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2년 로마서 10강(8:1-17)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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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로마서 제 10 강
말씀 | 로마서 8:1-17
요절 | 로마서 8:11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지난 주 우리는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는 말씀을 통해서 죄와 율법 아래 탄식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알면서 죄를 짓습니다. 죄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에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노예와 같이 죄의 사슬에 매여 죄가 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은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죄의 사슬을 끊고 우리에게 참 자유와 새 생명을 줍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일어나는 역사들을 잘 가르쳐 줍니다. 신앙 생활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이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되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죄로 인해 자학하고 정죄감에 시달리며 고통하던 인간들에게 놀라운 희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죄와 사탄의 세력에서 해방을 선포하는 말씀이요 우리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에서 무죄를 선언하는 기쁨과 소망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크고 감격적인 은혜와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절대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생 그리스도의 형상에 까지 이르고자 투쟁할 때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등산을 할 때 정상까지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이 있다고 젊다고 정상까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천히 가지만 확신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정상에 올라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기초에서부터 출발해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에 힘입어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 확실성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흔들리기 시작하고 신앙생활을 멈추거나 돌아서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의 갈등이 있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음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벌을 다 대신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댓가는 죽음’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예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 있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들을 받게 됩니까?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 예수님 안에 없을 때 우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죄의 형벌인 죽음을 두려워하며 허무와 공허감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을 해도 무의미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죄의식으로 평강이 없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힘이 없고 기쁨이 없고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생명의 세계, 성령의 법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는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미 모든 정죄를 예수님이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과거와는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은혜와 사랑의 선포가 나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여인은 죄와 사망 아래 고통하며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으나 예수님께서 그녀를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럴 때 그녀는 짓누르던 모든 정죄가 물러가고 죽음 대신 새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여인과 같이 정죄 받고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구원받아 생명의 법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는 이제 어떤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둘째,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기서 육신은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의미합니다. 즉 육신을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욕구를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진리를 좇지 않고 자기 유익과 세상 영광을 좇는 삶입니다. 돈과 육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물질주의와 육신주의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렇게 죄의 본성을 따라 살 때 죄의 본성이 바라는 일 즉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다 돈 얘기, 음란한 얘기, 정치가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인격을 낳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의 본성을 만족하게 할까 궁리하고 생각이 늘 그쪽으로 향합니다. 그런 삶에는 참 자유와 평화와 생명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고 늘 목마릅니다. 그 결국은 죽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로 사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을 추구하며 죄악된 생각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이 바라시는 일을 생각합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자기중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의 동기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혼의 만족과 진정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영을 따르는 사람이 오직 영의 일만 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을 따르는 자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그것과 투쟁하는 죄의 법이 공존합니다. 이런 두 가지 생각에 의해 갈등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의해서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을 때 마음에 생명과 평안이 밀려옵니다. 성령을 좇을 때 때로는 고난이 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서도 밀려드는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 16:7절을 보면 그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에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보여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가 빌립보에 이르러 복음을 전했을 때 귀신들린 소녀를 고쳐주자 더 이상 점치는 소녀로 인해서 수입이 끊긴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는데 이게 왠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발이 차꼬에 채워져서 감옥에 갇혀 있는데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늦은 밤인데 이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찬송을 불렀습니다. 상한 몸으로 인해 육신이 쓰리고 아팠지만 감사하고 찬양하는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의 기도와 찬양을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모든 매인 것들이 풀리고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렸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사람은 진정한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아도 평안이 없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고 성공을 해도 마음의 평안이 없이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참된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난할지라도 서로 사랑하고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셋째,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오늘날 북미나 유럽 지역에서 실제로는 주일에 예배도 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9절 말씀을 볼 때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 안에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그 속에 거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는 육신의 본성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됩니다. 갈 5:17절은 말씀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해 죽게 되지만 우리의 영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살아 있게 됩니다.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려주십니다. 우리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는 죄악된 본성에 져서 함부로 살면 안되겠습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비참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늘 거하시며 우리를 도와주고자 기다리시는 성령의 의지하여 몸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는 때마다 올라오는 죄를 회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자기 부인의 투쟁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산다고 했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일 때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영적 전쟁터에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사탄의 지배를 받는 죄의 본성과 늘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6절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타락한 본성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죄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니 그 자유로 죄를 짓는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섬기며 종노릇할 때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서 자기의 욕심을 부인하고 의의 무기로 우리의 지체를 드릴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육신의 열매와 반대입니다. 