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16강(10:32-45) 섬기러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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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마가복음 제 16 강
말씀 | 마가복음 10:32-45
요절 | 마가복음 10:45
섬기러 오신 예수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가 아는 한 유명한 선교 단체의 총재는 빌딩의 최고층에 자기 사무실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주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한국 UBF 대표이셨던 분은 사무실을 일층에 두고 학생들과 자주 대화를 하시고 족구도 하고 탁구도 치며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을 통해서 섬기는 리더십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리더십에 대해 28만권의 책들이 나왔는데 1970년대에 섬기는 리더십이 재발견되었습니다. 그 모델은 2000년 전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5절은 마가복음의 요절이면서 저의 인생 요절이기도 합니다. 섬김의 차원은 종처럼 일하는 단계, 사람의 내면을 섬기는 단계, 대속적인 희생의 단계 등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가 다 중요합니다. 섬기는 생활을 보면 그 인격의 깊이와 넓이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섬기는 생활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인생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8일 후에 세 제자만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그의 본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내려오면서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9)”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서로 문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때에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9:32).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세 번째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반발하고 듣기 싫어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반복하실까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제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삼년의 수고가 헛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지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자 할까요? 자기들 속에 감추어진 정치적인 야심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정권을 쟁탈하고 왕위에 오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 사이에는 순위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나아가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며 청탁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니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촌놈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느새 한 국가를 경영해보겠다는 야심이 꽉 들어찼습니다. 권력을 잡으면 많은 특권이 생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무엇인지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영광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구하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좌우편에는 강도 둘이 달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잔’은 섞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죄에 대한 심판의 고난을 그대로 다 받는다는 상징입니다. ‘세례’는 재난이나 위험에 압도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의 고난을 그대로 다 당하신다는 상징입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할 수 있나이다.” 그들은 영광을 받을 수만 있다면 죽음의 잔도 마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받을 수 있다면 무슨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자신이 줄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대속제물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뜻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값없이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를 흘리고 죽이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섬기기 위하여 당하신 고난이 무엇입니까? 침 뱉음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버림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약 레위기에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한 언약의 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쓰레기처럼 버려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갖도록 이들을 돌봐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면서 힌두교 신자들이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는 일을 계속하자 그들도 감동을 받고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인도를 방문하여 그녀를 여러 모양으로 도왔습니다. 한국의 한 대형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주차관리를 한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장로 시절에 주차관리를 했다고 합니다. 경남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에 조덕삼(1867-1919)이라는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굉장히 겸손했는데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조사인 김필수씨로부터 복음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봐온 조덕삼은 “그렇게 살기 좋은 당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왜 왔는가?”라고 묻자, 테이트 선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유교 정신에 투철한 보수 집안의 조덕삼은 테이트 선교사의 용기에 감동했고, 이후 사랑채를 내어 예배를 보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금산교회(팟정리교회, 두정리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1905년 봄부터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조덕삼씨 부부를 비롯하여 마부였던 이자익, 같은 마을에 사는 박화서 부부, 왕순칠, 박동호, 김윤창, 그리고 조덕삼씨의 자녀들이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하루는 조덕삼의 아들인 조영호가 서당 훈장을 모시고 한문을 배우고 있는데 그 곁을 지나다니던 머슴 이자익이 천자문을 술술 외는 것입니다. 우연히 이자익이 천자문을 외우는 모습을 본 조덕삼은 그날 이후로 자신의 아들과 동일하게 이자익에게 공부를 시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을 보면 질투를 하고, 흠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는데 조덕삼은 머슴의 장점을 살리고 키워줬습니다. 금산교회는 조덕삼과 이자익을 중심으로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1907년 금산교회에서 한 명의 장로를 뽑게 되었습니다. 장로 후보는 교회에서 가장 열심인 조덕삼과 이자익이었는데 여러분 상식적으로 누가 장로가 되어야겠습니까? 조덕삼은 사적으로 이자익의 상전입니다. 나이가 15살이 많습니다. 마을의 최고 부자이고, 금산교회의 터를 마련해준 인물입니다. 더군다나 그 인격과 신앙생활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투표결과 머슴 이자익이 장로가 됐습니다. 당시 장로는 실제적으로 설교도 하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총책임자였습니다.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상전인 조덕삼이 이자익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함부로 반말도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머슴을 도와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장내가 웅성웅성해집니다. 