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로마서 2012년 로마서 8강(6:1-23)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99회 작성일 12-11-11 13:39

본문

2012년 가을 로마서 8강
말씀 | 로마서 6:1-23
요절 | 로마서 6:13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죄문제가 있습니다. 이 죄로 인해서 우리는 평생 죄책감과 불의감으로 고통하며 남몰래 슬피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지시고 온갖 수치와 조롱과 천 번 이상 까무러치는 극심한 육체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참 자유를 주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의 모든 주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같이 희게 되었고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31:34)”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의롭게 되어 영원한 구원을 약속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엄청난 축복과 특권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이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자로서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과거의 내가 죄와 함께 죽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질문은 5:20절에 대한 반대자들의 견해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자 그럼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도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죄와 관계를 끊고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습니다. 죄의 통치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언제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우리도 함께 못 박혀 죽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의 욕구나 의욕이 없어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을 느낍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도 죄에 대하여 완전히 결별하였다는 것입니다. 죄와 법적인 관계를 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죄값에 대해서 나에게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요구하는 부채를 다 청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무슨 관계이기에 그렇게 여길 수 있습니까?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에 가능합니다. 이는 참으로 신비로운 사실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개종할 때에 사람을 물 속에 담갔다가 일으키는 의식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파격적으로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오실 예수님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성령으로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통해서 신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생명 안에서 함께 사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옛 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던 나의 옛 자아를 말합니다. 옛 사람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죽어서 없어졌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옛 사람이 다시 튀어나와서 나를 이끌어 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습니다. 옛 사람과 나는 이제 단절되었습니다. 옛 사람은 끝난 사람입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고후 5: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입니다. 죄의 몸이란 죄에 지배받는 몸, 죄의 통제를 받는 몸이란 뜻입니다. 죄의 몸이 죽었다는 것은 죽어 효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지배를 받고 통제를 받는 것이 불가능한 몸입니다. 우리의 몸은 죄의 몸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죄의 영향을 받고 제한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배받고 통제를 받지는 않습니다. 죄의 효력이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연합되었는데 연합의 관계는 결혼 제도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처녀 총각이 결혼을 해서 한 몸이 되면 성을 통일해서 하나로 쓰고, 배우자의 재산과 지위를 하나로 사용합니다. 비천하면 비천한대로, 부자면 부자대로, 법적인 변화가 곧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것이 나에게 일어난 것으로 전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 사건이 법적으로 나의 것으로 변화가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사회적인 관계의 변화가 옵니다. 우리의 감정의 변화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감정적인 변화가 따라 나오지 않지만 관계의 변화가 옵니다. 나중에는 인격과 심리의 변화가 따라옵니다. 체험적인 측면에서 변화가 따라 나옵니다. 결혼한 부부는 대개 취미, 기호, 식성이 같아지고 심지어 얼굴까지도 닮아 갑니다. 인격적인, 실제적인 공유가 깊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함께 살아난 것을 믿습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런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8-11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날마다 순간 순간마다 적용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는 우리 신자가 가져야 하는 정체성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같이 우리는 가지이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말라비틀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면 자연히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친절과 충성과 온유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 속에 새겨지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주님과 교제합니다. 인격적인 말씀을 통해서 매일 매일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기도로 나의 뜻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합니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기도에 응답하심을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그가 주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삶은 거룩함과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연합된 삶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지체를 드리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둘째, 나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 몸은 무기입니다. 전쟁에서 쓰는 병기입니다. 나의 지체는 손과 발과 눈과 머리뿐만 아니라 나의 생각과 행동들, 나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드리면 죄의 병기가 됩니다. 그때 죄가 나를 주관하게 됩니다. 죄가 나를 끌고 다닙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영적 전쟁에 뛰어 들어서 자신을 무기로 드리지 않고 고상한 신자로 남고자 하면 점점 안일해지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똑같은 지체라도 누가 쓰는가? 누구에게 바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똑같은 돈도 자선단체에 드리면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곳에 쓰이지만 테러단체에 드리면 죽이는데 쓰입니다. 사람들은 지체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가 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죄에게 자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결국 죄에 드리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지 않으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서도 왜 자꾸 죄에 넘어질까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 드리든지 죄에게 주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가능성들을 적극적으로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드려야합니다. 칼은 쓰면 쓸수록 날카로와지고 명검이 되듯이, 하나님께 드리면 드릴수록 빛이 나고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숨겨두면 녹슬고 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시간과 물질과 진심을 드릴 때 살아있고, 능력 있고,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한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죄를 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데서 오는 순간적인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한한 기쁨을 주겠노라는 제안을 듣고서도 그저 술이나 섹스나 야망과 같은 것들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놀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시시한 것들에 쉽게 만족해 버립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어서 뒷골목이나 배회하는 무지한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드리는 삶이 생명의 길이요, 자기 성장의 길이요, 승리의 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말은 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법 아래에서 죄의 종노릇하였지만 이제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연합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새 생명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을 통해서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셋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15-23절은 우리가 의의 종이 되어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또 회개하고 용서 받으면 되겠지 라며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은혜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왜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까? 이는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하는 가에 따라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16a). 19절을 보십시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사도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거룩을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후에도 ‘너희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거룩’이란 단어가 460번이나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까? 하나님의 핵심적인 성품이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곳에 임재하십니다. 그래서 ‘거룩은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초청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데나 임재하시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나 당신의 능력과 지혜를 부어 주시지 않습니다. 죄로 부터 자신을 지키고 거룩을 추구하는 자, 순결한 자에게 찾아가시고 그에게 놀라운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 시대는 거룩과 경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거룩과 경건하면 왠지 고리타분에게 느껴지고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신자들조차 성공과 출세에 관심이 많지, 거룩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거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될 때 비로소 신의 성품에 참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는 신비한 연합의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열매는 영생입니다.

  22,2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여 우리 자신을 의에게 드리는 생활을 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인격과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그를 닮고 고난을 사랑하여 그의 삶에서 몰약 냄새가 납니다.

  저는 시카고의 안요셉 선교사님을 생각하면 고난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은 제자의 냄새, 몰약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기도합니다. 그는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종로 종로 3부, 종로 7부, 과테말라, 멕시코, 스페인 등등을 개척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7년 동안 아내와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대사가 되기 직전에 이를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대사로 살고자 결단을 했습니다. 그는 닭 잡는 공장에서 노무자로 일을 하였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이어폰을 항상 꽂고 일하다가 귀가 고장나서 보청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후에 그는 교사로서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자녀의 지원을 받으면서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스페니쉬로 주일 메시지를 전하고 남미 선교사들을 돌아보며 세계 선교를 위해서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하다보면 각자의 죄로 인해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고자 하면 형제의 허물을 감당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날마다 죽지만 부활의 능력을 덧입습니다. 하나님의 종된 생활은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와지게 됩니다. 그 내면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되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깊이 연합함으로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려 헌신하는 가운데 놀라운 영광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영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46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648 로마서 이엘리야 893 12-09
647 로마서 이엘리야 897 12-02
646 로마서 이엘리야 893 11-25
645 특강 이엘리야 866 11-18
열람중 로마서 이엘리야 900 11-11
643 로마서 이엘리야 907 11-04
642 로마서 이엘리야 904 10-28
641 로마서 이엘리야 1011 10-21
640 로마서 이엘리야 928 10-14
639 로마서 이엘리야 914 10-07
638 로마서 이엘리야 983 09-30
637 로마서 이엘리야 964 09-23
636 마가복음 이엘리야 870 09-16
635 마가복음 이엘리야 955 09-09
634 마가복음 이엘리야 955 09-0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