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2년 로마서 5강(3:21-31) 그의 피를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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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로마서 제 5 강
말씀 | 로마서 3:21-31
요절 | 로마서 3:25
그의 피를 믿음으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본문은 로마서의 심장부라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의 핵심을 살피고자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죄인이 의롭게 되는가,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풍성한 은혜를 덧입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망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까지 3주에 걸쳐서 죄악론을 살펴보았습니다. 참으로 전하기도 부담스럽고 듣기도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의 깊은 죄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깊은 자기 발견을 통해서 자기에 대해 절망해야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칠흑 같은 어두움 가운데서 별빛과 같은 영롱한 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과는 별도로, 율법과 다른 통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이 의는 인간의 의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 하나님 중심적인 의, 그리스도 중심의 의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과 선행으로 의를 이루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셨기 때문에 친히 이루어가십니다. 인간의 의는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의이기 때문에 아무 자랑할 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가 우리에게 무죄하다고 공표하는 법적 선언입니다. 이는 우리가 완전무결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 새로운 창조와 구원이 우리 안에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어떤 사람에게 효력이 미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수단과 방법이 믿음입니다. 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하십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영광이란 하나님의 완전성과 탁월성, 임재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카보드인데 무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중요성, 가치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무게가 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무가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자 하는 고행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바닥이 전부 못이 거꾸로 박힌 침대에 누워 자기도 하고, 자기 몸을 칼로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금식과 선행과 여러 가지 모양의 노력으로 신의 마음에 들고자 하지만 미치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를 불량품이 되게 했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지만 죄는 우리를 불량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죄는 인간을 부패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만들어서 점점 수준 미달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은 육체가 되어 그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토기장이는 자기가 만든 작품이 맘에 들지 않으면 부숴 버립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서져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자격미달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주고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죄의 값을 치루시고 우리에게 죄 사함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나게 값비싼 대가를 치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전을 치루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통한 속전입니다. 우리 가운데 자식이 많다고 팔아서 남을 구원할 사람이 있습니까?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지불하고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단번에 자기를 드려 속죄제를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의 도리를 영접할 때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복음을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영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복음 진리를 영접하고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짜라고 하면 함부로 생각하고 하찮게 생각합니다. 싼 것이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별 것 아닌데도 높은 값을 매겨서 파는 상술을 쓰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노력을 해서 얻는 것은 귀하게 생각합니다. 4년 동안 많은 훈련을 받고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존경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엄청난 대가를 치룬 결과입니다. 실은 우리가 값을 치룰 수 없기 때문에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자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대가로 생명을 지불해야 합니다.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짐승의 피로는 사람의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끊임없이 짐승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죄 없는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에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주실 수 있는 다리 같은 존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고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 된 우리 인간이 바로 만나서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화목제물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시키기 위해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이 중간에서 자신이 부서지고 죽고 피 흘리는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죄에 대한 죽음의 심판이 없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사랑과 공의를 조화시키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행위의 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은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자랑거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서 뭔가를 찾고자 합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면서 잃어버린 자아상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면서 생긴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으로 인해 끊임없이 뭔가에서 자기 존재감을 찾고자 하고 자기 의를 붙들고자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고 열등감으로 무기력해집니다. 그럴 때 사람의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의만 붙드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럴 때 진정 겸손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아상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 의를 찾고자 하지 않고 예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의 의만 붙들 때,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는 진정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모든 인간관계의 불화에는 자기 의와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상대방을 마음으로 무시하고 교만하게 굽니다. 그럴 때 불화가 해결되지 않고 인간관계에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더 이상 자기에게서 의를 찾고 주장하는 교만한 사람이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 의지하고 자랑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도 사람과도 화평을 이루는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십니다. 죄악된 우리를 죄 없다, 의롭다 해 주신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불의한 자는 심판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오시고 죽으시고 화목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믿음은 칭의의 수단이고 방법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아무런 대가없이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 편에서의 기여, 노력, 투쟁,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서 무언가를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외에는 그 어디에도 우리의 업적과 상관이 없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종교적인 교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공짜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오직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롬10:17).
