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2년 로마서 7강(5:1-21) 의롭게 된 자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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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로마서 제 7 강
말씀 | 로마서 5:1-21
요절 | 로마서 5:1
의롭게 된 자의 축복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오늘 말씀은 우리를 참 행복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잘 누리고 그 은혜와 사랑에 힘입어 사명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축복들을 잘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인간은 죄로 인해 모두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죄가 없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깨끗하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다 값을 치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가 주는 수치와 모욕과 고통을 우리 대신 다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축복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이 평화는 나의 감정이나, 나의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평화입니다. 요한복음 14:27절은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해야겠습니다. 신앙생활은 환경이나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을 시기하여 여러모로 방해 작전을 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역사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도록 유혹하고 잡아끕니다. 우리가 이 사탄의 간계에 넘어가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굳게 의지함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부모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충분히 누리도록 해야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사랑은 조금 밖에 주지 않고 알바를 해서 돈을 벌라, 일을 하라 요구하면 그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잘 누릴 때 복을 잘 나누어 주고 영향력을 끼치며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은혜에 들어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것은 궁전에 들어가 왕을 알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성전은 본래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었고 그 사이에는 막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휘장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만인이 대제사장이 되어 죄를 지을 때마다 그에게 나아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중재자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게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율법의 속박 안에서 정죄감과 자학과 두려움으로 고통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 이루었다’ 선포하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면의 자유함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축복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이 땅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자님들의 소감을 통해서 그 영광을 보기도 하고, 나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영광, 한마디로 우리의 영화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지, 칭의로 시작되어 마지막 목적지인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재림 때에 욕된 몸을 벗고 영광스럽게 될 사실을 미리 내다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21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장래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을 확신하면서 자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어떤 환란도 능히 이겨내며 환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셋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즐거움입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만이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환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알기 때문입니다.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 뒤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 환난을 통해 내 마음이 더욱 가난해 지고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환난을 통하여 보입니다. 그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환난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환난은 우리에게 인내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내는 참고 견디는 내적인 힘입니다. 어떤 역경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질긴 힘입니다. 이는 속사람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내는 또한 우리에게 연단이라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연단은 ‘성숙한 인격, 훈련된 인격’을 의미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를 덧입고,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비밀을 체험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누가는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장터로 끌고 가서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무리들이 일제히 그들을 고발하였습니다.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든든히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깊은 옥에 갇히고 발은 차고에 든든히 채웠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이 고생을 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원통한 일입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토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환난 중에 찬송하고 즐거워하자 모든 매인 것들이 풀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이들을 세상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우리 신자들에게 환난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하나님 나라 소망이요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입니다. 환난을 당하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이 온통 이 세상의 것들에 가 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소망하던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소망은 환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성취가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환난은 누구나 다 겪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넷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가 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이미 부어졌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부어졌다고 하십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졌다고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다는 증거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는 수단 역할도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합시킬 때 우리에게 이신칭의, 회개, 성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의 화해가 일어납니다. 붓는다는 동사는 넘치도록 풍성하게 들어 붓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붓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쏟아 부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 일은 우리가 회심할 때에 단번에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효력을 발휘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선물로 경험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성령의 기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살전1:6).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갈3:5). 38년 된 병자 같이 무기력하던 사람이 성령의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힘을 얻고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카리스마적 언변과(고전 1:4-7), 윤리적인 변화(고전 6:9-11)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담배와 술에 중독되어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의 역사로 담배를 끊고, 술을 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의 종이 되었는데 성령의 역사로 분노가 일어날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온유하게 행동합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은 탐욕을 부리던 삶에서 성령의 역사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삶으로 변화가 됩니다. 성령의 선물로 인해서 죄가 씻겨지고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6-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훌륭한 모습일 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강건할 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믿음이 좋고, 하나님을 잘 섬길 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경건하지 않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교만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이기심과 정욕과 음란 가운데 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목숨을 바쳐 사랑하셨습니다. 생명을 다해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들을 살렸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끝까지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하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우리의 구원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평생 제자의 길, 목자의 길을 갑니다. 나의 교만과 불신의 죄를 감당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양들의 교만과 불신의 죄를 끝까지 감당해 주고 씨름해 주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기 않고 사명인의 삶을 삽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 양들을 섬깁니다.
