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2년 로마서 11강(8:18-39) 넉넉히 이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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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로마서 제 11 강
말씀 | 로마서 8:18-39
요절 | 로마서 8:37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지난 주에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성령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써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은 모든 피조물, 신자들, 성령의 탄식이 나와 있습니다. 그 탄식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과 고난 가운데서 영광스러운 만유의 회복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 탄식하며 고난을 받지만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영광스러운 미래가 찬란히 빛나도록 돕는 어두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확신 가운데서 승리의 찬가를 부릅니다.
첫째, 피조물과 신자와 성령의 탄식(18-30) : 18절을 보십시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신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고난도 포함됩니다. 나 자신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고자 하는 내적 투쟁의 고난이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죄와 죽기까지 싸웠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 정도의 고난은 아니지만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할 때 겪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쾌락과 돈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시대 가운데 예수님 중심, 사명 중심의 삶을 살고자 할 때 겪는 아픔이 있습니다. 전도할 때 배척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합니다. 사랑과 기도로 섬겼던 양이 뿔 달린 염소같이 되어 목자를 들이받기도 합니다. 매일 먹고 살기 위해서 땀 흘려 노동을 해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질병과 가난과 인간 갈등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고난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런 고난을 당한 우리에게 장차 하나님 나라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신자들이 하늘나라로 옮겨지고 낮은 몸이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 강건한 몸, 천상적인 몸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빌 3:21). 이 영광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인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낙원에 다녀왔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했습니다(고후12:1-4). 하나님께서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 육체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광을 보고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양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가 본 영광이 너무나 크고 확실했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그를 약하게 만들거나 믿음을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너무 고난을 받아서 마음이 황폐화되고 완악하게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며 고난으로 그를 초청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캠퍼스 복음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장차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영광은 현재의 고난에 비하면 너무가 크고 과분할 것입니다. 군인들은 전장에서 받은 상처를 영광스러운 훈장과 같이 여깁니다. 그리고 훈장과 함께 일생 연금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에게도 국가에서 혜택을 줍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받은 고난을 주님은 백배로 갚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시며 영생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리며 고난을 감당할 때 그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고난 앞에 슬픈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외쳐야겠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나만이 겪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만유 회복의 소망 가운데 동심원을 그리면서 피조세계의 탄식, 신자의 탄식, 성령의 탄식을 듣고 묘사합니다. 먼저 피조물의 탄식이 어떠합니까?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 인간 → 만물이라는 영적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자 인간의 다스림을 받게 된 만물까지 저주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던 자연 만물 속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약육강식으로 인해서 신음을 합니다. 식물의 세계를 보면 각종 병균이 들어와서 식물들이 병들고 마르고 썩어버립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환경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강물은 썩어가고 그 속에서 물고기들이 죽어갑니다. 오존층의 파괴로 인해서 지구의 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서 지금 우리는 혹독한 겨울, 잔혹한 태풍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북극의 곰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를 잡아먹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동물들이 멸종해가고 있습니다. 지구의 사막화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이렇게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바라는 것은 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을 회복해야 피조물도 영광의 상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자연만물이 탄식하는 이 고통은 희망이 있는 고통입니다. 여인들이 아기를 해산하기 위해서 겪는 산고와 같은 것입니다. 자연만물의 고통은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 하면서 피조물의 회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만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과 자연의 회복과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음은 신자의 탄식이 나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신자들의 탄식은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호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죄의 공격을 받는 연약한 몸이 반복해서 죄를 짓고 탄식합니다. 그 탄식은 우리가 구속을 받아서 강하고 신령하고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사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은 구원의 첫 열매와 같은 기능을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보증이 되십니다. 신자들은 성령을 받았지만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변화와 부활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만유의 회복과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신자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소망 중에서 구원을 받았다, 소망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소망은 사람이 아직 볼 수 없는 것을 확신 속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한다는 것 자체가 신자가 소유한 구원이 완성된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삶 속에서 이미 이루신 구원을 끝까지 완성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보이는 현 세상은 지나가는 형적에 불과하기 때문에 덧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확실한 영광의 소망에 참여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탄식이 나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도우신다는 동사의 헬라어는 “함께 짐을 짊어지다”, “함께 연합해서 돕는다”는 뜻을 갖습니다. 