고후 4:3-6절에 보면 복음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리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입니다. 세상 신은 사탄을 말합니다. 사탄이 불신자들의 마음에 짙은 안개를 뿌려 놓아서 복음의 영광을 볼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습니다. 어두움과 혼돈 가운데서 빛을 비추셨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세계 창조의 행위와 인간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믿음이라는 재창조를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혼돈과 어두움 속에서 있던 인간의 마음에 홀연히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영적 죽음 상태에서 믿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행위입니다. 즉 복음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성령을 통해서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무로부터 유의 창조입니다. 살아난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야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만 많은 사람이 반응을 보이지 못 합니다. 영적으로 죽어서 귀가 막히고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말씀을 전해주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실 때 그들이 말씀을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여전히 혼돈한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중생이 되어야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두 강도가 좌우에 있었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보고 간구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는 일생 죄만 짓다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습니까(히 9:12-14)?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혜와 자유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로마서 3:21-31
요절 | 로마서 3:25
그의 피를 믿음으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본문은 로마서의 심장부라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의 핵심을 살피고자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죄인이 의롭게 되는가,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풍성한 은혜를 덧입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망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까지 3주에 걸쳐서 죄악론을 살펴보았습니다. 참으로 전하기도 부담스럽고 듣기도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의 깊은 죄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깊은 자기 발견을 통해서 자기에 대해 절망해야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칠흑 같은 어두움 가운데서 별빛과 같은 영롱한 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과는 별도로, 율법과 다른 통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이 의는 인간의 의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 하나님 중심적인 의, 그리스도 중심의 의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과 선행으로 의를 이루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셨기 때문에 친히 이루어가십니다. 인간의 의는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의이기 때문에 아무 자랑할 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가 우리에게 무죄하다고 공표하는 법적 선언입니다. 이는 우리가 완전무결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 새로운 창조와 구원이 우리 안에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어떤 사람에게 효력이 미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수단과 방법이 믿음입니다. 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하십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영광이란 하나님의 완전성과 탁월성, 임재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카보드인데 무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중요성, 가치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무게가 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무가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자 하는 고행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바닥이 전부 못이 거꾸로 박힌 침대에 누워 자기도 하고, 자기 몸을 칼로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금식과 선행과 여러 가지 모양의 노력으로 신의 마음에 들고자 하지만 미치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를 불량품이 되게 했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지만 죄는 우리를 불량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죄는 인간을 부패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만들어서 점점 수준 미달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은 육체가 되어 그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토기장이는 자기가 만든 작품이 맘에 들지 않으면 부숴 버립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서져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자격미달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주고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죄의 값을 치루시고 우리에게 죄 사함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나게 값비싼 대가를 치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전을 치루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통한 속전입니다. 우리 가운데 자식이 많다고 팔아서 남을 구원할 사람이 있습니까?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지불하고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단번에 자기를 드려 속죄제를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의 도리를 영접할 때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복음을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영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복음 진리를 영접하고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짜라고 하면 함부로 생각하고 하찮게 생각합니다. 싼 것이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별 것 아닌데도 높은 값을 매겨서 파는 상술을 쓰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노력을 해서 얻는 것은 귀하게 생각합니다. 4년 동안 많은 훈련을 받고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존경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엄청난 대가를 치룬 결과입니다. 실은 우리가 값을 치룰 수 없기 때문에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자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대가로 생명을 지불해야 합니다.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짐승의 피로는 사람의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끊임없이 짐승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죄 없는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에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주실 수 있는 다리 같은 존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고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 된 우리 인간이 바로 만나서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화목제물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시키기 위해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이 중간에서 자신이 부서지고 죽고 피 흘리는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죄에 대한 죽음의 심판이 없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사랑과 공의를 조화시키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행위의 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은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자랑거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서 뭔가를 찾고자 합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면서 잃어버린 자아상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면서 생긴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으로 인해 끊임없이 뭔가에서 자기 존재감을 찾고자 하고 자기 의를 붙들고자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고 열등감으로 무기력해집니다. 그럴 때 사람의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의만 붙드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럴 때 진정 겸손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아상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 의를 찾고자 하지 않고 예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의 의만 붙들 때,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는 진정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모든 인간관계의 불화에는 자기 의와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상대방을 마음으로 무시하고 교만하게 굽니다. 그럴 때 불화가 해결되지 않고 인간관계에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더 이상 자기에게서 의를 찾고 주장하는 교만한 사람이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 의지하고 자랑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도 사람과도 화평을 이루는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십니다. 죄악된 우리를 죄 없다, 의롭다 해 주신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불의한 자는 심판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오시고 죽으시고 화목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믿음은 칭의의 수단이고 방법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아무런 대가없이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 편에서의 기여, 노력, 투쟁,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서 무언가를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외에는 그 어디에도 우리의 업적과 상관이 없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종교적인 교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공짜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오직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롬10:17).
고후 4:3-6절에 보면 복음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리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입니다. 세상 신은 사탄을 말합니다. 사탄이 불신자들의 마음에 짙은 안개를 뿌려 놓아서 복음의 영광을 볼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습니다. 어두움과 혼돈 가운데서 빛을 비추셨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세계 창조의 행위와 인간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믿음이라는 재창조를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혼돈과 어두움 속에서 있던 인간의 마음에 홀연히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영적 죽음 상태에서 믿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행위입니다. 즉 복음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성령을 통해서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무로부터 유의 창조입니다. 살아난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야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만 많은 사람이 반응을 보이지 못 합니다. 영적으로 죽어서 귀가 막히고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말씀을 전해주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실 때 그들이 말씀을 깨닫게 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여전히 혼돈한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중생이 되어야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두 강도가 좌우에 있었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보고 간구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는 일생 죄만 짓다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습니까(히 9:12-14)?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혜와 자유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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