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2년 마가복음 5강(4:1-20) 결실을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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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마가복음 제 5 강
말씀 | 마가복음 4:1-20
요절 | 마가복음 4:20
결실을 하는 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세우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를 사람들에게 뿌림으로 자라납니다. 이 비유는 제자 생활의 기초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 밭이 되어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길가.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었습니다. 한 편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중에 씨 뿌리는 비유를 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낼름 먹어버렸습니다.
이는 15절에서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즉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씨를 빼앗아 갑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지만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헛생각에 빠져 듣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스마트 폰으로 성경 말씀을 보는 분들 중에는 말씀을 보다가 가끔 다른 데로 들어가고자 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듣지 못하게 유혹하는 존재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서서 나가는데 나가자마자 오늘 무슨 말씀을 들었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잽싸게 채가는 새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면 믿음이 생기고 죄 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하게 사탄이 방해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들이 죄와 허물로 영적인 죽음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죽음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학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공부를 잘하고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 속에서 살아왔지만 중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이들은 거듭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불신과 교만과 선입견을 회개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찾아온 사탄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정반대의 거짓확신을 심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둘째, 돌밭.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렸습니다. 돌밭의 특징은 씨가 심겨진 후에 바위로 인해서 온도가 올라가 있기 때문에 쉽게 싹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합성을 촉진시키는 해가 내리쬐면 뿌리에서 수분을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식물 자체가 타버립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16,17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의 특징은 냄비신앙입니다. 이들은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식어버립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린 신자와 같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그 속에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뿌리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잘 맺는 계기를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 만들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환난과 박해를 받을 때 주님을 더 의지하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과 박해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관계에서 우선순위의 조정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어머님은 “네가 예수에 미쳐서 술도 먹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고 교회에 빠진 것을 보니 화가 난다.”고 하시면서 핍박을 하였습니다. 일가친척들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문제로 욕을 하고 핍박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그 말씀의 권능으로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는데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기초로 공부를 하고 시험도 보아야 합니다. 창조론을 주장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광신자 취급을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데 당장 물질 문제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현실적인 유익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은 태양 빛과 같아서 식물의 성장에 유익합니다. 이와 같이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환난과 핍박은 위장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시고 우리의 믿음을 키우십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십니다.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에 말씀을 굳게 붙잡고 믿음에 굳게 서서 믿음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환난의 때에 두 가지 부류로 나타납니다. 사탄의 시험에 빠져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아니면 말씀을 붙들고 믿음 위에 더욱 굳건히 서는 투쟁을 통해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환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그 환난으로 인해서 믿음에 회의가 생겼습니까? 아니면 이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이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가시떨기 밭. 뿌린 씨가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졌습니다. 가시가 같이 자라서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습니다. 영양분을 가시들이 다 빨아들이니 좋은 나무는 쭉정이만 맺게 됩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해석은 무엇입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은 가시와 같습니다. 가시는 우리가 써야할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듭니다. 어떤 분은 염려가 들어오는데 어떻게 막느냐고 말합니다. 자동적으로 염려가 되는데 어떻게 이를 그만 두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는 염려를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느냐고 대항합니다. 염려하는 분들을 보면 내일 일어날 일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10년 후, 은퇴 후의 일을 가지고 염려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둘로 나눕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게 만들어 타락하게 합니다. 세상의 염려는 끝이 없습니다. 먹고 사는 염려, 사고에 대한 염려, 취업에 대한 염려, 결혼에 대한 염려, 아이 낳는 것에 대한 염려,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에 대한 염려, 살 찔 것에 대한 염려, 살 빠지는 것에 대한 염려, 전세금 상승에 대한 염려, 자녀에 대한 염려, 친구 사귀는 것에 대한 염려 등등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합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됩니다. 염려와 근심거리들을 다 기도제목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또 재물의 유혹이 있습니다. 재물의 유혹을 가시와 연결시킨 것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그 까닭은 재물은 인간의 영혼을 깊이 찌르는 가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 ‘재물의 유혹’은 재물이 어떤 안식과 자신감 등을 약속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그 소유자와 기대자로 하여금 허무한 절망에 빠뜨리게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돈만 많이 생기면 마음이 든든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면 그것을 어떻게 지키고 불릴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눌립니다. 은행에 저축해 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저축은행에 돈을 저금해 놓았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돈을 잃어버리게 되는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기타 욕심’이 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질식시켜 그 기운을 막습니다. 이는 ‘모든 정욕, 모든 갈망, 모든 세속적 쾌락’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8:14절에서는 이 말 대신에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라 표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모두 앗아가는 현세 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관능적인 욕망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쾌락적인 욕망들은 가시떨기처럼 우리의 영혼과 생활 전 영역을 뒤덮음으로써 말씀의 씨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지면 다음 시간이 눈이 빠지게 기다려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그와 같았다면 놀랍게 성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마다 마음에서 근심과 염려와 세상 욕심들을 회개함으로 뽑아내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의 관심과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섬겨야 하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머지 시간에 주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한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사로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넷째, 좋은 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는데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들으라는 명령의 말씀이 3,9절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명기 6:5절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들을 귀는 영적인 소원이 있고, 깊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는 준비하지 않고 말씀이 별 것이 없다고 평가절하하고 너무 쉽게 흘려버립니다. 정말 들을 귀가 있으면 한 말씀 한 말씀이 내 귀를 울리고 심금을 울리고 영혼을 진동시킬 것입니다.