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2년 로마서 9강(7:1-25)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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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로마서 제 9 강
말씀 | 로마서 7:1-25
요절 | 로마서 7:24,25a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고 그와 연합하여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 자신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복음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어린 신자들이 율법적인 투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성숙해 보이는 신자가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실망스럽게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도 신자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지만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고 죄에 넘어지는 자신을 볼 때 절망스럽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이런 우리에게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해줍니다.
첫째, 율법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1-6) :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합니다. 한 여자가 거룩하고 의로운 율법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삶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와 함께 살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씨는 때마다 완벽한 것을 요구했습니다. 항상 집안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고 정리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끼니때마다 밥을 해서 가족들의 건강을 챙겨주어야 했습니다. 빨래도 항상 깨끗하게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난방비를 절약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면서 겨울철에도 냉방에서 자게 만들었습니다. 이 여자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해도 칭찬을 듣지를 못했습니다. 율법씨가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아서 한 두 번 최선을 다하고 나면 다음에 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령을 피우게 되고 마음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율법씨의 요구를 매일 같이 감당하다가 지쳐버렸습니다. 하루는 율법씨가 중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소복을 입고 슬퍼했지만 속으로는 이제 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묘한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납니다. 만일 그 남자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가 됩니다.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고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합니다.
여기서는 율법씨가 죽었지만 사실은 우리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얻어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결혼을 한 새 신부가 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청소년들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영웅심리가 생긴다고 합니다. 율법적인 투쟁을 하는 사람은 쉽게 자기 의에 빠집니다. 율법준수를 잘 하면 못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또 하지 못하면 자책감을 느낍니다. 이런 삶은 영적인 진보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8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야말로 승리하는 크리스천의 삶의 비결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고 따를 때 기쁨이 넘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율법 아래 있던 아담의 삶(7-13) : 사도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활동을 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율법은 죄로 심히 죄 되게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를 때는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면서도 죄의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죄의 낙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으면 무슨 재미로 사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다른 계명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금하면 되었지만 탐내지 말라는 말씀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는 이 탐심 문제를 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고자 투쟁할 때 자신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소원자체도 이기적인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절망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죄를 짓는 일에 용감합니다. 그러나 계명을 깨닫기 시작하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나를 가두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계명을 의식하면서 부자유하게 됩니다. 사람이 율법적이 되면 차가워지고 옆을 지나가면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자기만 고통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사람도 힘들게 만듭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율법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또 위에 있는 사람들이 율법적이 되기 쉽습니다. 지시하는 입장에 서면 완벽을 요구하게 되고 판단하게 됩니다.
11절에서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성범죄에 대한 예방 교육을 하다가 호기심에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다가 옆에 있는 사이트를 눌러서 죄의 호기심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발전되어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는 웅크리고 있는 사자와 같이 틈만 나면 나를 속이고 공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악한 것일까요?
12,13절을 보십시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거룩한 삶, 의로운 삶, 선한 삶의 수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준에 미치지 못하므로 정죄를 받고 죽을 지경이 됩니다. 율법은 높은 수준은 제시하지만 이를 행할 힘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상적인 목표만 제시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는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의 괴뢰감으로 고통하게 됩니다. 율법적인 삶으로는 결코 자유와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셋째, 율법이 지닌 연약함, 내적 갈등(14-25) :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곧 그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다고 말합니다. 죄 아래 팔렸다는 말은 죄의 종노릇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은 바울이 현재 신자로서 고백하는 말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14-25절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자가 죄에 빠져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부분적으로 경험될 수는 있습니다. 거듭나기는 했지만 율법을 행함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자 하는 신자들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신자들 곧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이스라엘인, 심지어 오순절 이전의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과 동시대에 살던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생했지만 율법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구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듭났지만 복음이 아니라 율법을,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서 사는 신자들인 것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의 영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15절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선한 것을 인정합니다. 18절에서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고백합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육신에 선이 거하지 아니하고 선을 행하는 것도 없습니다. 소원의지와 실천의지가 따로 놀면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죄가 상주해 있음을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19,20절에서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의 갈등은 계속됩니다. 어떤 랍비는 말하기를 “죄는 손님으로 들어와서 주인으로 들어앉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한 법을 깨달았습니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21). 선과 악이 공존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깨달은 인간은 선악한 존재입니다. 순자는 성악설을,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지만 바울은 성선악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이지만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살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자기의지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변화가 더디다든지 기도 응답이 없이 기도 생활을 하는 자신을 생각할 때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일용할 양식도 먹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일 예배나 드리는 정도로 살아갑니다. 