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2년 로마서 3강(2:1-16)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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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가을 로마서 제 3 강
말씀 | 로마서 2:1-16
요절 | 로마서 2:2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지난 주 우리는 이방인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의 내부와 외부에 있지만 고의로 이를 부정함으로 어리석고 생각이 허망해지고 우상숭배를 하고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고 자기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자들인 우리에게 더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알지만 행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외식과 위선과 각종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믿음으로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는 말은 원어에는 “오오,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아!”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의분이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우월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이방인들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율법의 잣대로 그들을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남을 판단하는 죄를 자신들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단에는 공적인 판단이 있고 사적인 판단이 있습니다. 공적인 판단은 사회의 공공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한 사법상의 재판이 있고, 또 예언자들과 같이 자기 백성이 죄를 회개하도록 책망하는 종교상의 심판이 있습니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적인 판단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적인 판단은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나 사랑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용서치 않고 죄를 정하여 잘라버리는 무정함과 무자비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대개 도덕적으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이 타락한 이들에 대하여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됩니다. 그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혈통, 신분, 성별에 관계없이 진리대로 공평하게 이루어집니다. 각자가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 기준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엄격하게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지만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가 형제의 죄를 보고 판단한 그것을 어느 때에 내가 행함으로 부끄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것을 보고 욕을 했는데 내가 교통법규를 위반하여 딱지를 떼이는 것입니다. 고속도로 위에 있는 감시 카메라 앞에서는 천천히 가지만 그것만 지나면 속도를 냅니다. 감시 카메라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하면 음란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하는데 사실은 같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사람의 죄성은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알지 못하고 짓는 죄보다 알면서도 짓는 죄가 더 중한 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는 사람의 동기와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의 실수, 그의 잘못에 대해서 그가 겪고 있는 아픔과 똑같은 정도의 아픔과 눈물이 없다면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고 성 프란시스는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남의 죄를 판단함으로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계도함으로 선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당장에 심판하지 아니하시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자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것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도록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길이 참으시는 것을 멸시했습니다. 회개는 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범함으로 그들에게 임한 진노를 쌓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제사장만이 제사를 지낼 수 있는데 사무엘이 늦게 온다고 자기가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로 인해 사무엘의 책망을 받았지만 변명만 합니다. 다윗에 대해서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자식들이 다 죽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참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짓는 죄를 그때마다 심판하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보다 더 높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범하는 죄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도록 하는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재해석하신 것을 기초로 우리 자신을 본다면 죄인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슬프시게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9절에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기다려 주시고 잘 해 주실 때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부요해지고 높아지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보응하십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6).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객관적입니다. 각 사람 개인 개인의 행동에 따라서 심판하십니다. 유대인이라고 신자라고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참된 믿음은 행동을 동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그 마음 깊은 동기에 기초한 행함을 보십니다. 여기서 행함이란 결국 믿음과 연결된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행한대로 열매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6,7,9,10절에는 ‘행한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기서 행위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합니다(시139:1-4). ‘행함’은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합니다. 행위는 내면의 깊은 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 내면 깊은 곳에 자기 광을 내고 음란한 욕심을 좇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행위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행위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말로는 속일 수 있어도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한 대로 심판하는 것은 가장 공정합니다. 만일 행위로 하지 않고 부나 지식이나 타이틀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는 불공평한 것입니다. 부자는 구원받고 가난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면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또한 많이 아는 자는 구원받고 무식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 그러나 행위로 하기 때문에 신학박사라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눅12:47).