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때 졸고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자기 발견이 더디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들을 귀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성령께서 들을 귀를 열어 주시도록,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보통 사람들이 일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청하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그 만큼 제대로 듣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듣는 것은 훈련도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필요합니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의 세배의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의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잘 듣습니다. 깊이 듣습니다. 말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까지도 듣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돌이켜 죄사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안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구원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사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실을 하게 되는데 그 결실은 구원을 받고 구원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또 결실은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받고 변화되면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또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22,23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로 나와 있지만 단수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락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과 화평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비롭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친절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맡은 일에 충성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온유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절제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 결실하면 사랑이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됩니다. 사랑의 영향력이 깊어지고 높아지고 넓어집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삼십 배의 사랑을 하게 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우리의 죄가 삼십 배 사함 받은 결과 우리의 기쁨은 삼십 배가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삼십 배의 영향력을 발휘함으로 나의 아내 혹은 나의 남편, 우리의 자녀들, 친구들, 동역자들,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삼십 배의 사랑이 가져오는 삶의 풍요로움과 능력과 권세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사함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주위를 뒤집어 놓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이 무슨 일인고 주의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에 선행을 더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천주교의 구원관을 따라 구원에 이르고자 애를 썼습니다. 선행에는 금식과 고행 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겨울에 벌거숭이가 되어 밖에서 추위를 견디며 회개도 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사로서 열심히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로마까지 순례하여 계단도 무릎으로 올랐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이기심만 더 강하게 느껴지고 죄의식만 깊어갔습니다. 그가 이런 고민을 자기를 지도하는 신부에게 털어놓았더니 그 신부가 볼 때 루터는 다른 신부들에 비하면 구원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고민을 듣고 마땅히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 연구를 더 열심히 하라고만 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루터는 로마서 1:17절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말만 들어도 겁을 먹고 질리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2-24).”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형벌이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천주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음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이 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우리가 매주 매일 한 말씀을 받고자 하는 소원으로 마음 밭을 준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회개하지 않음으로 길가와 같이 딱딱하고 굳어진 마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바위 같이 꿈쩍하지 않는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 세상의 염려와 근심, 세상의 쾌락, 돈에 대한 탐심을 깊이 회개하고 갈아엎는 투쟁을 통해서 좋은 마음 밭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믿음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4:1-20
요절 | 마가복음 4:20
결실을 하는 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세우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를 사람들에게 뿌림으로 자라납니다. 이 비유는 제자 생활의 기초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 밭이 되어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길가. 예수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었습니다. 한 편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중에 씨 뿌리는 비유를 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낼름 먹어버렸습니다.
이는 15절에서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즉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씨를 빼앗아 갑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지만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헛생각에 빠져 듣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스마트 폰으로 성경 말씀을 보는 분들 중에는 말씀을 보다가 가끔 다른 데로 들어가고자 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듣지 못하게 유혹하는 존재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서서 나가는데 나가자마자 오늘 무슨 말씀을 들었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잽싸게 채가는 새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면 믿음이 생기고 죄 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하게 사탄이 방해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들이 죄와 허물로 영적인 죽음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죽음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학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공부를 잘하고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 속에서 살아왔지만 중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이들은 거듭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불신과 교만과 선입견을 회개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찾아온 사탄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정반대의 거짓확신을 심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둘째, 돌밭.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렸습니다. 돌밭의 특징은 씨가 심겨진 후에 바위로 인해서 온도가 올라가 있기 때문에 쉽게 싹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합성을 촉진시키는 해가 내리쬐면 뿌리에서 수분을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식물 자체가 타버립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16,17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의 특징은 냄비신앙입니다. 이들은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식어버립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린 신자와 같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그 속에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뿌리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잘 맺는 계기를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 만들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환난과 박해를 받을 때 주님을 더 의지하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과 박해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관계에서 우선순위의 조정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어머님은 “네가 예수에 미쳐서 술도 먹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고 교회에 빠진 것을 보니 화가 난다.”고 하시면서 핍박을 하였습니다. 일가친척들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문제로 욕을 하고 핍박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그 말씀의 권능으로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는데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기초로 공부를 하고 시험도 보아야 합니다. 창조론을 주장하면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광신자 취급을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데 당장 물질 문제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현실적인 유익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은 태양 빛과 같아서 식물의 성장에 유익합니다. 이와 같이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환난과 핍박은 위장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시고 우리의 믿음을 키우십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십니다.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에 말씀을 굳게 붙잡고 믿음에 굳게 서서 믿음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환난의 때에 두 가지 부류로 나타납니다. 