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17강(11:20-33) 하나님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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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마가복음 제 17 강
말씀 | 마가복음 11:20-25
요절 | 마가복음 11:22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연 세계 속에서 일하지만 초자연적인 일도 이루십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일,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이루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마음을 여미고 그를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본문은 제자들에게 믿음(22-24), 기도(24-25), 용서(25)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의 이면에는 성전의 심판으로 인해 야기될 새로운 영적 원리와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새 성전을 건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옛 성전에서 드린 제사와 비교가 안 되는 ‘모든 사람의 대속물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믿음(20-24).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하셔서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습니다. 가서 보니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사 그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는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어제 그 길을 지날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쭈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릴 수 있는가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하나님을 믿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주로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기적, 자연세계를 지배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금의 기적은 조금 달랐습니다. 저주와 심판의 권세를 나타내신 기적입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부패한 성전과 열매 없는 종교지도자들의 영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이를 저주하셨다는 것은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의 구심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해도 영성이 없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며 부패했을 때 하나님은 저주하시고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새 성전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경험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까지 목자 예수님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자립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저의 자녀들이 아비된 저를 믿습니다. 믿기 때문에 삶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과 지혜 등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도 아이들이 커갈수록 나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나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광풍으로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야이로에게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20절에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생깁니다. 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에 마음에 확신과 평안을 주십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흔들림이 없는 확신이 생길 때 그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의 이안드레, 사라 선교사님들은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그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때 믿음으로 자기 소개서를 만들어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현재의 직장을 얻고 자립을 하며 동역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김베스 선교사님은 영국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제자 양성의 열매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벼랑 끝에 설 때에 죽을 것 같으나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믿는 자들을 통해서 그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문맥상에서 생각해 볼 때 이제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성전을 믿지 말고, 새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자체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위엄 있고 화려한 건물이나 제도, 종교의식과 전통은 힘이 없습니다. 진정한 능력과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새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웅장함과 거대함을 신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전 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대상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의 가족도 아닙니다. 동역자도 아닙니다. 나의 능력도 아닙니다. 내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계획을 열고 계십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사람과 물질과 과학을 믿기보다 능력과 희망과 가능성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 외적인 것, 부수적인 것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새 성전이요, 구원자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개척기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열매가 많았습니다. 기적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때에 비해서 지금 회심의 역사, 변화와 기적들이 적은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보다 경험과 우리의 지식과 환경을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내 안에 회개의 역사, 변화의 역사, 성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생명의 생수의 강들이 내 속에 흘러넘치게 됩니다.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절망이 될 때에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떤 도전을 할 수 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 산은 일차적으로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한 것은 성전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전을 바다에 던져 심판하실 것을 말해줍니다. 그 시대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태산과 같았습니다. 산은 요지부동이고, 불가능한 일을 상징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을 때 거대한 죄의 태산이 옮겨지고 세속주의, 인본주의의 산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도저히 변화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양들도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6-7).”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단순하게 전할 때 그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과 같습니다. 밥이 맛이 있건, 맛이 없건 매일 먹는 것처럼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말씀을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그때 힘을 얻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때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됩니다. 의심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내면의 병입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들어올 때에 내가 잘못된 것을 구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옳게 구하고 있다면 의심을 물리치고 구하는 것을 인내로 추구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시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고 있는데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이 내니 무서워 말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 갔습니다. 그가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님이 그 손을 내밀어 즉시 그를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의심할 때 베드로는 물 속에 빠져 들어 갔습니다. 의심이 들어오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보다 환경이나 상황을 보고 의심하게 되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무엇을 얻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믿는 바를 입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믿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다 보면 우리의 행동이 그렇게 바뀌고 마침내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능력을 덧입고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기도만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열정이 생깁니다. 노력하는 은총이 임합니다. 한계를 뛰어넘어 일할 수 있습니다. 김재범 선수는 죽기 살기로 하다가 패했지만 죽기로 했을 때 승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부활 신앙이 생겨서 고난을 사랑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산은 너무나 거대해서 움직일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산도 들어서 바다에 던지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진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상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태산도 들어서 바다에 던지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1985년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을 통해서 소련 개척의 기도제목을 제시하였습니다. 당시에 소련은 철의 장막으로서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개방의 문,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중국과 동유럽이 그렇게 열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북한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북한 선교의 문도 여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조국의 평화 통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41:10절은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이 연약한 나, 작심삼일인 나, 한계적인 나를 붙잡아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우리를 통해서 홍대 1/3일이 회심하고 이곳이 한국 부흥의 진원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학생 제자 양성 역사가 활발히 이루어져서 학생 중심의 사역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마음에 평강과 확신이 들 때까지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기도. 믿음의 표현은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기도할 때 그것이 응답받을 때까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합니다.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한 맺힌 과부와 같이 밤낮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소원까지도 다 아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막연하게 구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추상적으로 구하지 말고 마음에 그림을 그리면서 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33:3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비밀스러운 일을 베풀어 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합니다. 또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얻지 못합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주시기 위해서 천국의 보고를 열어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라고 했으니 우리는 한계를 정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구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구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자식이 하나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음으로 그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은 여름수양회에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주님은 수양회를 말씀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저에게도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제가 기대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어 주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내가 구하는 것들이 응답되지 않아서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일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면 내게 최선의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능력의 근원입니다.
