니다. 사무엘상15:22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19-2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웃을 사랑하되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한 뿌리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죄인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사랑하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개념을 넓히셨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원수의 죄까지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라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불의를 사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를 목 베이는 박춘권에게 분노와 증오대신 사랑과 기도의 손길을 펴면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마귀 같은 공산당 안재선에게 분노와 증오의 시선을 보내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폈고, 자기를 총살한 인민군에게 분노와 증오의 말을 내 뱉는 대신 그를 위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드린 후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의 피는 아직까지 극도로 세속화되어가는 한국교회를 정화시키는 정화제와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되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과 이기심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기 성취를 이루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행복을 추구하고 그가 자기 성취를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당할 사람을 건지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완악한 죄인을 사랑하여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까지 수많은 죄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속이 문드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속이 문드러지기까지 나중에 자신의 온 몸이 문드러지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저는 한 번에 큰 사랑을 하고 마는 것보다 우리 삶에서 작은 사랑들이 자주 반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한 목자님은 한 학생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고 어려우면 튀김 닭을 사서 집에 심방을 하고 자녀와 같이 극진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는 누구에게나 그런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목자님은 자기 친구가 집이 없는 것을 알고 자기 집에서 재워주고 사랑으로 섬깁니다. 우리가 양에게 쏟는 사랑을 동역자들에게 동일하게 쏟을 수 있습니다. 한 사모님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 사모님을 심방하여 돌보고 대화를 해 줍니다. 손을 잡고 대화할 때 어려움을 겪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 외에 제가 알지 못하는 사랑, 또 말하지 못한 더 큰 사랑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뜨겁게 열심히 사랑할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가 이웃을 이와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은 누구입니까? 먼저 그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기회가 되는 대로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말로, 선물로, 먼저 인사함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사랑은 연습하고 훈련해야 자라납니다. 우리가 열심히 또 뜨겁게 힘써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자기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사이에, 우리 공동체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작지만 많은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캠퍼스와 이 나라와 세계에 세워가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e5f7ea4bfc9a7a6413ba024934c5e6f7.hwp (0byte)
23회 다운로드 | DATE : 2012-08-19 14:20:3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