그래도 살아집니다.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리고 정욕에 빠져서 음란 동영상을 보면서 죄를 즐깁니다. 목자라고 하는데 이기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이 없는 자신으로 인해서 고통합니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즐기면서 불신자와 다름 없는 삶을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영적인 성장을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자 하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는 때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거룩함에 이르고자 하는 영적인 목표가 없어지고 되는 대로 안일하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자기 힘으로 거룩함에 이르고자 투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22,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하나님의 법과 마음의 법은 동일한 것이고, 한 다른 법은 죄의 법과 같은 것입니다. 이 법은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권세입니다. 육신적인 신자의 마음은 율법에 있는 하나님의 요구들을 시인하고 즐거워하기조차 하지만 그것들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율법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사람 속에 있는 악한 충동이 더 강해집니다. 율법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악한 욕망의 공격을 받기가 쉽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곤고한 사람이라는 탄식은 나는 얼마나 지독한 놈인가, 나는 얼마나 나쁜 놈인가라는 뜻입니다. 죽겠다는 탄식입니다. 이 고백은 구원받았으나 이 땅에서 생명을 마칠 때까지는 죄와 싸우며 살아야 하는 성도의 끊임없는 고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화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만족되는 그런 완성된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입니다. 이는 죄에 지고 말았다는 절망적인 탄식이라기보다는 죽음에까지 처하는 극한적 영적 투쟁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능력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게 나 자신을 의롭게 할 그 어떤 힘도 없습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이 고백은 내가 의롭다 함을 받기 전에도, 거룩하게 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처음에는 사도 중에 작은 자에서, 성도 중에 작은 자로, 나중에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기 고백을 합니다.
모순되게 들리지만 이 고백을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바울이 8장에서 언급한 정상적인 신자의 신분과 생활을 묘사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것이 신자의 모습이라면 신자는 매일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과 같은 죄의식과 자기반성을 가져야 할텐데 바울은 어디에서도 그런 삶의 모습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14-25절에서 타락한 인간 존재를 변화시킬 수 없는 율법의 무능성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거듭난 신자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할 때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존재로서 하나님의 명령들을 준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삶 속에 죄와의 싸움이라는 긴장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25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감격은 24절의 절규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상한 것은 감사의 탄성으로 끝을 맺지 않고 갈등 속에 있는 자아의 모습에 대한 마무리를 묘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25절 후반절을 앞선 논의의 요약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감사의 말들을 할 때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이룩한 새로운 상황들을 소개한다는 사실과 일치합니다(1:8; 6:17).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그를 믿고 그와 연합한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합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윤리와 사회질서를 제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로마서 7:1-25
요절 | 로마서 7:24,25a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고 그와 연합하여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 자신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복음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어린 신자들이 율법적인 투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성숙해 보이는 신자가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실망스럽게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도 신자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지만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고 죄에 넘어지는 자신을 볼 때 절망스럽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이런 우리에게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해줍니다.
첫째, 율법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1-6) :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합니다. 한 여자가 거룩하고 의로운 율법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삶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와 함께 살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씨는 때마다 완벽한 것을 요구했습니다. 항상 집안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고 정리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끼니때마다 밥을 해서 가족들의 건강을 챙겨주어야 했습니다. 빨래도 항상 깨끗하게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난방비를 절약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면서 겨울철에도 냉방에서 자게 만들었습니다. 이 여자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해도 칭찬을 듣지를 못했습니다. 율법씨가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아서 한 두 번 최선을 다하고 나면 다음에 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령을 피우게 되고 마음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율법씨의 요구를 매일 같이 감당하다가 지쳐버렸습니다. 하루는 율법씨가 중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소복을 입고 슬퍼했지만 속으로는 이제 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묘한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납니다. 만일 그 남자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가 됩니다.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고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합니다.
여기서는 율법씨가 죽었지만 사실은 우리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을 얻어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결혼을 한 새 신부가 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청소년들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영웅심리가 생긴다고 합니다. 율법적인 투쟁을 하는 사람은 쉽게 자기 의에 빠집니다. 율법준수를 잘 하면 못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또 하지 못하면 자책감을 느낍니다. 이런 삶은 영적인 진보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8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야말로 승리하는 크리스천의 삶의 비결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고 따를 때 기쁨이 넘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율법 아래 있던 아담의 삶(7-13) : 사도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활동을 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율법은 죄로 심히 죄 되게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를 때는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면서도 죄의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죄의 낙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으면 무슨 재미로 사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다른 계명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금하면 되었지만 탐내지 말라는 말씀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는 이 탐심 문제를 극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고자 투쟁할 때 자신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소원자체도 이기적인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절망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죄를 짓는 일에 용감합니다. 그러나 계명을 깨닫기 시작하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나를 가두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계명을 의식하면서 부자유하게 됩니다. 사람이 율법적이 되면 차가워지고 옆을 지나가면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자기만 고통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사람도 힘들게 만듭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율법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또 위에 있는 사람들이 율법적이 되기 쉽습니다. 지시하는 입장에 서면 완벽을 요구하게 되고 판단하게 됩니다.