셋째, 용서. 기도할 때 우리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우리가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에 형제에 대해서 앙심을 품지 말고 용서하고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님이 들어주지 않습니다(시 66:18).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때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평화로운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만을 성취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고 서로 사랑하고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기 전에 형제와 먼저 화해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내게 상처를 준 사람, 내게 죄를 지은 누구를 용서하다면 내 마음에 있는 태산을 옮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만이 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때 그와 나 사이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많은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한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죄의 세력이 멸해지고 생명 구원 역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1:20-25
요절 | 마가복음 11:22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연 세계 속에서 일하지만 초자연적인 일도 이루십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일,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이루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마음을 여미고 그를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본문은 제자들에게 믿음(22-24), 기도(24-25), 용서(25)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의 이면에는 성전의 심판으로 인해 야기될 새로운 영적 원리와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새 성전을 건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옛 성전에서 드린 제사와 비교가 안 되는 ‘모든 사람의 대속물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믿음(20-24).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하셔서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습니다. 가서 보니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사 그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는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어제 그 길을 지날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쭈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릴 수 있는가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하나님을 믿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주로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기적, 자연세계를 지배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금의 기적은 조금 달랐습니다. 저주와 심판의 권세를 나타내신 기적입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부패한 성전과 열매 없는 종교지도자들의 영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이를 저주하셨다는 것은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의 구심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해도 영성이 없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며 부패했을 때 하나님은 저주하시고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새 성전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경험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까지 목자 예수님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자립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저의 자녀들이 아비된 저를 믿습니다. 믿기 때문에 삶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능력과 지혜 등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도 아이들이 커갈수록 나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나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광풍으로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야이로에게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20절에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 생깁니다. 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에 마음에 확신과 평안을 주십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흔들림이 없는 확신이 생길 때 그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의 이안드레, 사라 선교사님들은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그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때 믿음으로 자기 소개서를 만들어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현재의 직장을 얻고 자립을 하며 동역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김베스 선교사님은 영국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제자 양성의 열매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벼랑 끝에 설 때에 죽을 것 같으나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믿는 자들을 통해서 그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문맥상에서 생각해 볼 때 이제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성전을 믿지 말고, 새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자체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위엄 있고 화려한 건물이나 제도, 종교의식과 전통은 힘이 없습니다. 진정한 능력과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새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웅장함과 거대함을 신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전 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대상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의 가족도 아닙니다. 동역자도 아닙니다. 나의 능력도 아닙니다. 내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계획을 열고 계십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사람과 물질과 과학을 믿기보다 능력과 희망과 가능성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 외적인 것, 부수적인 것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새 성전이요, 구원자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개척기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열매가 많았습니다. 기적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때에 비해서 지금 회심의 역사, 변화와 기적들이 적은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보다 경험과 우리의 지식과 환경을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내 안에 회개의 역사, 변화의 역사, 성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생명의 생수의 강들이 내 속에 흘러넘치게 됩니다.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절망이 될 때에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떤 도전을 할 수 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 산은 일차적으로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한 것은 성전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전을 바다에 던져 심판하실 것을 말해줍니다. 그 시대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태산과 같았습니다. 산은 요지부동이고, 불가능한 일을 상징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을 때 거대한 죄의 태산이 옮겨지고 세속주의, 인본주의의 산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도저히 변화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양들도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6-7).”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단순하게 전할 때 그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과 같습니다. 밥이 맛이 있건, 맛이 없건 매일 먹는 것처럼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말씀을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그때 힘을 얻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때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됩니다. 의심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내면의 병입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들어올 때에 내가 잘못된 것을 구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옳게 구하고 있다면 의심을 물리치고 구하는 것을 인내로 추구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시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고 있는데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이 내니 무서워 말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 갔습니다. 그가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님이 그 손을 내밀어 즉시 그를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의심할 때 베드로는 물 속에 빠져 들어 갔습니다. 의심이 들어오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보다 환경이나 상황을 보고 의심하게 되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무엇을 얻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믿는 바를 입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믿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다 보면 우리의 행동이 그렇게 바뀌고 마침내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능력을 덧입고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기도만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열정이 생깁니다. 노력하는 은총이 임합니다. 한계를 뛰어넘어 일할 수 있습니다. 김재범 선수는 죽기 살기로 하다가 패했지만 죽기로 했을 때 승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부활 신앙이 생겨서 고난을 사랑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산은 너무나 거대해서 움직일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산도 들어서 바다에 던지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진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상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태산도 들어서 바다에 던지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1985년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을 통해서 소련 개척의 기도제목을 제시하였습니다. 당시에 소련은 철의 장막으로서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개방의 문,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중국과 동유럽이 그렇게 열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북한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북한 선교의 문도 여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조국의 평화 통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41:10절은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이 연약한 나, 작심삼일인 나, 한계적인 나를 붙잡아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우리를 통해서 홍대 1/3일이 회심하고 이곳이 한국 부흥의 진원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학생 제자 양성 역사가 활발히 이루어져서 학생 중심의 사역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마음에 평강과 확신이 들 때까지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기도. 믿음의 표현은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기도할 때 그것이 응답받을 때까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합니다.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한 맺힌 과부와 같이 밤낮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소원까지도 다 아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막연하게 구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추상적으로 구하지 말고 마음에 그림을 그리면서 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33:3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비밀스러운 일을 베풀어 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합니다. 또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얻지 못합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주시기 위해서 천국의 보고를 열어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라고 했으니 우리는 한계를 정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구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구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자식이 하나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음으로 그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은 여름수양회에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주님은 수양회를 말씀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저에게도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제가 기대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어 주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내가 구하는 것들이 응답되지 않아서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일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면 내게 최선의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능력의 근원입니다.
셋째, 용서. 기도할 때 우리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우리가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에 형제에 대해서 앙심을 품지 말고 용서하고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님이 들어주지 않습니다(시 66:18).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때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평화로운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만을 성취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고 서로 사랑하고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기 전에 형제와 먼저 화해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내게 상처를 준 사람, 내게 죄를 지은 누구를 용서하다면 내 마음에 있는 태산을 옮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만이 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때 그와 나 사이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많은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한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죄의 세력이 멸해지고 생명 구원 역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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