음행 대신에 진정한 사랑, 분노와 미움 대신에 희락과 화평, 쉽게 화를 내고 참지 못하는 대신에 오래 참음, 거칠고 무례함 대신에 친절과 온유, 원수 맺고 당을 짓고 분쟁하고 시기하는 대신에 충성합니다. 얼굴에 항상 백만불짜리 웃음을 달고 다니기 때문에 어두운 곳을 환하게 밝히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합니다. 성령을 좇아서 살아가는 신자들은 근엄하고 형식적인 바리새인들과 달리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단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5:24). 우리의 죄악된 육신은 죽은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날마다 나의 죽음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예외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우리의 생각을 복종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진리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매일 영적인 일용할 양식을 먹고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삶을 해석하는 렌즈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경험과 상상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 부족한 정보 등으로 인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을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죄악 된 생각이 들어오면 이를 말씀의 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머리에 왔다 갔다 합니다. 이때 죄악 된 생각들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쫓아내야 합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 머리에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는 것처럼 죄악 된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말을 제어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살 수 없습니다. 최후로 행동을 제어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받으면서 생활합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에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우리는 예전에는 하나님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아버지께 나아가 교제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버려진 고아들이 아닙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전능하신 분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그를 찬송하고 마음의 소원을 아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상속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영생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와 함께 영광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을 통해서만 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고난을 통해서 참여하는 영광의 나라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들어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고난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의롭게 살고자 할 때 고난이 따릅니다. 이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고난이 따릅니다. 한 목자님은 세상의 뇌물을 받지 않자 죄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임요한 형제는 금요 리더미팅이 있는 날에 직장에서 회식이 있었습니다. 리더미팅에 참여해야 하는가, 직장 회식에 참여해야 하는가 갈등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식에 가는 것을 부인하고 리더 미팅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저와 동역자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교를 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사람들의 무시를 받습니다. 이 고난도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신자는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 생활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늘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더욱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영국이 낳은 청교도 신앙가 존 번연은 국왕의 명을 어겼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장이 번연에게 윗사람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따라 문을 나섰던 번연은 얼마쯤 가다가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왜 왔느냐고 묻는 간수장에게 번연은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이 나라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간수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셨기에 목사님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 이제 제가 언제 목사님께 가시라 오시라 하지 않을 테니 목사님의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결코 내 고집이나 방법대로 생활하지 마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양심에 비쳐오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 로마서 8:1-17
요절 | 로마서 8:11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지난 주 우리는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는 말씀을 통해서 죄와 율법 아래 탄식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알면서 죄를 짓습니다. 죄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에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노예와 같이 죄의 사슬에 매여 죄가 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은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죄의 사슬을 끊고 우리에게 참 자유와 새 생명을 줍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일어나는 역사들을 잘 가르쳐 줍니다. 신앙 생활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이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되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죄로 인해 자학하고 정죄감에 시달리며 고통하던 인간들에게 놀라운 희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죄와 사탄의 세력에서 해방을 선포하는 말씀이요 우리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에서 무죄를 선언하는 기쁨과 소망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크고 감격적인 은혜와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절대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생 그리스도의 형상에 까지 이르고자 투쟁할 때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등산을 할 때 정상까지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이 있다고 젊다고 정상까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천히 가지만 확신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정상에 올라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기초에서부터 출발해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에 힘입어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 확실성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흔들리기 시작하고 신앙생활을 멈추거나 돌아서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갈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의 갈등이 있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음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벌을 다 대신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댓가는 죽음’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예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 있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들을 받게 됩니까?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 예수님 안에 없을 때 우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죄의 형벌인 죽음을 두려워하며 허무와 공허감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을 해도 무의미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죄의식으로 평강이 없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힘이 없고 기쁨이 없고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생명의 세계, 성령의 법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는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미 모든 정죄를 예수님이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과거와는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은혜와 사랑의 선포가 나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여인은 죄와 사망 아래 고통하며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으나 예수님께서 그녀를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럴 때 그녀는 짓누르던 모든 정죄가 물러가고 죽음 대신 새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여인과 같이 정죄 받고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구원받아 생명의 법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는 이제 어떤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둘째,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기서 육신은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의미합니다. 즉 육신을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욕구를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진리를 좇지 않고 자기 유익과 세상 영광을 좇는 삶입니다. 돈과 육체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물질주의와 육신주의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렇게 죄의 본성을 따라 살 때 죄의 본성이 바라는 일 즉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다 돈 얘기, 음란한 얘기, 정치가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인격을 낳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의 본성을 만족하게 할까 궁리하고 생각이 늘 그쪽으로 향합니다. 