교회가 갈라지기 일보직전입니다. 그런데 그때 조덕삼 집사가 테이트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서 교인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조덕삼은 이처럼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 신학공부를 지원합니다. 그리고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1915년에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을 금산교회로 모셔 당회장 목사로 깍듯이 대접을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이자익 목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로교 총회장을 세 번이나 하신 분이십니다. 대전신학대학교에는 ‘이자익 기념관’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자익 목사님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반드시 언급하고, 칭송하는 분이 바로 조덕삼 장로님이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섬김의 생애를 실천한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자유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에서 자유를 얻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종노릇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진정으로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자발적인 종노릇이야말로 우리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먼저 섬겨야 합니다. 집 안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기는 좋아하지만 설거지 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섬김 받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설거지 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섬김이 리더를 만듭니다. 섬김의 보상은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았기 때문에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답게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섬기고 나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한 것뿐이라는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상을 주시고 높여주십니다. 그런 사람이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단계는 대속적인 희생으로까지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그 의미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죄를 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는 더러운 죄를 씻고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희생하는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릅니다. 죄로 인한 상처를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대신 욕도 먹고, 사랑하기 때문에 손해도 보고, 사랑하기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하고, 오래 참고, 사랑하기 때문에 섬깁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지만 때로 상처를 받은 마음은 몸의 이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무기력해지고 스트레스가 위염 등으로 나타납니다. 불면증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희생하신 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변화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변화를 믿지 못하면 섬길 수 없습니다.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가 일생 무엇을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예수님에게 멀어지지만, 섬기려고 하면 예수님과 가까워집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섬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하되 죽기까지 섬길 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 | 마가복음 10:32-45
요절 | 마가복음 10:45
섬기러 오신 예수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가 아는 한 유명한 선교 단체의 총재는 빌딩의 최고층에 자기 사무실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주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한국 UBF 대표이셨던 분은 사무실을 일층에 두고 학생들과 자주 대화를 하시고 족구도 하고 탁구도 치며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을 통해서 섬기는 리더십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리더십에 대해 28만권의 책들이 나왔는데 1970년대에 섬기는 리더십이 재발견되었습니다. 그 모델은 2000년 전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5절은 마가복음의 요절이면서 저의 인생 요절이기도 합니다. 섬김의 차원은 종처럼 일하는 단계, 사람의 내면을 섬기는 단계, 대속적인 희생의 단계 등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가 다 중요합니다. 섬기는 생활을 보면 그 인격의 깊이와 넓이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섬기는 생활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인생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8일 후에 세 제자만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그의 본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내려오면서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9)”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서로 문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때에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9:32).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세 번째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반발하고 듣기 싫어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반복하실까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제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삼년의 수고가 헛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지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자 할까요? 자기들 속에 감추어진 정치적인 야심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정권을 쟁탈하고 왕위에 오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 사이에는 순위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나아가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며 청탁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니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촌놈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느새 한 국가를 경영해보겠다는 야심이 꽉 들어찼습니다. 권력을 잡으면 많은 특권이 생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무엇인지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영광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구하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좌우편에는 강도 둘이 달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잔’은 섞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죄에 대한 심판의 고난을 그대로 다 받는다는 상징입니다. ‘세례’는 재난이나 위험에 압도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의 고난을 그대로 다 당하신다는 상징입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할 수 있나이다.” 