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2년 막7강(5:1-20) 군대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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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마가복음 제 7 강
말씀 | 마가복음 5:1-20
요절 | 마가복음 5:8
군대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나타내는 네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네 가지 이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이적인 군대귀신에 사로잡힌 한 거라사 청년을 온전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말로만 임한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임했습니다. 우리가 때마다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예수님을 증거하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악령이 내게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더 테레사도 말년에 악령에게 괴롭힘을 받다가 캘커타 주교에게 축사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사탄은 믿는 자들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괴롭힐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든지 악령의 영향력을 받습니다. 악령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쳐서 무기력하고 불신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악령은 광명의 천사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악령의 역사를 분별하고 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쾌한 쉼을 주기 위해서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광풍 훈련을 받고 나니 제자들은 얼떨떨했습니다. 그들은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권세 앞에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다시 휴가를 어떻게 즐길까 기대감을 갖고 해안에 상륙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 빨리 육지에 내려서 무엇을 좀 먹고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상륙하고자 했던 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입니다. 이곳은 그리스인들이 열 개의 도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그리스 신들을 믿고 그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군 부대가 있어서 그 문화의 영향력 속에 있었습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양돈 산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이 해안에는 바위를 파내고 만든 무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해안에 발을 내 디디며 마음이 들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섬뜩하고 기괴한 소리를 지르면서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소름이 끼치고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무엇이 이 젊은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8절을 볼 때 더러운 귀신 수천 마리가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함께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영적인 현상을 뇌의 화학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이 뇌를 지배하고 뇌가 육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던지 악령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악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짐승과 같고 마귀와 같이 파괴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덤 사이에 가면 어딘가 모르게 무섭고 빨리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체가 누워있는 무덤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사회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회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쇠사슬로 매어 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약물로도, 가죽 끈으로도, 쇠사슬로도 맬 수 없었습니다. 악령이 그 강한 힘으로 쇠사슬을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보통 귀신이 들리는 사람들은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약을 하고 귀신을 숭배하고 죄악을 계속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사탄이 그 죄악을 발판으로 그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홍대 주위에 오면 악령의 세력으로 인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딘가 모르게 미친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곳의 분위기가 악령이 활동하기에 자유로운 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곳은 술 취한 사람들이 많고, 음란한 분위기가 만연하고, 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미친 듯이 록뮤직을 듣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떠듭니다. 한마디로 물이 좋다고 합니다. 최근에 신촌을 중심으로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만큼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이 사람이 오늘날 대학생이라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아무 때나 먹었을 것입니다. 록뮤직을 큰 소리로 들으며 소리를 지르고, 여자관계가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가 술을 먹고 취하여 까페의 창문도 부수고 사람들과 싸움질도 많이 하고 경찰에 체포되고 감옥에도 들락날락 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옥에서 만난 악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무도 그와 함께 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PC 방에 하루 종일 쳐 박혀 게임을 하고 음란한 동영상과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가 충동적으로 죄를 짓고 사람들과 싸우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나서는 독방에 쳐 넣어졌고 감옥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경찰들을 구타하고 탈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반복하자 경찰들도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는 도시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기 위해서 집을 나가 무덤 사이에 거처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6000마리의 귀신들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지배하였습니다. 이는 로마 한 군단의 숫자입니다. 그의 힘은 쇠사슬과 고랑을 깨뜨리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군대 귀신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이 강에서 저 강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는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며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자기 몸을 날카로운 돌로 짓이기며 자학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대학생 200명, 군대에서 50명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또 최근에는 악령을 숭배하는 사이트에 가입해서 활동하던 학생들이 살인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사탄이 청년들을 사로잡아 멸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학생들을 누가 도울 수 있습니까?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귀신은 대번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세로 자신들을 지옥에 던져넣을까봐 두려했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대변자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지만 9절과 12절에서는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귀신은 예수님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와 교제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귀신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당장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정체를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귀신은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군대는 로마의 한 군단을 말합니다. 