그런 삶에는 참 자유와 평화와 생명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고 늘 목마릅니다. 그 결국은 죽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로 사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을 추구하며 죄악된 생각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이 바라시는 일을 생각합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자기중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의 동기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혼의 만족과 진정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영을 따르는 사람이 오직 영의 일만 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을 따르는 자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그것과 투쟁하는 죄의 법이 공존합니다. 이런 두 가지 생각에 의해 갈등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의해서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을 때 마음에 생명과 평안이 밀려옵니다. 성령을 좇을 때 때로는 고난이 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서도 밀려드는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 16:7절을 보면 그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에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보여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가 빌립보에 이르러 복음을 전했을 때 귀신들린 소녀를 고쳐주자 더 이상 점치는 소녀로 인해서 수입이 끊긴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는데 이게 왠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발이 차꼬에 채워져서 감옥에 갇혀 있는데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늦은 밤인데 이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찬송을 불렀습니다. 상한 몸으로 인해 육신이 쓰리고 아팠지만 감사하고 찬양하는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의 기도와 찬양을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모든 매인 것들이 풀리고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렸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사람은 진정한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아도 평안이 없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고 성공을 해도 마음의 평안이 없이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참된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난할지라도 서로 사랑하고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셋째,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오늘날 북미나 유럽 지역에서 실제로는 주일에 예배도 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9절 말씀을 볼 때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 안에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그 속에 거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는 육신의 본성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됩니다. 갈 5:17절은 말씀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해 죽게 되지만 우리의 영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살아 있게 됩니다.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려주십니다. 우리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는 죄악된 본성에 져서 함부로 살면 안되겠습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비참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늘 거하시며 우리를 도와주고자 기다리시는 성령의 의지하여 몸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는 때마다 올라오는 죄를 회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자기 부인의 투쟁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산다고 했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일 때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영적 전쟁터에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사탄의 지배를 받는 죄의 본성과 늘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6절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할 때 타락한 본성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죄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니 그 자유로 죄를 짓는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섬기며 종노릇할 때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서 자기의 욕심을 부인하고 의의 무기로 우리의 지체를 드릴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육신의 열매와 반대입니다. 음행 대신에 진정한 사랑, 분노와 미움 대신에 희락과 화평, 쉽게 화를 내고 참지 못하는 대신에 오래 참음, 거칠고 무례함 대신에 친절과 온유, 원수 맺고 당을 짓고 분쟁하고 시기하는 대신에 충성합니다. 얼굴에 항상 백만불짜리 웃음을 달고 다니기 때문에 어두운 곳을 환하게 밝히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합니다. 성령을 좇아서 살아가는 신자들은 근엄하고 형식적인 바리새인들과 달리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단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5:24). 우리의 죄악된 육신은 죽은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날마다 나의 죽음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예외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우리의 생각을 복종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진리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매일 영적인 일용할 양식을 먹고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삶을 해석하는 렌즈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경험과 상상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 부족한 정보 등으로 인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을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죄악 된 생각이 들어오면 이를 말씀의 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머리에 왔다 갔다 합니다. 이때 죄악 된 생각들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쫓아내야 합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 머리에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는 것처럼 죄악 된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말을 제어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살 수 없습니다. 최후로 행동을 제어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받으면서 생활합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에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우리는 예전에는 하나님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아버지께 나아가 교제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버려진 고아들이 아닙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전능하신 분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그를 찬송하고 마음의 소원을 아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상속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영생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와 함께 영광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을 통해서만 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고난을 통해서 참여하는 영광의 나라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들어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고난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의롭게 살고자 할 때 고난이 따릅니다. 이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고난이 따릅니다. 한 목자님은 세상의 뇌물을 받지 않자 죄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임요한 형제는 금요 리더미팅이 있는 날에 직장에서 회식이 있었습니다. 리더미팅에 참여해야 하는가, 직장 회식에 참여해야 하는가 갈등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식에 가는 것을 부인하고 리더 미팅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저와 동역자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교를 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사람들의 무시를 받습니다. 이 고난도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신자는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 생활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늘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더욱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영국이 낳은 청교도 신앙가 존 번연은 국왕의 명을 어겼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장이 번연에게 윗사람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따라 문을 나섰던 번연은 얼마쯤 가다가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왜 왔느냐고 묻는 간수장에게 번연은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이 나라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간수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셨기에 목사님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 이제 제가 언제 목사님께 가시라 오시라 하지 않을 테니 목사님의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결코 내 고집이나 방법대로 생활하지 마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양심에 비쳐오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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