11절에서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성범죄에 대한 예방 교육을 하다가 호기심에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다가 옆에 있는 사이트를 눌러서 죄의 호기심에 빠지게 되고 그것이 발전되어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는 웅크리고 있는 사자와 같이 틈만 나면 나를 속이고 공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악한 것일까요?
12,13절을 보십시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거룩한 삶, 의로운 삶, 선한 삶의 수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준에 미치지 못하므로 정죄를 받고 죽을 지경이 됩니다. 율법은 높은 수준은 제시하지만 이를 행할 힘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상적인 목표만 제시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는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의 괴뢰감으로 고통하게 됩니다. 율법적인 삶으로는 결코 자유와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셋째, 율법이 지닌 연약함, 내적 갈등(14-25) :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곧 그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다고 말합니다. 죄 아래 팔렸다는 말은 죄의 종노릇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은 바울이 현재 신자로서 고백하는 말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14-25절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자가 죄에 빠져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부분적으로 경험될 수는 있습니다. 거듭나기는 했지만 율법을 행함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자 하는 신자들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신자들 곧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이스라엘인, 심지어 오순절 이전의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과 동시대에 살던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생했지만 율법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구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듭났지만 복음이 아니라 율법을,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서 사는 신자들인 것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의 영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15절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선한 것을 인정합니다. 18절에서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고백합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육신에 선이 거하지 아니하고 선을 행하는 것도 없습니다. 소원의지와 실천의지가 따로 놀면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죄가 상주해 있음을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19,20절에서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의 갈등은 계속됩니다. 어떤 랍비는 말하기를 “죄는 손님으로 들어와서 주인으로 들어앉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한 법을 깨달았습니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21). 선과 악이 공존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깨달은 인간은 선악한 존재입니다. 순자는 성악설을,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지만 바울은 성선악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이지만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살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자기의지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변화가 더디다든지 기도 응답이 없이 기도 생활을 하는 자신을 생각할 때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일용할 양식도 먹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일 예배나 드리는 정도로 살아갑니다. 그래도 살아집니다.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리고 정욕에 빠져서 음란 동영상을 보면서 죄를 즐깁니다. 목자라고 하는데 이기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이 없는 자신으로 인해서 고통합니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즐기면서 불신자와 다름 없는 삶을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영적인 성장을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자 하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는 때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거룩함에 이르고자 하는 영적인 목표가 없어지고 되는 대로 안일하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자기 힘으로 거룩함에 이르고자 투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22,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하나님의 법과 마음의 법은 동일한 것이고, 한 다른 법은 죄의 법과 같은 것입니다. 이 법은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권세입니다. 육신적인 신자의 마음은 율법에 있는 하나님의 요구들을 시인하고 즐거워하기조차 하지만 그것들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율법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사람 속에 있는 악한 충동이 더 강해집니다. 율법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악한 욕망의 공격을 받기가 쉽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곤고한 사람이라는 탄식은 나는 얼마나 지독한 놈인가, 나는 얼마나 나쁜 놈인가라는 뜻입니다. 죽겠다는 탄식입니다. 이 고백은 구원받았으나 이 땅에서 생명을 마칠 때까지는 죄와 싸우며 살아야 하는 성도의 끊임없는 고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화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만족되는 그런 완성된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입니다. 이는 죄에 지고 말았다는 절망적인 탄식이라기보다는 죽음에까지 처하는 극한적 영적 투쟁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능력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게 나 자신을 의롭게 할 그 어떤 힘도 없습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이 고백은 내가 의롭다 함을 받기 전에도, 거룩하게 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처음에는 사도 중에 작은 자에서, 성도 중에 작은 자로, 나중에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기 고백을 합니다.
모순되게 들리지만 이 고백을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바울이 8장에서 언급한 정상적인 신자의 신분과 생활을 묘사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것이 신자의 모습이라면 신자는 매일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과 같은 죄의식과 자기반성을 가져야 할텐데 바울은 어디에서도 그런 삶의 모습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14-25절에서 타락한 인간 존재를 변화시킬 수 없는 율법의 무능성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거듭난 신자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할 때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존재로서 하나님의 명령들을 준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삶 속에 죄와의 싸움이라는 긴장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25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감격은 24절의 절규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상한 것은 감사의 탄성으로 끝을 맺지 않고 갈등 속에 있는 자아의 모습에 대한 마무리를 묘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25절 후반절을 앞선 논의의 요약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감사의 말들을 할 때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이룩한 새로운 상황들을 소개한다는 사실과 일치합니다(1:8; 6:17).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그를 믿고 그와 연합한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합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윤리와 사회질서를 제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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