사탄의 시험에 빠져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아니면 말씀을 붙들고 믿음 위에 더욱 굳건히 서는 투쟁을 통해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환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그 환난으로 인해서 믿음에 회의가 생겼습니까? 아니면 이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이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가시떨기 밭. 뿌린 씨가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졌습니다. 가시가 같이 자라서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습니다. 영양분을 가시들이 다 빨아들이니 좋은 나무는 쭉정이만 맺게 됩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해석은 무엇입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은 가시와 같습니다. 가시는 우리가 써야할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듭니다. 어떤 분은 염려가 들어오는데 어떻게 막느냐고 말합니다. 자동적으로 염려가 되는데 어떻게 이를 그만 두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는 염려를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느냐고 대항합니다. 염려하는 분들을 보면 내일 일어날 일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10년 후, 은퇴 후의 일을 가지고 염려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둘로 나눕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게 만들어 타락하게 합니다. 세상의 염려는 끝이 없습니다. 먹고 사는 염려, 사고에 대한 염려, 취업에 대한 염려, 결혼에 대한 염려, 아이 낳는 것에 대한 염려,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에 대한 염려, 살 찔 것에 대한 염려, 살 빠지는 것에 대한 염려, 전세금 상승에 대한 염려, 자녀에 대한 염려, 친구 사귀는 것에 대한 염려 등등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합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됩니다. 염려와 근심거리들을 다 기도제목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또 재물의 유혹이 있습니다. 재물의 유혹을 가시와 연결시킨 것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그 까닭은 재물은 인간의 영혼을 깊이 찌르는 가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 ‘재물의 유혹’은 재물이 어떤 안식과 자신감 등을 약속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그 소유자와 기대자로 하여금 허무한 절망에 빠뜨리게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돈만 많이 생기면 마음이 든든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면 그것을 어떻게 지키고 불릴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눌립니다. 은행에 저축해 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저축은행에 돈을 저금해 놓았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돈을 잃어버리게 되는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기타 욕심’이 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질식시켜 그 기운을 막습니다. 이는 ‘모든 정욕, 모든 갈망, 모든 세속적 쾌락’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8:14절에서는 이 말 대신에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라 표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모두 앗아가는 현세 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관능적인 욕망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쾌락적인 욕망들은 가시떨기처럼 우리의 영혼과 생활 전 영역을 뒤덮음으로써 말씀의 씨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지면 다음 시간이 눈이 빠지게 기다려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그와 같았다면 놀랍게 성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마다 마음에서 근심과 염려와 세상 욕심들을 회개함으로 뽑아내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의 관심과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섬겨야 하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머지 시간에 주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한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사로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넷째, 좋은 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는데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들으라는 명령의 말씀이 3,9절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명기 6:5절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들을 귀는 영적인 소원이 있고, 깊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는 준비하지 않고 말씀이 별 것이 없다고 평가절하하고 너무 쉽게 흘려버립니다. 정말 들을 귀가 있으면 한 말씀 한 말씀이 내 귀를 울리고 심금을 울리고 영혼을 진동시킬 것입니다.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때 졸고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자기 발견이 더디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들을 귀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성령께서 들을 귀를 열어 주시도록,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보통 사람들이 일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청하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그 만큼 제대로 듣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듣는 것은 훈련도 필요하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필요합니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의 세배의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의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잘 듣습니다. 깊이 듣습니다. 말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까지도 듣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돌이켜 죄사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안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구원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사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실을 하게 되는데 그 결실은 구원을 받고 구원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또 결실은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받고 변화되면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또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22,23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로 나와 있지만 단수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락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과 화평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비롭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친절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맡은 일에 충성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온유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절제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 결실하면 사랑이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됩니다. 사랑의 영향력이 깊어지고 높아지고 넓어집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삼십 배의 사랑을 하게 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우리의 죄가 삼십 배 사함 받은 결과 우리의 기쁨은 삼십 배가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삼십 배의 영향력을 발휘함으로 나의 아내 혹은 나의 남편, 우리의 자녀들, 친구들, 동역자들,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삼십 배의 사랑이 가져오는 삶의 풍요로움과 능력과 권세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사함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주위를 뒤집어 놓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이 무슨 일인고 주의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에 선행을 더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천주교의 구원관을 따라 구원에 이르고자 애를 썼습니다. 선행에는 금식과 고행 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겨울에 벌거숭이가 되어 밖에서 추위를 견디며 회개도 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사로서 열심히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로마까지 순례하여 계단도 무릎으로 올랐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이기심만 더 강하게 느껴지고 죄의식만 깊어갔습니다. 그가 이런 고민을 자기를 지도하는 신부에게 털어놓았더니 그 신부가 볼 때 루터는 다른 신부들에 비하면 구원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고민을 듣고 마땅히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 연구를 더 열심히 하라고만 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루터는 로마서 1:17절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말만 들어도 겁을 먹고 질리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2-24).”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형벌이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천주교회가 잘못 가르치고 있음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이 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우리가 매주 매일 한 말씀을 받고자 하는 소원으로 마음 밭을 준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회개하지 않음으로 길가와 같이 딱딱하고 굳어진 마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바위 같이 꿈쩍하지 않는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 세상의 염려와 근심, 세상의 쾌락, 돈에 대한 탐심을 깊이 회개하고 갈아엎는 투쟁을 통해서 좋은 마음 밭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믿음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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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회 다운로드 | DATE : 2012-05-22 12: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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