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2년 로마서 4강(2:17-3:20) 다 죄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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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로마서 4강
말씀 | 로마서 2:17-3:20
요절 | 로마서 3:9,10
다 죄 아래에 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지난 2주 동안 이방인의 죄,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종합적으로 전 인류가 다 죄 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논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가 죄 아래 있는 실상을 알고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크게 자랑스러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이방인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면서 자신들은 부당한 수입을 취함으로 도둑질을 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면서 은밀한 곳에서 정욕을 즐기며 간음을 했습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그들이 이방 신전에 바쳐진 물건 중에서 금은과 같은 보석들을 도둑질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가르침과 실제 삶이 다를 때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영국인 폴 존슨은 「지식인의 두 얼굴」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불법행위와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연구에서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를 고발하면서 자신은 집안 청소와 요리를 도맡아 했던 가정부에게 동전 한 푼 주지 않은 채 45년간 하녀로 부려먹는 노동착취를 했습니다. 그는 낭비벽이 심했고 노동 의지도 부족했습니다. 사람이 많이 안다고 해서 덕스러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한 이유는 세계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삼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유대인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중성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이 욕을 먹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말은 잘하는데 말씀대로 행하지 않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목자들은 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합니다. 그러나 남만 가르치고 나를 가르치지 않을 때 이중적인 목자들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자신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일용할 양식을 쓰고 매주 소감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대로 행하고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소감도 사람 앞에서 형식적으로 쓰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양식 쓰기와 소감 쓰기를 위해 시간을 내고 마음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본을 보여야 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만 전도에서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저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덧입고자 힘을 씁니다. 제가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치고자 노력하는 만큼 말씀을 실천하는 데서도 힘쓰고자 합니다. 아는 대로 행하고, 믿는 대로 행하고자 힘쓸 때 우리는 덕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성경과 함께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만일 율법을 범하면 그 할례는 무할례가 됩니다. 진정한 할례는 육신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행해야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례를 받았다고 신자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말씀을 실천할 때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 때 참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례 받은 것으로 안심하지 말고 세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아니함으로 유대인 된 것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해 주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는 누구인지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인도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껏 공부하고 나눌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특권 중에 하나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살립니다. 또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말씀을 전하고 나면 왠지 기쁘고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들고 빛 가운데 거하게 합니다. 어떤 분은 일생 구더기를 연구하면서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배설물을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전하는 일에 일생을 건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바울의 둘째 질문은 유대인들의 불신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불신앙으로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택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는데 하나님이 미쁘시다면 택한 백성을 구원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하고 나중에는 로마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성실하신가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참되시고 자기 백성에 대해 미쁘십니다. 유대인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참되십니다. 불성실하여 불신에 빠진 어떤 유대인들이 문제지 하나님은 여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신실한 유대인들을 구원하십니다. 유대인 전체가 불신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해 왔는지 보았습니다. 출애굽해서도 얼마 있지 아니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그 앞에서 뛰놀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방자한 백성을 멸하고 모세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는 일을 시작하고자 소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그 백성을 위해서 속죄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도 수없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여 훈련을 받았습니다. BC 587년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70년 후에 그들이 고국에 돌아왔지만 진정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계속되었습니다. 정말 사람은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그 사람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나 자신조차도 거짓되어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미쁘신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참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십니까? 그는 얼마나 신실하게 자기의 약속을 지키십니까? 수천 년이 지나서도 메시아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미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5절을 보면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꾀를 냄으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마치 검은색이 흰색을 더 잘 드러내듯이, 유대인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더 드러내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불의하다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질문은 유대인의 거짓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낸다면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억울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거짓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 참되십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고 바울이 주장했다고 비방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세상에서 죄를 많이 짓고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들의 소감이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태 신앙으로 자란 나도 나가서 죄를 짓고 돌아와야 하지 않는가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결국 유대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특권과 은혜를 받았지만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하고, 의롭고, 참되십니다. 인간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께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죄악론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라는 표현은 당시 온 인류를 의미했습니다. 온 인류는 다 죄 아래 있습니다. 여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인류는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길에서 벗어났고 이로 인해 관계성이 파괴되었습니다. 온 인류는 의가 없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복음에는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죄를 폭군 같은 통치자로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도 폭군 같은 죄의 세력을 끊고 자유를 선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깊이 발견할 때 마음이 아픕니다. 베드로는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많은 물고기를 잡고 나서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런 자기 발견 후에 그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1-15절을 보십시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은 첫째, 하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려 주셨지만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자기의 영혼을 돌보라고 말하면서 ‘무지의 지(無知의 知)’를 주장했습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 때 알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참된 이해력은 창조자 하나님을 알 때만 생길 수 있는데 우매자들은 헛된 것들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참된 이해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기피합니다. 하나님을 피해 함께 무익한 길을 갑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부패한 현실을 심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선 대신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둘째, 언어의 죄악상이 나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를 장사하는 곳입니다. 목구멍은 말을 토해내는 곳입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것은 말을 하는데 온갖 부정하고 썩어 냄새나는 언어들을 토해 냅니다. 혀는 목구멍보다 더 분명한 언어 기관인데 인격 깊숙이 자리 잡은 악을 나타냅니다. 부패한 인격에서 속임을 일삼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혀 밑에 독을 품고 있는 독사들처럼 악인의 말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죽이는 무서운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목구멍, 혀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입으로 움직여 가는데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가끔가다 악독한 저주를 내 뱉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내뱉습니다. 인격의 내면세계가 부패해 있기 때문에 죄인들은 하나님을 비웃는 것처럼 이웃들에게 난폭한 언어를 습관적으로 내뱉습니다. 육두문자와 쌍욕이 입에 붙어 있습니다.
