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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12강(8:27-38) 주는 그리스도(이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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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99회 작성일 12-08-07 17:53

본문

말씀/마가복음 8:27-38
요절/마가복음 8:29

        주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지만, 따르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 따르지 않고는 각자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누구나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예수님은 사람이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은 그런 분이라는 말인가? 내가 누구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요구할 수 없지 않는가? 나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강요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과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져야 합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있지만 따르고자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리스도란 무엇입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세상 죄를 짊어지신 분이요, 구원자이십니다.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 세속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는 분, 삶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 사람의 속박, 눌림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 악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거니와.”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오되.” 또한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으리니.”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하면 그 사람에게는 목자가 있습니다. 그를 인도할 선한 목자가 있습니다. 사람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포도나무가 있고, 그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내 죄를 담당하실 분, 내 모든 무거운 짐을 지실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 반대가 됩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죄와 악으로부터의 구원, 사람으로부터의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목자가 없습니다. 목자가 없으니 사람이 오직 자기 힘, 자기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내 죄, 내 인생의  짐을 져줄 그리스도가 없으니 내 힘으로 모든 짐을 져야 합니다. 제대로 지면 다행이지만 질 수 없으면 사람을 의지하고자 합니다. 사람에게서 위로와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살면 가까운 사람을 얼마나 부담스럽게 하고 괴롭게 할뿐만 아니라, 얼마나 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듭니까? 이를 아는 사람은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에게서 힘을 얻으니 사람에게서 자유합니다. 평화를 얻습니다.
 한 능력 있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성취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목자님은 믿음 있고 유능한 한 형제를 소개하면서, 자기 꿈을 내려놓고 형제를 잘 내조하고 또 목자생활을 하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자기 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절하고 집으로 오면서 그래도 기도는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으로 와서 밤새 기도하니 그 결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했습니다. 아들 셋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남편 때문에 자기 꿈을 포기해야 했고, 가정주부로 머물고 말았다는 생각에 남편이 보기 싫고 미웠습니다. 남편이 서울대 박사학위를 받고 학위를 받는 그 날에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박사지 내가 박사냐?” 그런데 남편이 호주로 일 년 간 호주로 가게 되었는데, 억지로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그 호주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호주의 맑은 하늘에는 서울에서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들이 밤마다 그녀를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왔고, 그녀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랬을 때 남편이 좋게 보였습니다. 평화와 소망이 찾아왔습니다. 목자의 삶에 희망을 보았습니다. 자기 인생이 남편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이끌렸음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누구든 이런 차이를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부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무거운 마음이 듭니다. ‘자기 부인’을 하면 나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내 존재가 부인되지 않는가?
그런데 ‘자기 부인’이라는 말 앞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부인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부인이라는 이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길과 반대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섬깁니다. 그런데 현실의 나는 섬김 받기를 원합니다. 인정받고 높임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런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믿고 의지하고자 합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 자기를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은 보물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쓰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고 싶어 합니다. 그런 자기를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화를 냅니다. 누군가에게 화를 풀고 싶습니다. 현실에서는 온유하면 망할 것 같고 사납고 거칠게 해야 땅을 얻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이런 자기를 부인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지만, 현실의 나는 여전히 자신을 주장하고 고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나 사이에 충돌과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그런 자신을 부인하지 않아도 됩니다. 화를 내는 나를 부인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 그 일, 남을 섬기는 그 일을 하려고 애쓸 필요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그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클라리넷을 배우고 있는데, 저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어린 자매님입니다. 저는 그보다 한참 나이가 많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배운다고 하면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요, 성장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오고자 하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마땅한 일 아닙니까?