하나님께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로마서의 근본 교리와 모순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일반 원칙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대로 하면 한 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간의 모든 죄된 행위를 간과하심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또한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를 낳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가 좋지 않은 자들 즉 생활의 열매가 좋지 않은 자들은 그 믿음이 거짓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의 인생 목적을 따라 심판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참으면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 그 믿음을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원어에는 ‘선’이 단수입니다. 성도의 선행이란 예수님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와 연합한 가운데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 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참고 선을 행할 때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즉 선한 행위를 참을성 있게 행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홀로 되었고 자신도 홀로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아 섬겼습니다. 그 결과 보아스를 만나고 아들 오벳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 많은 세상에서 죄의 소욕과 싸우며 믿음으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정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성품을 좇아 살고자 할 때에 영생의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나타나는 장소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반대로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십니다(8).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은 주로 당을 짓습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패거리를 만듭니다. 반발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당 짓는 자를 자기 욕심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압살롬이나 아도니야, 세바처럼 당을 지어서 자기 유익을 추구합니다. 이런 부류에 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반역하는 분위기에 휘말려들어 심판을 받기 때문에 당을 짓는 무리에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볼 때 결국 선이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요, 악이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자선사업과 같은 선을 행할지라도 그 목적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명예심을 나타내는 것일 때 결국 자기 유익을 좇은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 아래 자신의 욕심과 명예심을 위한 것인가 진실되게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참고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보응하십니다. 영생은 참된 행복입니다. 그러나 손해보기 싫어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십니다. 자기 유익을 만족시키는데도 허무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과 선을 행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부터 심판이 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하나님의 심판이 그 영에 나타납니다. 그 마음에 행복이 없습니다. 악을 따라 행하고 불의를 따르면 그 마음이 불안하고 곤고합니다. 죄를 지을 때는 어떤 성취감이 있지만 그 후에 악령에 시달리고 마음의 불안과 허무로 인해서 더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누가 따라오지 않는데 자책으로 인해서 고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먼저 구원을 받고 이방인이 다음인 것처럼 심판도 유대인이 먼저 받습니다. 신자들이 먼저 심판을 받고 다음에 불신자들이 받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 맥베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녀들이 황야에 나타나서 맥베드와 반코라는 장군에게 예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맥베드 당신은 스코틀란트 왕이 될 것이며, 반코의 아들들은 왕위를 차지할 것이다.” 이 예언을 받은 후부터 맥베드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맥베드는 왕 위를 차지하기 위해 야심에 불타기 시작하였고 던컨 왕을 제거하기 위해 끙끙댈 때, 그 부인은 와서 “마녀가 예언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될 것이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던컨 왕을 살해하면 되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맥베드는 던컨 왕을 살해하고 자신은 왕 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왕 위에 올랐을 때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언의 1부가 이루어져 왕이 되었는데 예언의 2부가 이루어지면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걱정된 맥베드가 자객을 보내 반코와 그 아들을 죽이라고 하였지만 반코만 잡고 그 아들들은 잡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민하면서 인생을 보내는 가운데 특별히 맥베드 부인의 고민 장면이 나옵니다. 그 부인은 왕을 살해한 것, 자기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하여 몽유병에 걸렸습니다. 밤새 고민하면서 자기 손을 씻는 것이었습니다. 손에 피가 묻었다는 것입니다. 자꾸 씻어도 씻어지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자살해 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을 당하고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사울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쓸 때 그의 마음에는 감사와 찬송이 넘쳐서 고난 가운데서 많은 시를 썼습니다. 선을 행하면 마음이 기쁘고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보시고 축복하기도 하시고 저주하기도 하십니다. 지금 나의 영은 어떠합니까? 평강이 넘칩니까? 환난과 곤고가 넘칩니까?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재산의 유무에 따라서 행불행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서 행불행이 좌우됩니다.
셋째, 하나님은 율법을 기초로 심판하십니다(12-15).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알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르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배운 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많은 지식이 있더라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성경을 알고 있다고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어도 양심이 증거가 되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냅니다. 물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항상 양심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신자들보다 더 예민하게 양심대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고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양심도 문화적으로 무뎌지기도 하고 화인 맞기도 하는 것입니다. 식인종들은 사람을 잡아먹어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의 문화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예멘 같은 나라에서 일부다처제를 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도리어 능력이 있다는 표시오 갈 곳 없는 여자들을 거두어 들여서 잘 살게 해주기 때문에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도 양심에 기초해서 보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아담의 후예들이 타락해서 부패했지만 다 짐승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남아있는 성품과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기준은 내면 은밀한 곳에 있습니다. 그 마음 깊은 곳 속에서 무엇을 추구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 동기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악트 마이어는 “바울의 주장은 선민에 속했다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으로 행위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선택의 상징인 율법과 할례는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도 죄인이고 복음이 필요합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십니다(16). 16절을 보십시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최후 심판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에는 예수님이 심판장이 되셔서 모든 은밀한 것을 심판하십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안 보는데서 은밀히 죄를 짓습니다. 생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은밀한 것이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납니다. 그 날에는 각각 행한 대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심판장이시므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무서운 심판에서 면제됩니다. 그러므로 그날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광의 날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무서운 진노의 날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은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생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참고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길이 참으시며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인자하시며 길이 참으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합니다.