그 만큼 강하고 많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까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 사람이 자기를 주관하는 귀신의 정체를 알아야 싸울 수 있습니다. 귀신은 자기를 위장하기를 잘합니다. 속이는 자입니다. 귀신의 존재 목적은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귀신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자기를 숨기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자기정체가 드러나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그 사람에게 자기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귀신으로 인해서 자아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물으심으로 그는 자신을 찾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더러운 귀신이 우리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즉 한 두 마리가 아니고 6000마리나 되기에 ‘군대’ 즉 많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수시로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히는 악령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실패감입니다. 내 이름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내 이름은 불신입니다. 내 이름은 시기심입니다. 내 이름은 이기심입니다. 내 이름은 미움입니다. 내 이름은 우울입니다. 내 이름은 거짓입니다. 내 이름은 음란입니다. 내 이름은 탐욕입니다. 내 이름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밤새도록 얍복강 가에서 씨름하던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는 “나는 사기꾼입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이후에 그의 이름을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귀신은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아마도 활동하기가 편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를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하소서”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과 짐승의 몸 속에 들어가서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영혼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신자를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이 사람 안에 거할 때는 그의 자아를 분열시키고 자학하게 하고 파괴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들이 자아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본래 돼지들은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어가자 먹는 데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바다로 돌진해서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왜 돼지 이천 마리가 희생될 것을 아시면서 더러운 귀신에게 들어가도록 허용했을까요? 예수님은 그곳 사람들의 물질주의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돼지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책임 때문에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온 도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러 왔습니다. 그들은 그 귀신들렸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은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온전케 하신 것을 보고 그 권세 앞에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보다 자기들의 돼지 한 마리가 더 귀했습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하신 예수님의 가치관이 두려웠습니다. 그곳에 귀신들린 사람이 어디 이 사람뿐이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그곳에서 활동하시면 자기들의 돼지 산업이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사실 돼지 이천 마리가 한꺼번에 죽음으로 돼지 값이 많이 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갈릴리 바다도 오염되었습니다. 돼지 산업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예수님이 싫었습니다. 그냥 편안히 문제없이 돼지산업을 일구어 나가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그들은 더러운 귀신들렸던 자가 온전하게 된 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돼지 산업에 해가 올까봐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한 영혼보다 돼지 한 마리가 더 소중했습니다. 돼지 한 마리는 그들의 돈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병든 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온전하게 되는 것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의 가치관에 도전하셨습니다. 한 영혼은 돼지 이천마리를 희생해서라도 구원해야 할 귀중한 존재입니다. 돼지산업으로 인해 재미를 보던 사람들은 더 이상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예수님을 떠나시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 더러운 귀신들렸던 사람을 증인으로 보내심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제자의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고 선교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방향에 순종하였습니다. 그가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자 나중에 8장에 가면 수많은 데가볼리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지혜로우십니다. 자신이 활동 할 수 없는 곳에 이 사람을 파송하심으로 그들에게도 복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기를 원하시는 곳에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선교사들을 보내십니다. 자비량 선교사들을 보내사 지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강한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귀신들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할 때 더러운 귀신들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사랑이 많은 사람들로 변화시킵니다. 죠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그 전에 술고래였습니다. 마약도 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제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높여주셨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책을 쓴 일본 여성 ‘다하라 요네꼬’가 있습니다. 그녀는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사는 것이 힘들어 18세에 달리는 기차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두 발이 짤리고 한 손도 잃었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있는 병원에 외국인 선교사와 통역으로 한 전도가가 찾아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 번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녀가 변화되어 그 전도사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녀는 사는 것이 황홀하다는 내용의 책을 썼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함께 놀아주고 먹을 것을 푸짐하게 준다고 해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변화되기를 바라고 요구하고 비난만 하면 자기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우리가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나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권능으로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내가 변화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합니다. 가정 교회가 행복합니다. 직장이 복을 받습니다. 이 나라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나로 하여금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악령의 세력을 인식하고 회개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그의 권능과 말씀에 의지해서 변화된 삶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5:1-20