셋째, 행동의 죄악상이 나옵니다.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릅니다. 피는 생명인데, 생명을 죽이는 곳으로 빨리 나아갑니다. 이런 죄인들의 길에는 파멸과 고생뿐입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1:7).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인들은 죄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파멸의 길을 빠르게 달려갑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죄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할 소망이 율법에 있을까요? 율법은 오히려 인류의 죄를 지적하고 죄인을 정죄합니다. 율법은 죄인들의 입을 막고 꼼짝 못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합니다. 그분의 인물평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대적하는 몇 사람이 찾아와서 한 목사님의 결점 15가지를 지적하며 물러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까? 저는 그 보다 결점이 훨씬 더 많은 사람입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도 한 죄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자, 반대하던 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닌 척, 의인인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아 마땅한 흉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자기를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이 죄인 됨을 깊이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죄 사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는 내 안에 성령으로 내주하십니다.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 때 우리는 날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영광스러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로마서 2:17-3:20
요절 | 로마서 3:9,10
다 죄 아래에 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지난 2주 동안 이방인의 죄,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종합적으로 전 인류가 다 죄 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논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가 죄 아래 있는 실상을 알고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크게 자랑스러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이방인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면서 자신들은 부당한 수입을 취함으로 도둑질을 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면서 은밀한 곳에서 정욕을 즐기며 간음을 했습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그들이 이방 신전에 바쳐진 물건 중에서 금은과 같은 보석들을 도둑질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가르침과 실제 삶이 다를 때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영국인 폴 존슨은 「지식인의 두 얼굴」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불법행위와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연구에서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를 고발하면서 자신은 집안 청소와 요리를 도맡아 했던 가정부에게 동전 한 푼 주지 않은 채 45년간 하녀로 부려먹는 노동착취를 했습니다. 그는 낭비벽이 심했고 노동 의지도 부족했습니다. 사람이 많이 안다고 해서 덕스러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한 이유는 세계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삼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유대인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중성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이 욕을 먹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말은 잘하는데 말씀대로 행하지 않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목자들은 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합니다. 그러나 남만 가르치고 나를 가르치지 않을 때 이중적인 목자들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자신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일용할 양식을 쓰고 매주 소감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대로 행하고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소감도 사람 앞에서 형식적으로 쓰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양식 쓰기와 소감 쓰기를 위해 시간을 내고 마음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본을 보여야 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만 전도에서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저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덧입고자 힘을 씁니다. 제가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치고자 노력하는 만큼 말씀을 실천하는 데서도 힘쓰고자 합니다. 아는 대로 행하고, 믿는 대로 행하고자 힘쓸 때 우리는 덕 있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성경과 함께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만일 율법을 범하면 그 할례는 무할례가 됩니다. 진정한 할례는 육신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행해야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례를 받았다고 신자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말씀을 실천할 때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 때 참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례 받은 것으로 안심하지 말고 세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아니함으로 유대인 된 것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해 주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는 누구인지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인도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껏 공부하고 나눌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특권 중에 하나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살립니다. 또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말씀을 전하고 나면 왠지 기쁘고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들고 빛 가운데 거하게 합니다. 어떤 분은 일생 구더기를 연구하면서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배설물을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전하는 일에 일생을 건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바울의 둘째 질문은 유대인들의 불신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불신앙으로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택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는데 하나님이 미쁘시다면 택한 백성을 구원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하고 나중에는 로마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성실하신가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참되시고 자기 백성에 대해 미쁘십니다. 유대인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참되십니다. 불성실하여 불신에 빠진 어떤 유대인들이 문제지 하나님은 여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신실한 유대인들을 구원하십니다. 유대인 전체가 불신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해 왔는지 보았습니다. 