성령께서 돕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짊어지는 짐은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프게 되면 어머니는 자기도 몸과 마음이 아프면서 보살피고 중보기도를 합니다. 심지어 자식의 아픔을 자신에게 달라며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내가 실패를 반복할 때 나의 자기 사랑이 얼마나 끈질긴가 알면서 탄식하십니다. 실패를 통해서 내가 철저히 낮아지며 죽음을 체험하게 되지만 이때 성령은 탄식하면서 중보기도 해 주십니다. 우리의 반복되는 죄 앞에서 성령은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기도해야 할 많은 일들 중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돕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할지 분별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 잘 못 구하더라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온전한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으로 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사역과 성령의 우리를 위한 탄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성령의 생각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소원을 아시고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엡 3:20절에서 바울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오르셔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고, 성령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며 지상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고 있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효과적으로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떤 일이든지 뒤에서 인도하시는 것은 모든 것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합니다. 여기서 선이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신자들이 덧입을 하나님의 형상을 포함해서 구원의 완성에 기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을 덧입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도저히 어떻게 손 쓸 수 없을 것 같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오해받고 무시받을 때도 있습니다. 물질과 시간과 마음을 드려 양들을 섬겼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양이 연락을 끊어버릴 때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슬픔에 빠지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8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합력하여’라는 동사는 ‘기여하다’, ‘산출하도록 돕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든, 나빠 보이는 일이든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선을 이루도록 기여한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신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신자들이 행하는 악도 선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이 범하는 죄는 결코 선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게 되었을 때 그의 범죄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단련과 성숙을 위한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 역시 그 자체가 선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믿음을 단련시키고 소망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사필귀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지는 모든 일 앞에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내 안에 조각되기까지 성령의 열매를 맺기까지 말씀을 붙들고 영적인 씨름을 해야 합니다. 직장 면접을 할 때 운으로 되는 일이 많습니까? 실력으로 되는 일이 많습니까? 라는 질문이 많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신자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형통하게 되는 일이 많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과 그 공동체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결국 만사형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영화까지도 다 과거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확고하게 세워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둘째, 승리의 찬가(31-39). 신자는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십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2장 3절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말씀과 맥이 통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신자들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진노에 내 주어 공의를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구속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런 희생적인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요구되는 온갖 축복들도 신자들에게 은혜로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학생 양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양을 감당할 내면성을 주십니다. 사랑을 주십니다. 내가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진정으로 양을 사랑해서 섬기고자 할 때 성경 공부할 사람을 보내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고, 제자들에게 천하 만민에게 나아가 제자를 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열쇠들을 주셔서 필요한 자원을 마음껏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또 천사들은 성도들을 위하여 부리는 영으로 주셨습니다(히 1:14).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이것 저것을 다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스가랴 3장에 보면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송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은 대속죄일에 성전에 들어가 자신과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를 드립니다. 가장 깨끗하다고 하는 대제사장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았습니다. 그가 입은 대제사장의 옷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그의 옷은 더러운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그의 죄악을 제하려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셨습니다.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시며 아름다운 의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사탄은 믿음으로 사는 우리를 끊임없이 고소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뿐 아니라 최후 심판 자리에서도 사탄의 고발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무죄를 선언하십니다. 누구도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진 이러한 결정을 뒤집어엎을 수는 없습니다.
신자가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5-37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세상에는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버리려고 시도하는 여러 적대적인 존재들과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노래합니다. NIV에서는 넉넉히 이긴다는 동사를 ‘정복자 이상의 존재이다’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위험과 역경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자신 속에 내재하는 능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를 통해서만 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역경과 고난을 능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근거이며 살아 있는 징표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이며 징표입니다.