그들은 영광을 받을 수만 있다면 죽음의 잔도 마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받을 수 있다면 무슨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자신이 줄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대속제물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뜻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값없이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를 흘리고 죽이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섬기기 위하여 당하신 고난이 무엇입니까? 침 뱉음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버림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약 레위기에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한 언약의 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쓰레기처럼 버려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갖도록 이들을 돌봐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면서 힌두교 신자들이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는 일을 계속하자 그들도 감동을 받고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인도를 방문하여 그녀를 여러 모양으로 도왔습니다. 한국의 한 대형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주차관리를 한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장로 시절에 주차관리를 했다고 합니다. 경남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에 조덕삼(1867-1919)이라는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굉장히 겸손했는데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조사인 김필수씨로부터 복음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봐온 조덕삼은 “그렇게 살기 좋은 당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왜 왔는가?”라고 묻자, 테이트 선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유교 정신에 투철한 보수 집안의 조덕삼은 테이트 선교사의 용기에 감동했고, 이후 사랑채를 내어 예배를 보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금산교회(팟정리교회, 두정리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1905년 봄부터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조덕삼씨 부부를 비롯하여 마부였던 이자익, 같은 마을에 사는 박화서 부부, 왕순칠, 박동호, 김윤창, 그리고 조덕삼씨의 자녀들이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하루는 조덕삼의 아들인 조영호가 서당 훈장을 모시고 한문을 배우고 있는데 그 곁을 지나다니던 머슴 이자익이 천자문을 술술 외는 것입니다. 우연히 이자익이 천자문을 외우는 모습을 본 조덕삼은 그날 이후로 자신의 아들과 동일하게 이자익에게 공부를 시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을 보면 질투를 하고, 흠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는데 조덕삼은 머슴의 장점을 살리고 키워줬습니다. 금산교회는 조덕삼과 이자익을 중심으로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1907년 금산교회에서 한 명의 장로를 뽑게 되었습니다. 장로 후보는 교회에서 가장 열심인 조덕삼과 이자익이었는데 여러분 상식적으로 누가 장로가 되어야겠습니까? 조덕삼은 사적으로 이자익의 상전입니다. 나이가 15살이 많습니다. 마을의 최고 부자이고, 금산교회의 터를 마련해준 인물입니다. 더군다나 그 인격과 신앙생활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투표결과 머슴 이자익이 장로가 됐습니다. 당시 장로는 실제적으로 설교도 하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총책임자였습니다.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상전인 조덕삼이 이자익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함부로 반말도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머슴을 도와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장내가 웅성웅성해집니다. 교회가 갈라지기 일보직전입니다. 그런데 그때 조덕삼 집사가 테이트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서 교인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조덕삼은 이처럼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 신학공부를 지원합니다. 그리고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1915년에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을 금산교회로 모셔 당회장 목사로 깍듯이 대접을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이자익 목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로교 총회장을 세 번이나 하신 분이십니다. 대전신학대학교에는 ‘이자익 기념관’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자익 목사님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반드시 언급하고, 칭송하는 분이 바로 조덕삼 장로님이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섬김의 생애를 실천한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자유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에서 자유를 얻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종노릇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진정으로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자발적인 종노릇이야말로 우리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먼저 섬겨야 합니다. 집 안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기는 좋아하지만 설거지 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섬김 받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설거지 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섬김이 리더를 만듭니다. 섬김의 보상은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았기 때문에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답게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섬기고 나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한 것뿐이라는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상을 주시고 높여주십니다. 그런 사람이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단계는 대속적인 희생으로까지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그 의미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죄를 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는 더러운 죄를 씻고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희생하는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릅니다. 죄로 인한 상처를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대신 욕도 먹고, 사랑하기 때문에 손해도 보고, 사랑하기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하고, 오래 참고, 사랑하기 때문에 섬깁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지만 때로 상처를 받은 마음은 몸의 이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무기력해지고 스트레스가 위염 등으로 나타납니다. 불면증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희생하신 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변화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변화를 믿지 못하면 섬길 수 없습니다.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가 일생 무엇을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예수님에게 멀어지지만, 섬기려고 하면 예수님과 가까워집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섬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하되 죽기까지 섬길 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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