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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6강(4:21-4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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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56회 작성일 12-05-2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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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마가복음 제 6 강
말씀 | 마가복음 4:21-41
요절 | 마가복음 4:31,32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마가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네 가지 비유를 통해서 연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감출 수 없는 등불 비유, 스스로 자라는 씨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다양한 각도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세 개의 비유들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히고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등불처럼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라(21-23) :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에 감추려 함이 아니라 등경 위에 두어 어두운 밤에 길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등불은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황제숭배를 요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예배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신자들이 자신을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숨기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적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크리스천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모든 사람 앞에 증명하고 증거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선배들의 믿음에 힘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 두는 것이 때로 안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는 등불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리는 결코 감추어 둘 수 없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사람은 무엇을 듣는가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실천할 때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못 깨닫고는 나 자신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소원이 없는 자는 세상의 정욕과 쾌락을 추구하다보니 있던 은혜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어설프게 믿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믿고 철저하게 파고 들어가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어설프게 알면 모른 것만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그 깊고 심오한 뜻을 알기까지 파고들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의 의미를 내 마음에 보석처럼 간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26-29).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림과 같습니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 성장 속도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수한 카메라로 식물의 성장을 찍으면 놀라운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 눈에는 가만히 있어 보이는 식물이 계속해서 자라고 그 뿌리에서는 박테리아와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생존의 투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이와 같이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입니다. 씨가 자라는 사이에 사람이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자고 깨고 할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의 수고와 애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키우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6절에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바울만큼 복음 역사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식물이 처음에는 싹, 다음에는 이삭, 다음에는 곡식으로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도 과정을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자라납니다. 자라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한 사람이 잉태되어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다가 열 달이 되어 세상에 나오고 또 기어다니다가 걷다가 하면서 뛰는 단계로 자라나듯이 하나님 나라도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복음에는 내적인 원동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조급함을 버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내가 할 일에 충실하면서 지내다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놀랍게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기다리다보면 추수의 감격을 안을 때가 옵니다. 처음에 싹이었을 때는 언제 열매가 될까 싶지만 싹이 변하여 열매가 되는 때가 옵니다. 어떤 사람은 양을 전도해 놓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양을 여러 목자들을 통해서 친히 키우십니다. 때로는 목자님이 선교사로 가버리면 양은 더욱 자립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우리 가운데 풀타임 자매님들이 언제 목자가 될까 생각했지만 이제는 몇 명의 양들을 치면서 센터의 중요한 일들을 잘 감당해 내는 것을 봅니다.

셋째, 겨자씨 비유(30-34).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했습니다. 겨자씨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725~760개의 겨자씨가 1g에 불과합니다. 겨자 나무는 씨에서 자라서 몇 주 안에 4-5미터의 크기에 도달하는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모든 정원수 중에 가장 큰 나무가 되는 일년생 식물입니다. 겨자씨와 커다란 가지의 그늘 때문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게 됩니다. 그 새들은 까만 겨자씨와 벌레를 먹고 그늘에서 쉼을 누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재 작은 믿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 교회의 규모가 작다고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현재 믿음은 겨자씨와 같이 작고 보잘 것 없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심겨진 겨자씨만한 믿음이 자라서 오순절 이후에 한 번에 3000명이 그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그들이 쓴 복음서는 2000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75세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래와 함께 믿음을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 말씀을 심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지금 우리는 그가 받은 복의 근원이 되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 생활을 하는 가운데 믿음이 좋을 때도 있었고 처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그의 외아들보다 더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하고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칼로 그 아들을 잡고자 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다급하게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12:12).”며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작은 하나님 나라의 씨가 자라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 재물도, 군대도, 시중꾼도, 어떤 권력도 없이 가냘픈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12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말년에 거의 모든 제자로부터 부인을 당하고, 마치 악한 범죄자처럼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런 죽음 이후에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무릎이 그의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와 그리스도라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참된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열두 사도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세계 인구의 1/3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겨자씨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겨자씨의 유전인자(DNA)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성령이 임하면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순종한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된 지 30년 만에 소아시아와 아프리카 북부와 로마에 까지 당시 세계에 다 퍼졌습니다. 330년에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UBF도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마더 배리 선교사님이 대학생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시작하였지만 50년만에 벌써 세계 95개국에 18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놀랍게 확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각 교회들이 태동기, 성장기, 정체기, 쇠퇴기, 기독교 후기의 과정을 거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체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정체기는 생명력의 약동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정체기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쇠퇴기에 들어갑니다. 그 이후에 후 기독교 시대가 됩니다. 이 때 사람들은 다 믿어봤다, 교회 다녀봤다 조롱하며 노인들만 교회를 채우게 됩니다. 교회가 텅텅 비고 관광객들로 채우게 되던지 술집이나 디스코텍으로 변화됩니다. 지금 유럽은 후 기독교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 교회는 성장하다가 정체기에 들어갈까요? 왜 성장이 꺾일까요? 생명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첫 사랑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받는 좋은 밭의 상태가 지력을 잃고 황폐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대신에 시스템을 의지하고 경험을 의지하고 자족하게 되면 그 모임은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UBF를 생명력과 첫 사랑과 야성을 회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과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눈총을 받고 맞아가면서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적극 활용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음악의 재능, 섬김의 재능, 들어주는 은사, 전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카운슬링하는 은사 등등 모든 은사를 활용해서, 모든 관계를 활용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직장에서 씨를 뿌리고, 거리에서 울면서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반드시 추수하게 하십니다. 변화는 반드시 있습니다. 인내하면서 실망하지 말고 말씀의 씨를 뿌리고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불 방망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겨자씨는 무엇입니까? 바로 한 사람을 키우는 일대일 역사, 말씀을 듣고 소감을 쓰는 역사, 등 이런 것들이 씨앗과 같이 작지만 장차 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배우고 안식과 쉼을 누리는 거목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실 큰 소망의 역사를 바라보고 한 명의 일대일 양을 사랑하며 깊은 관계성을 맺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넷째, 광풍을 이기는 믿음의 역사(35-41). 그날 저물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호수 중간쯤 갔을 때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물결이 높이 일어나고 비가 쏟아져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물결로 인해서 배는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인데도 광풍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시련이 올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광풍을 만나면 매우 두렵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인생의 광풍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딥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날아가 버릴 위기인 것입니다. 인생의 광풍 앞에 말씀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광풍 앞에서 우리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다 집어치우자, 끝났다, 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 대한 원망도 생깁니다. 왜 가자고 해 놓고 주무시고 계시는가? 주님의 침묵 앞에 원망과 불평이 생깁니다. 광풍은 대개 우리의 허물 때문에 생깁니다. 내가 의인이라고 시험을 받는 경우는 적습니다. 우리는 광풍 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돌보지 아니한다고 생각하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광풍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때 말씀을 붙잡고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듣고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곧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듯이 미친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령에 제한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자연세계도 굴복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시고 제자들에게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무서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앞의 씨앗 비유와 연관시켜 볼 때 제자들은 돌밭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여 환난 날에 흔들리고 넘어질 뻔하였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없으면 시련의 때에 넘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의 바른 자세는 환난의 때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광풍보다 더 권세가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광풍, 인생의 슬픔의 폭풍 속에서, 불안의 폭풍 속에서 진정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자연세계까지도 지배하시는 권능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광풍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심겨진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대로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환난 속에서라도 겨자씨 비유 같은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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