말씀 | 로마서 2:1-16
요절 | 로마서 2:2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지난 주 우리는 이방인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의 내부와 외부에 있지만 고의로 이를 부정함으로 어리석고 생각이 허망해지고 우상숭배를 하고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고 자기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자들인 우리에게 더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알지만 행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외식과 위선과 각종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믿음으로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는 말은 원어에는 “오오,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아!”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의분이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우월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이방인들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율법의 잣대로 그들을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남을 판단하는 죄를 자신들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단에는 공적인 판단이 있고 사적인 판단이 있습니다. 공적인 판단은 사회의 공공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한 사법상의 재판이 있고, 또 예언자들과 같이 자기 백성이 죄를 회개하도록 책망하는 종교상의 심판이 있습니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적인 판단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적인 판단은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나 사랑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용서치 않고 죄를 정하여 잘라버리는 무정함과 무자비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대개 도덕적으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이 타락한 이들에 대하여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됩니다. 그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혈통, 신분, 성별에 관계없이 진리대로 공평하게 이루어집니다. 각자가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 기준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엄격하게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지만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가 형제의 죄를 보고 판단한 그것을 어느 때에 내가 행함으로 부끄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것을 보고 욕을 했는데 내가 교통법규를 위반하여 딱지를 떼이는 것입니다. 고속도로 위에 있는 감시 카메라 앞에서는 천천히 가지만 그것만 지나면 속도를 냅니다. 감시 카메라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하면 음란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하는데 사실은 같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사람의 죄성은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알지 못하고 짓는 죄보다 알면서도 짓는 죄가 더 중한 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는 사람의 동기와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의 실수, 그의 잘못에 대해서 그가 겪고 있는 아픔과 똑같은 정도의 아픔과 눈물이 없다면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고 성 프란시스는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남의 죄를 판단함으로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를 계도함으로 선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당장에 심판하지 아니하시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자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것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도록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길이 참으시는 것을 멸시했습니다. 회개는 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범함으로 그들에게 임한 진노를 쌓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제사장만이 제사를 지낼 수 있는데 사무엘이 늦게 온다고 자기가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로 인해 사무엘의 책망을 받았지만 변명만 합니다. 다윗에 대해서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자식들이 다 죽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참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짓는 죄를 그때마다 심판하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보다 더 높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범하는 죄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도록 하는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재해석하신 것을 기초로 우리 자신을 본다면 죄인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슬프시게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9절에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기다려 주시고 잘 해 주실 때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부요해지고 높아지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보응하십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6).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객관적입니다. 각 사람 개인 개인의 행동에 따라서 심판하십니다. 유대인이라고 신자라고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참된 믿음은 행동을 동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그 마음 깊은 동기에 기초한 행함을 보십니다. 여기서 행함이란 결국 믿음과 연결된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행한대로 열매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6,7,9,10절에는 ‘행한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기서 행위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합니다(시139:1-4). ‘행함’은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합니다. 행위는 내면의 깊은 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 내면 깊은 곳에 자기 광을 내고 음란한 욕심을 좇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행위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행위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말로는 속일 수 있어도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한 대로 심판하는 것은 가장 공정합니다. 만일 행위로 하지 않고 부나 지식이나 타이틀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는 불공평한 것입니다. 부자는 구원받고 가난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면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또한 많이 아는 자는 구원받고 무식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 그러나 행위로 하기 때문에 신학박사라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눅12:47).