출애굽해서도 얼마 있지 아니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그 앞에서 뛰놀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방자한 백성을 멸하고 모세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는 일을 시작하고자 소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그 백성을 위해서 속죄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도 수없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여 훈련을 받았습니다. BC 587년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70년 후에 그들이 고국에 돌아왔지만 진정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계속되었습니다. 정말 사람은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그 사람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나 자신조차도 거짓되어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미쁘신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참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십니까? 그는 얼마나 신실하게 자기의 약속을 지키십니까? 수천 년이 지나서도 메시아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미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5절을 보면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꾀를 냄으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마치 검은색이 흰색을 더 잘 드러내듯이, 유대인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더 드러내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불의하다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질문은 유대인의 거짓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낸다면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억울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거짓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 참되십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고 바울이 주장했다고 비방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세상에서 죄를 많이 짓고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들의 소감이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태 신앙으로 자란 나도 나가서 죄를 짓고 돌아와야 하지 않는가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결국 유대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특권과 은혜를 받았지만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하고, 의롭고, 참되십니다. 인간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께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죄악론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라는 표현은 당시 온 인류를 의미했습니다. 온 인류는 다 죄 아래 있습니다. 여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인류는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길에서 벗어났고 이로 인해 관계성이 파괴되었습니다. 온 인류는 의가 없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복음에는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죄를 폭군 같은 통치자로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도 폭군 같은 죄의 세력을 끊고 자유를 선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깊이 발견할 때 마음이 아픕니다. 베드로는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많은 물고기를 잡고 나서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런 자기 발견 후에 그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1-15절을 보십시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은 첫째, 하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려 주셨지만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자기의 영혼을 돌보라고 말하면서 ‘무지의 지(無知의 知)’를 주장했습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 때 알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참된 이해력은 창조자 하나님을 알 때만 생길 수 있는데 우매자들은 헛된 것들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참된 이해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기피합니다. 하나님을 피해 함께 무익한 길을 갑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부패한 현실을 심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선 대신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둘째, 언어의 죄악상이 나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를 장사하는 곳입니다. 목구멍은 말을 토해내는 곳입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것은 말을 하는데 온갖 부정하고 썩어 냄새나는 언어들을 토해 냅니다. 혀는 목구멍보다 더 분명한 언어 기관인데 인격 깊숙이 자리 잡은 악을 나타냅니다. 부패한 인격에서 속임을 일삼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혀 밑에 독을 품고 있는 독사들처럼 악인의 말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죽이는 무서운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목구멍, 혀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입으로 움직여 가는데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가끔가다 악독한 저주를 내 뱉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내뱉습니다. 인격의 내면세계가 부패해 있기 때문에 죄인들은 하나님을 비웃는 것처럼 이웃들에게 난폭한 언어를 습관적으로 내뱉습니다. 육두문자와 쌍욕이 입에 붙어 있습니다.
셋째, 행동의 죄악상이 나옵니다.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릅니다. 피는 생명인데, 생명을 죽이는 곳으로 빨리 나아갑니다. 이런 죄인들의 길에는 파멸과 고생뿐입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1:7).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인들은 죄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파멸의 길을 빠르게 달려갑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죄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할 소망이 율법에 있을까요? 율법은 오히려 인류의 죄를 지적하고 죄인을 정죄합니다. 율법은 죄인들의 입을 막고 꼼짝 못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합니다. 그분의 인물평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대적하는 몇 사람이 찾아와서 한 목사님의 결점 15가지를 지적하며 물러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까? 저는 그 보다 결점이 훨씬 더 많은 사람입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도 한 죄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자, 반대하던 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닌 척, 의인인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아 마땅한 흉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자기를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이 죄인 됨을 깊이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죄 사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는 내 안에 성령으로 내주하십니다.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 때 우리는 날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영광스러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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