둘째, 자기 목숨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본문에서 ‘목숨’은 ‘프쉬케’입니다. 프쉬케는 생명, 영혼, 인생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요, 이를 풀어 말한다면 소위 말하는 잘 먹고 잘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인생에서 생명력 왕성하게,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예수님과 내가 충돌할 때 어느 쪽이 이런 삶을 줍니까? 에를 들어 내게 돈이 있는데, 그 돈을 나를 위해 쌓아두거나 혹은 나를 위해 쓰는 것이 나를 살리는가? 아니면 그 돈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 곧 돈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이 나를 살리는가? 누가복음의 기록에서 보면, 한 부자가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프쉬케야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말은 모든 사람의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쌓아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내가 네 프쉬케를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쌓아둔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
우리는 가끔 수십억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그 많은 돈 때문에 도리어 패가망신했다는 기사를 읽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닐까요? 만일 내가 그만한 복권에 당첨된다면 그렇게 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가져보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습니다. 내게 돈이 많으면 살기도 훨씬 편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기 때문에 도리어 망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편 가진 돈을 자기만족을 위해 쓰기보다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사람 중에서 패가망신했다든지, 그 인생이 비참해졌다든지 하는 그런 기사는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을 볼 때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면 욕심이 점점 더 커지고 마음도 사나워지지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도리어 마음이 풍성해진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 받는 쪽에 생명이 있습니까? 섬기는 쪽에 생명이 있습니까? 사람들 중에는 그 처지가 섬기기만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섬기기만 하다 보면 화가 납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섬기기만 해야 하는가? 섬기는 것이 인정을 받으면 또 모르겠는데, 모두가 내 섬김을 당연시할 때는 화가 납니다. 섬기는 것이 나를 죽이는 것 같습니다. 섬김 받는 것이 나를 살릴 것 같습니다. 섬김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쇼핑 중독에 빠진 이가 있는데,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 점원으로부터 높은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정말 좋다고 합니다. 고급 식당에서 종업원의 정중한 대접을 받으면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오시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오셨단 말입니까?
 그런데 다시 잘 생각해 봅니다. 섬김 받는 그것이 과연 나를 살리고 내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가? 쇼핑에서나 고급 식당에서 섬김을 받으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있으려면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려면 악착같이 일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돈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의 섬김과 인정을 받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사람에게 매입니다. 사람의 섬김을 받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높아집니다. 예전에 비틀즈는 온 세계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고 섬김을 받다 보니 마치 자기들이 신이 된 것처럼 ‘우리 인기가 예수보다 높다.’ 고 말했는데, 얼마 후 비틀즈는 해산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섬기는 것이 과연 나를 살리는 것입니까? 섬기는 것이 너무 화가 난다면, 섬기는 것이 도리어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마음으로 제대로 섬기면 그것이 다른 사람을 살리고 또한 나를 살립니다. 가족을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마음으로 좋은 음식을 해주고자 하고, 좋은 음식을 해주기 위해서 생각하고 연구하다 보면, 어쩌면 나도 모르게 유명 요리사가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학생이나 학자가 공부를 하더라도 정말 진리를 위해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공부한다면 그 공부가 그를 위대한 학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과 양들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목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구할 것입니다. 사람을 알고자,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고자 애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프쉬케는 얼마나 풍성해지겠습니까? 
 사람에게 자기 목숨(프쉬케)는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프쉬케)을 바꾸겠느냐?” 내 생명, 내 인생은 하나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도 소중하지만 내 인생은 더 소중합니다.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그만큼 소중하니 정말 가치 있게 써야 합니다. 이 소중한 내 인생, 내 생명을 흥청망청 낭비해 버린다면 이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이 소중한 내 생명을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는 데 써버린다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혹 실패할까 두려워 아무 일에도 도전하지도 못하고 내 소중한 인생을 가만히 싸두고 있다면, 이 얼마나 멍청한 일입니까? 내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을 때 시간도 가만히 있어 주면 좋으련만, 잔인한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내 소중한 인생의 시간은 점점 줄어듭니다.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내게 돈 천만 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가만 두면 하루에 24원씩 줄어든다고 합시다. 한 달에 720원, 일 년에 8760원 줄어듭니다. 그러면 그 돈을 그대로 가만 두겠습니까? 자기 돈이 줄어드는데도 가만두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소중한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쓰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버렸는데, 그렇게 부인한 것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끝나 버린다면?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미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사랑하고자 했는데, 그 사람은 내 아픔도 모른 채 룰루랄라 하고 있다면, 내 몸부림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수 년 전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이혼하고서 아들을 데리고 밀양으로 갔는데, 거기서 어떤 남자가 하나뿐인 그 아들을 납치하여 죽였습니다. 그 주인공은 그 남자를 용서하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친 후에 그 남자를 만나서 용서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남자는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 하면서 그야말로 룰루랄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주인공은 허탈해지고 말았습니다. 자기 부인,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의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이런 허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프쉬케)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속을 지키실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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