바울이 확신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탄은 우리에게 여러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사탄은 또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한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서 서로 사랑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 온갖 고난과 핍박과 위험을 겪습니다. 때로는 평안과 축복들이 우리의 신앙을 느슨하게 만들고 세속적인 잔재미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고 돌이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 승리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과 시련을 당할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서 중보기도 하시는 성령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고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최후 승리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로마서 8:18-39
요절 | 로마서 8:37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지난 주에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성령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써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은 모든 피조물, 신자들, 성령의 탄식이 나와 있습니다. 그 탄식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과 고난 가운데서 영광스러운 만유의 회복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 탄식하며 고난을 받지만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영광스러운 미래가 찬란히 빛나도록 돕는 어두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확신 가운데서 승리의 찬가를 부릅니다.
첫째, 피조물과 신자와 성령의 탄식(18-30) : 18절을 보십시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신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고난도 포함됩니다. 나 자신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고자 하는 내적 투쟁의 고난이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죄와 죽기까지 싸웠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 정도의 고난은 아니지만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할 때 겪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쾌락과 돈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시대 가운데 예수님 중심, 사명 중심의 삶을 살고자 할 때 겪는 아픔이 있습니다. 전도할 때 배척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합니다. 사랑과 기도로 섬겼던 양이 뿔 달린 염소같이 되어 목자를 들이받기도 합니다. 매일 먹고 살기 위해서 땀 흘려 노동을 해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질병과 가난과 인간 갈등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고난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런 고난을 당한 우리에게 장차 하나님 나라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신자들이 하늘나라로 옮겨지고 낮은 몸이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 강건한 몸, 천상적인 몸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빌 3:21). 이 영광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인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낙원에 다녀왔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했습니다(고후12:1-4). 하나님께서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 육체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광을 보고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양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가 본 영광이 너무나 크고 확실했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그를 약하게 만들거나 믿음을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너무 고난을 받아서 마음이 황폐화되고 완악하게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며 고난으로 그를 초청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캠퍼스 복음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장차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영광은 현재의 고난에 비하면 너무가 크고 과분할 것입니다. 군인들은 전장에서 받은 상처를 영광스러운 훈장과 같이 여깁니다. 그리고 훈장과 함께 일생 연금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에게도 국가에서 혜택을 줍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받은 고난을 주님은 백배로 갚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시며 영생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리며 고난을 감당할 때 그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고난 앞에 슬픈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외쳐야겠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나만이 겪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만유 회복의 소망 가운데 동심원을 그리면서 피조세계의 탄식, 신자의 탄식, 성령의 탄식을 듣고 묘사합니다. 먼저 피조물의 탄식이 어떠합니까?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 인간 → 만물이라는 영적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자 인간의 다스림을 받게 된 만물까지 저주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던 자연 만물 속에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약육강식으로 인해서 신음을 합니다. 식물의 세계를 보면 각종 병균이 들어와서 식물들이 병들고 마르고 썩어버립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환경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강물은 썩어가고 그 속에서 물고기들이 죽어갑니다. 오존층의 파괴로 인해서 지구의 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서 지금 우리는 혹독한 겨울, 잔혹한 태풍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북극의 곰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를 잡아먹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동물들이 멸종해가고 있습니다. 지구의 사막화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이렇게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바라는 것은 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을 회복해야 피조물도 영광의 상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자연만물이 탄식하는 이 고통은 희망이 있는 고통입니다. 여인들이 아기를 해산하기 위해서 겪는 산고와 같은 것입니다. 자연만물의 고통은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 하면서 피조물의 회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만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과 자연의 회복과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음은 신자의 탄식이 나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신자들의 탄식은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호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죄의 공격을 받는 연약한 몸이 반복해서 죄를 짓고 탄식합니다. 그 탄식은 우리가 구속을 받아서 강하고 신령하고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사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은 구원의 첫 열매와 같은 기능을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보증이 되십니다. 신자들은 성령을 받았지만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변화와 부활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만유의 회복과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신자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소망 중에서 구원을 받았다, 소망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소망은 사람이 아직 볼 수 없는 것을 확신 속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한다는 것 자체가 신자가 소유한 구원이 완성된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삶 속에서 이미 이루신 구원을 끝까지 완성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보이는 현 세상은 지나가는 형적에 불과하기 때문에 덧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확실한 영광의 소망에 참여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탄식이 나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도우신다는 동사의 헬라어는 “함께 짐을 짊어지다”, “함께 연합해서 돕는다”는 뜻을 갖습니다. 성령께서 돕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짊어지는 짐은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프게 되면 어머니는 자기도 몸과 마음이 아프면서 보살피고 중보기도를 합니다. 