요절 | 마가복음 5:8
군대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나타내는 네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네 가지 이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이적인 군대귀신에 사로잡힌 한 거라사 청년을 온전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말로만 임한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임했습니다. 우리가 때마다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예수님을 증거하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악령이 내게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더 테레사도 말년에 악령에게 괴롭힘을 받다가 캘커타 주교에게 축사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사탄은 믿는 자들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괴롭힐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든지 악령의 영향력을 받습니다. 악령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쳐서 무기력하고 불신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악령은 광명의 천사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악령의 역사를 분별하고 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쾌한 쉼을 주기 위해서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광풍 훈련을 받고 나니 제자들은 얼떨떨했습니다. 그들은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권세 앞에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다시 휴가를 어떻게 즐길까 기대감을 갖고 해안에 상륙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 빨리 육지에 내려서 무엇을 좀 먹고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상륙하고자 했던 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입니다. 이곳은 그리스인들이 열 개의 도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그리스 신들을 믿고 그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군 부대가 있어서 그 문화의 영향력 속에 있었습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양돈 산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이 해안에는 바위를 파내고 만든 무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해안에 발을 내 디디며 마음이 들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섬뜩하고 기괴한 소리를 지르면서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소름이 끼치고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무엇이 이 젊은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8절을 볼 때 더러운 귀신 수천 마리가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와 함께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영적인 현상을 뇌의 화학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이 뇌를 지배하고 뇌가 육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던지 악령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악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짐승과 같고 마귀와 같이 파괴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덤 사이에 가면 어딘가 모르게 무섭고 빨리 떠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체가 누워있는 무덤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사회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회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쇠사슬로 매어 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약물로도, 가죽 끈으로도, 쇠사슬로도 맬 수 없었습니다. 악령이 그 강한 힘으로 쇠사슬을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보통 귀신이 들리는 사람들은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약을 하고 귀신을 숭배하고 죄악을 계속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사탄이 그 죄악을 발판으로 그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홍대 주위에 오면 악령의 세력으로 인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딘가 모르게 미친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곳의 분위기가 악령이 활동하기에 자유로운 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곳은 술 취한 사람들이 많고, 음란한 분위기가 만연하고, 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미친 듯이 록뮤직을 듣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떠듭니다. 한마디로 물이 좋다고 합니다. 최근에 신촌을 중심으로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만큼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이 사람이 오늘날 대학생이라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아무 때나 먹었을 것입니다. 록뮤직을 큰 소리로 들으며 소리를 지르고, 여자관계가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가 술을 먹고 취하여 까페의 창문도 부수고 사람들과 싸움질도 많이 하고 경찰에 체포되고 감옥에도 들락날락 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옥에서 만난 악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무도 그와 함께 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PC 방에 하루 종일 쳐 박혀 게임을 하고 음란한 동영상과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가 충동적으로 죄를 짓고 사람들과 싸우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나서는 독방에 쳐 넣어졌고 감옥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경찰들을 구타하고 탈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반복하자 경찰들도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는 도시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기 위해서 집을 나가 무덤 사이에 거처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6000마리의 귀신들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지배하였습니다. 이는 로마 한 군단의 숫자입니다. 그의 힘은 쇠사슬과 고랑을 깨뜨리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군대 귀신의 힘이었습니다. 그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이 강에서 저 강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는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며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자기 몸을 날카로운 돌로 짓이기며 자학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대학생 200명, 군대에서 50명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또 최근에는 악령을 숭배하는 사이트에 가입해서 활동하던 학생들이 살인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사탄이 청년들을 사로잡아 멸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학생들을 누가 도울 수 있습니까?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귀신은 대번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세로 자신들을 지옥에 던져넣을까봐 두려했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대변자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지만 9절과 12절에서는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귀신은 예수님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와 교제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귀신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당장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정체를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귀신은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군대는 로마의 한 군단을 말합니다. 