하나님께서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로마서의 근본 교리와 모순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일반 원칙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대로 하면 한 사람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간의 모든 죄된 행위를 간과하심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또한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를 낳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가 좋지 않은 자들 즉 생활의 열매가 좋지 않은 자들은 그 믿음이 거짓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의 인생 목적을 따라 심판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참으면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 그 믿음을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원어에는 ‘선’이 단수입니다. 성도의 선행이란 예수님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와 연합한 가운데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 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참고 선을 행할 때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즉 선한 행위를 참을성 있게 행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홀로 되었고 자신도 홀로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아 섬겼습니다. 그 결과 보아스를 만나고 아들 오벳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 많은 세상에서 죄의 소욕과 싸우며 믿음으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정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성품을 좇아 살고자 할 때에 영생의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나타나는 장소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반대로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십니다(8).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은 주로 당을 짓습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패거리를 만듭니다. 반발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당 짓는 자를 자기 욕심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압살롬이나 아도니야, 세바처럼 당을 지어서 자기 유익을 추구합니다. 이런 부류에 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반역하는 분위기에 휘말려들어 심판을 받기 때문에 당을 짓는 무리에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볼 때 결국 선이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요, 악이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자선사업과 같은 선을 행할지라도 그 목적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명예심을 나타내는 것일 때 결국 자기 유익을 좇은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 아래 자신의 욕심과 명예심을 위한 것인가 진실되게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참고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보응하십니다. 영생은 참된 행복입니다. 그러나 손해보기 싫어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십니다. 자기 유익을 만족시키는데도 허무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과 선을 행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부터 심판이 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하나님의 심판이 그 영에 나타납니다. 그 마음에 행복이 없습니다. 악을 따라 행하고 불의를 따르면 그 마음이 불안하고 곤고합니다. 죄를 지을 때는 어떤 성취감이 있지만 그 후에 악령에 시달리고 마음의 불안과 허무로 인해서 더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누가 따라오지 않는데 자책으로 인해서 고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먼저 구원을 받고 이방인이 다음인 것처럼 심판도 유대인이 먼저 받습니다. 신자들이 먼저 심판을 받고 다음에 불신자들이 받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 맥베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녀들이 황야에 나타나서 맥베드와 반코라는 장군에게 예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맥베드 당신은 스코틀란트 왕이 될 것이며, 반코의 아들들은 왕위를 차지할 것이다.” 이 예언을 받은 후부터 맥베드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맥베드는 왕 위를 차지하기 위해 야심에 불타기 시작하였고 던컨 왕을 제거하기 위해 끙끙댈 때, 그 부인은 와서 “마녀가 예언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될 것이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던컨 왕을 살해하면 되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맥베드는 던컨 왕을 살해하고 자신은 왕 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왕 위에 올랐을 때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언의 1부가 이루어져 왕이 되었는데 예언의 2부가 이루어지면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걱정된 맥베드가 자객을 보내 반코와 그 아들을 죽이라고 하였지만 반코만 잡고 그 아들들은 잡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민하면서 인생을 보내는 가운데 특별히 맥베드 부인의 고민 장면이 나옵니다. 그 부인은 왕을 살해한 것, 자기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하여 몽유병에 걸렸습니다. 밤새 고민하면서 자기 손을 씻는 것이었습니다. 손에 피가 묻었다는 것입니다. 자꾸 씻어도 씻어지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자살해 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을 당하고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사울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쓸 때 그의 마음에는 감사와 찬송이 넘쳐서 고난 가운데서 많은 시를 썼습니다. 선을 행하면 마음이 기쁘고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보시고 축복하기도 하시고 저주하기도 하십니다. 지금 나의 영은 어떠합니까? 평강이 넘칩니까? 환난과 곤고가 넘칩니까?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재산의 유무에 따라서 행불행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서 행불행이 좌우됩니다.
셋째, 하나님은 율법을 기초로 심판하십니다(12-15).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알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르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배운 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많은 지식이 있더라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성경을 알고 있다고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어도 양심이 증거가 되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냅니다. 물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항상 양심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신자들보다 더 예민하게 양심대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고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양심도 문화적으로 무뎌지기도 하고 화인 맞기도 하는 것입니다. 식인종들은 사람을 잡아먹어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의 문화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예멘 같은 나라에서 일부다처제를 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도리어 능력이 있다는 표시오 갈 곳 없는 여자들을 거두어 들여서 잘 살게 해주기 때문에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도 양심에 기초해서 보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아담의 후예들이 타락해서 부패했지만 다 짐승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남아있는 성품과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기준은 내면 은밀한 곳에 있습니다. 그 마음 깊은 곳 속에서 무엇을 추구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 동기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악트 마이어는 “바울의 주장은 선민에 속했다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으로 행위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선택의 상징인 율법과 할례는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도 죄인이고 복음이 필요합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십니다(16). 16절을 보십시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최후 심판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에는 예수님이 심판장이 되셔서 모든 은밀한 것을 심판하십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안 보는데서 은밀히 죄를 짓습니다. 생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은밀한 것이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납니다. 그 날에는 각각 행한 대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심판장이시므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무서운 심판에서 면제됩니다. 그러므로 그날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광의 날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무서운 진노의 날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은 진리대로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생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참고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길이 참으시며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인자하시며 길이 참으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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