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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12년 로마서 6강(4:1-25)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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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03회 작성일 12-10-2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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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로마서 제 6 강
말씀 | 로마서 4:1-25
요절 | 로마서 4:13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아브라함과 다윗의 믿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롭게 되었는가? 아닙니다. 그가 할례를 받아서 의롭게 되었는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다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하신 믿음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어집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들이 잘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바쳐서 의롭게 되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또 다윗도 골리앗을 물리치고 수 많은 전쟁에서 이기고 통일 왕국을 일으켜서 의롭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뭔가 의롭고 다른 사람과 달리 더 성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공부해보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을 받는 방식은 똑 같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우리 하나님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여긴다”는 것입니다. 4장에 9번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헬라어로 로기조인데 “구좌에 입금해 주다”는 뜻입니다. 또는 “전가시키다”는 말입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의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자의 의를 그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서 신앙 출발을 했지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아내를 바로 궁녀로 팔아먹었습니다. 그의 나이 8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나름대로 후계자를 세울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식이 없다고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 상속자를 삼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집에서 기른 그를 상속자로 삼겠다고 떼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지 않으니 자기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며 압력을 넣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그에게 주신 약속을 계속해서 믿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의를 아브라함의 의로 계산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의를 위해서 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의를 위해서 노력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의를 위해서 하나님께 드린 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의를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자 몸부림친 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의를 위해서 금식을 하거나 양을 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의를 위해서 무엇인가 성취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의를 다 그의 것으로 계산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의 대가 등 그 모든 것을 아브라함이 당한 것으로 계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독생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의를 다 그의 것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었다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작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의 의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간주하실까요? 창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두 가지 언약을 주셨습니다. 네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것과 그 자손 중에서 네 한 씨로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한 씨는 단수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믿은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믿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8:5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은 멀리서 구원자를 보고 환영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얻도록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의 행위가 나옵니다. 이는 그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그 믿음이 점차 견고해져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굳어져서 이삭이 죽더라도 살리실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에 보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의 목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는 죄입니다. 구원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질 죄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바로 뒤이어 다윗의 예를 말씀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은 시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할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구원을 얻지 못하면 말짱 헛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는 밧세바와 간음 죄를 짓고 충신 우리아를 살인 교사한 죄인입니다. 다윗은 6-10계명을 다 어겼습니다. 그는 이 죄로 인해서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뼈가 쇠하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맷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고 눌리고 답답했습니다.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식욕을 잃었습니다. 그는 종일 신음하였습니다. 그의 심령은 메말라서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단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가리워주셨습니다. 가리운다는 것은 덮어준다, 인정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죄를 회개한 후 시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자신에 대해 “제가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파렴치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 그는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뼈 속 깊이 죄악에 찌든 자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심령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입니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부활 신앙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창조주이십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만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도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하여 홍해 앞에 섰습니다. 뒤에서는 바로와 그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은 이제 꼼짝 없이 죽었다 생각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말하면서 다시 애굽 사람을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고 하시면서 바다에 길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다 가운데 마른 길을 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수 많은 무리가 자기를 따르자 광야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빌립은 우리가 가진 것이 없으니 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안드레는 오병이어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을 계산하여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하신 후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을 보는 것 같이 믿으시면서 행동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계획할 때 예수님을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서 하는 경우보다 오직 믿음으로 공부도 하고, 믿음으로 집도 짓고, 믿음으로 자녀도 낳아 기르고 자립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다윗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85세가 되었을 때에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믿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내 사라가 잉태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우리 자신이나 현재의 모습이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경험되는 것만 믿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믿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유리 컵 속에 물을 채우고 그 속에 다시 젓가락을 넣고 컵을 바라보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쇠 젓가락이 휘어져 보입니다. 쇠가 휘어져 보이지만 이는 빛의 굴절 현상에 의해서 생긴 모습입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설명을 했지만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믿지 않습니다. 젓가락은 그대로 일직선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동일하게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현실을 하나님의 약속에 비추어 곰곰이 생각하고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해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습니다. 즉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예수님이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지적인 확신, 정서적인 감격, 순종의 결단이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사실 대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믿음을 심으시고 믿음이 자라나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셨을 때 아들 이삭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자라나서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에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경험하는 대로 살면 패배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이기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는 믿음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나의 인생 길을 인도하심을 믿으면 어떤 고난과 어두운 상황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를 생각할 때에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 역사가 어렵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역사로 말씀을 듣고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전도와 일대일 말씀 공부와 제자 양성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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