그 만큼 강하고 많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까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 사람이 자기를 주관하는 귀신의 정체를 알아야 싸울 수 있습니다. 귀신은 자기를 위장하기를 잘합니다. 속이는 자입니다. 귀신의 존재 목적은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귀신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자기를 숨기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자기정체가 드러나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그 사람에게 자기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귀신으로 인해서 자아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물으심으로 그는 자신을 찾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더러운 귀신이 우리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즉 한 두 마리가 아니고 6000마리나 되기에 ‘군대’ 즉 많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도 수시로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히는 악령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실패감입니다. 내 이름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내 이름은 불신입니다. 내 이름은 시기심입니다. 내 이름은 이기심입니다. 내 이름은 미움입니다. 내 이름은 우울입니다. 내 이름은 거짓입니다. 내 이름은 음란입니다. 내 이름은 탐욕입니다. 내 이름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밤새도록 얍복강 가에서 씨름하던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는 “나는 사기꾼입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이후에 그의 이름을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귀신은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아마도 활동하기가 편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를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하소서”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과 짐승의 몸 속에 들어가서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영혼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신자를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이 사람 안에 거할 때는 그의 자아를 분열시키고 자학하게 하고 파괴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들이 자아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본래 돼지들은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어가자 먹는 데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바다로 돌진해서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왜 돼지 이천 마리가 희생될 것을 아시면서 더러운 귀신에게 들어가도록 허용했을까요? 예수님은 그곳 사람들의 물질주의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돼지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책임 때문에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온 도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러 왔습니다. 그들은 그 귀신들렸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은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온전케 하신 것을 보고 그 권세 앞에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보다 자기들의 돼지 한 마리가 더 귀했습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하신 예수님의 가치관이 두려웠습니다. 그곳에 귀신들린 사람이 어디 이 사람뿐이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그곳에서 활동하시면 자기들의 돼지 산업이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사실 돼지 이천 마리가 한꺼번에 죽음으로 돼지 값이 많이 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갈릴리 바다도 오염되었습니다. 돼지 산업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예수님이 싫었습니다. 그냥 편안히 문제없이 돼지산업을 일구어 나가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그들은 더러운 귀신들렸던 자가 온전하게 된 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돼지 산업에 해가 올까봐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한 영혼보다 돼지 한 마리가 더 소중했습니다. 돼지 한 마리는 그들의 돈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병든 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온전하게 되는 것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의 가치관에 도전하셨습니다. 한 영혼은 돼지 이천마리를 희생해서라도 구원해야 할 귀중한 존재입니다. 돼지산업으로 인해 재미를 보던 사람들은 더 이상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예수님을 떠나시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 더러운 귀신들렸던 사람을 증인으로 보내심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제자의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고 선교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방향에 순종하였습니다. 그가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자 나중에 8장에 가면 수많은 데가볼리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지혜로우십니다. 자신이 활동 할 수 없는 곳에 이 사람을 파송하심으로 그들에게도 복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기를 원하시는 곳에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선교사들을 보내십니다. 자비량 선교사들을 보내사 지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강한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귀신들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할 때 더러운 귀신들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사랑이 많은 사람들로 변화시킵니다. 죠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그 전에 술고래였습니다. 마약도 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제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높여주셨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책을 쓴 일본 여성 ‘다하라 요네꼬’가 있습니다. 그녀는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어머니가 죽자 사는 것이 힘들어 18세에 달리는 기차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두 발이 짤리고 한 손도 잃었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있는 병원에 외국인 선교사와 통역으로 한 전도가가 찾아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 번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녀가 변화되어 그 전도사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녀는 사는 것이 황홀하다는 내용의 책을 썼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함께 놀아주고 먹을 것을 푸짐하게 준다고 해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변화되기를 바라고 요구하고 비난만 하면 자기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우리가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나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권능으로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내가 변화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합니다. 가정 교회가 행복합니다. 직장이 복을 받습니다. 이 나라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나로 하여금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악령의 세력을 인식하고 회개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그의 권능과 말씀에 의지해서 변화된 삶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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