더 모스트(The Most)라는 영화 아시지요? 다리라는 뜻인데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즐겁게 대화도 하고 실연을 당하여 창밖을 보고 멍하니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다리가 들려져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런데 배가 오면 다리를 올리고 지나가면 내려야 되는 기차 선로원이 자기 아들이 다리를 내리는 레버를 내리려고 하다가 밑으로 떨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순간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뇌를 하게 됩니다. 다리를 내리면 아들이 죽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올린 채 그대로 두면 기차에 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 그는 아들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수백 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위해 내어 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내렸습니다. 이 영화는 자기 아들을 희생하고 기차에 탄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실화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면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다섯째,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또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즐거움, 진정한 즐거움, 하늘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축복을 감사하며 잘 누리고 이 축복을 잘 나눠주는 복의 근원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21절은 대표성의 원리를 들어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 대조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제 2의 아담으로서 인류를 대표합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초래된 죄와 사망의 통치 시대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통치 시대로 바뀌어졌습니다. 아담 이후로 인류의 죄악된 상황이 아무리 크고 깊다고 하여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시다.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바라보고 즐거워합시다.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합시다.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말씀 | 로마서 5:1-21
요절 | 로마서 5:1
의롭게 된 자의 축복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오늘 말씀은 우리를 참 행복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잘 누리고 그 은혜와 사랑에 힘입어 사명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축복들을 잘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인간은 죄로 인해 모두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만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죄가 없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깨끗하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다 값을 치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가 주는 수치와 모욕과 고통을 우리 대신 다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축복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이 평화는 나의 감정이나, 나의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평화입니다. 요한복음 14:27절은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해야겠습니다. 신앙생활은 환경이나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을 시기하여 여러모로 방해 작전을 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역사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도록 유혹하고 잡아끕니다. 우리가 이 사탄의 간계에 넘어가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굳게 의지함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부모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충분히 누리도록 해야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사랑은 조금 밖에 주지 않고 알바를 해서 돈을 벌라, 일을 하라 요구하면 그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잘 누릴 때 복을 잘 나누어 주고 영향력을 끼치며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은혜에 들어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것은 궁전에 들어가 왕을 알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성전은 본래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었고 그 사이에는 막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휘장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만인이 대제사장이 되어 죄를 지을 때마다 그에게 나아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중재자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게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율법의 속박 안에서 정죄감과 자학과 두려움으로 고통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 이루었다’ 선포하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면의 자유함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축복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이 땅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자님들의 소감을 통해서 그 영광을 보기도 하고, 나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영광, 한마디로 우리의 영화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지, 칭의로 시작되어 마지막 목적지인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재림 때에 욕된 몸을 벗고 영광스럽게 될 사실을 미리 내다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21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장래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을 확신하면서 자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어떤 환란도 능히 이겨내며 환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셋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즐거움입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만이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환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알기 때문입니다.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 뒤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 환난을 통해 내 마음이 더욱 가난해 지고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환난을 통하여 보입니다. 그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환난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환난은 우리에게 인내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내는 참고 견디는 내적인 힘입니다. 어떤 역경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질긴 힘입니다. 이는 속사람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내는 또한 우리에게 연단이라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연단은 ‘성숙한 인격, 훈련된 인격’을 의미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를 덧입고,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비밀을 체험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누가는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장터로 끌고 가서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무리들이 일제히 그들을 고발하였습니다.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든든히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깊은 옥에 갇히고 발은 차고에 든든히 채웠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이 고생을 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원통한 일입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토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환난 중에 찬송하고 즐거워하자 모든 매인 것들이 풀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이들을 세상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우리 신자들에게 환난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하나님 나라 소망이요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입니다. 환난을 당하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이 온통 이 세상의 것들에 가 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소망하던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소망은 환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성취가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환난은 누구나 다 겪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넷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가 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이미 부어졌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부어졌다고 하십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졌다고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다는 증거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는 수단 역할도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합시킬 때 우리에게 이신칭의, 회개, 성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의 화해가 일어납니다. 붓는다는 동사는 넘치도록 풍성하게 들어 붓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붓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쏟아 부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 일은 우리가 회심할 때에 단번에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효력을 발휘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선물로 경험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성령의 기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살전1:6).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갈3:5). 38년 된 병자 같이 무기력하던 사람이 성령의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힘을 얻고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카리스마적 언변과(고전 1:4-7), 윤리적인 변화(고전 6:9-11)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담배와 술에 중독되어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의 역사로 담배를 끊고, 술을 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의 종이 되었는데 성령의 역사로 분노가 일어날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온유하게 행동합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은 탐욕을 부리던 삶에서 성령의 역사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삶으로 변화가 됩니다. 성령의 선물로 인해서 죄가 씻겨지고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6-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훌륭한 모습일 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강건할 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믿음이 좋고, 하나님을 잘 섬길 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경건하지 않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교만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이기심과 정욕과 음란 가운데 행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목숨을 바쳐 사랑하셨습니다. 생명을 다해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들을 살렸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끝까지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하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우리의 구원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평생 제자의 길, 목자의 길을 갑니다. 나의 교만과 불신의 죄를 감당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양들의 교만과 불신의 죄를 끝까지 감당해 주고 씨름해 주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기 않고 사명인의 삶을 삽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 양들을 섬깁니다.
더 모스트(The Most)라는 영화 아시지요? 다리라는 뜻인데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즐겁게 대화도 하고 실연을 당하여 창밖을 보고 멍하니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다리가 들려져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런데 배가 오면 다리를 올리고 지나가면 내려야 되는 기차 선로원이 자기 아들이 다리를 내리는 레버를 내리려고 하다가 밑으로 떨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순간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뇌를 하게 됩니다. 다리를 내리면 아들이 죽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올린 채 그대로 두면 기차에 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 그는 아들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수백 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위해 내어 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내렸습니다. 이 영화는 자기 아들을 희생하고 기차에 탄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실화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면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다섯째,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또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즐거움, 진정한 즐거움, 하늘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축복을 감사하며 잘 누리고 이 축복을 잘 나눠주는 복의 근원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21절은 대표성의 원리를 들어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 대조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제 2의 아담으로서 인류를 대표합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초래된 죄와 사망의 통치 시대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통치 시대로 바뀌어졌습니다. 아담 이후로 인류의 죄악된 상황이 아무리 크고 깊다고 하여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시다.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바라보고 즐거워합시다.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합시다.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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