심지어 자식의 아픔을 자신에게 달라며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내가 실패를 반복할 때 나의 자기 사랑이 얼마나 끈질긴가 알면서 탄식하십니다. 실패를 통해서 내가 철저히 낮아지며 죽음을 체험하게 되지만 이때 성령은 탄식하면서 중보기도 해 주십니다. 우리의 반복되는 죄 앞에서 성령은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기도해야 할 많은 일들 중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돕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할지 분별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 잘 못 구하더라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온전한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으로 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사역과 성령의 우리를 위한 탄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성령의 생각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소원을 아시고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엡 3:20절에서 바울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오르셔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고, 성령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며 지상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고 있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효과적으로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떤 일이든지 뒤에서 인도하시는 것은 모든 것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합니다. 여기서 선이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신자들이 덧입을 하나님의 형상을 포함해서 구원의 완성에 기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을 덧입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도저히 어떻게 손 쓸 수 없을 것 같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오해받고 무시받을 때도 있습니다. 물질과 시간과 마음을 드려 양들을 섬겼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양이 연락을 끊어버릴 때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슬픔에 빠지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8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합력하여’라는 동사는 ‘기여하다’, ‘산출하도록 돕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든, 나빠 보이는 일이든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선을 이루도록 기여한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신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신자들이 행하는 악도 선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이 범하는 죄는 결코 선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게 되었을 때 그의 범죄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단련과 성숙을 위한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 역시 그 자체가 선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믿음을 단련시키고 소망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사필귀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지는 모든 일 앞에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내 안에 조각되기까지 성령의 열매를 맺기까지 말씀을 붙들고 영적인 씨름을 해야 합니다. 직장 면접을 할 때 운으로 되는 일이 많습니까? 실력으로 되는 일이 많습니까? 라는 질문이 많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신자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형통하게 되는 일이 많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과 그 공동체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결국 만사형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영화까지도 다 과거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확고하게 세워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둘째, 승리의 찬가(31-39). 신자는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십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2장 3절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말씀과 맥이 통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신자들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진노에 내 주어 공의를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구속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런 희생적인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요구되는 온갖 축복들도 신자들에게 은혜로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학생 양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양을 감당할 내면성을 주십니다. 사랑을 주십니다. 내가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진정으로 양을 사랑해서 섬기고자 할 때 성경 공부할 사람을 보내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고, 제자들에게 천하 만민에게 나아가 제자를 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열쇠들을 주셔서 필요한 자원을 마음껏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또 천사들은 성도들을 위하여 부리는 영으로 주셨습니다(히 1:14).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이것 저것을 다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스가랴 3장에 보면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송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은 대속죄일에 성전에 들어가 자신과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를 드립니다. 가장 깨끗하다고 하는 대제사장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았습니다. 그가 입은 대제사장의 옷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그의 옷은 더러운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그의 죄악을 제하려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셨습니다.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시며 아름다운 의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사탄은 믿음으로 사는 우리를 끊임없이 고소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뿐 아니라 최후 심판 자리에서도 사탄의 고발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무죄를 선언하십니다. 누구도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진 이러한 결정을 뒤집어엎을 수는 없습니다.
신자가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5-37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세상에는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버리려고 시도하는 여러 적대적인 존재들과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노래합니다. NIV에서는 넉넉히 이긴다는 동사를 ‘정복자 이상의 존재이다’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위험과 역경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자신 속에 내재하는 능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를 통해서만 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역경과 고난을 능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근거이며 살아 있는 징표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이며 징표입니다.
바울이 확신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탄은 우리에게 여러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사탄은 또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한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서 서로 사랑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 온갖 고난과 핍박과 위험을 겪습니다. 때로는 평안과 축복들이 우리의 신앙을 느슨하게 만들고 세속적인 잔재미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고 돌이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 승리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과 시련을 당할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서 중보기도 하시는 성령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고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최후 승리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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