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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12년 로마서 2강(1:18-32)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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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82회 작성일 12-09-30 13:13

본문

2012년 로마서 제 2 강
말씀 | 로마서 1:18-32
요절 |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세상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출발점으로 삼고 인간의 믿음을 지향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류의 구원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심판에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지만 다른 한편에서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심판으로 보응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18절 이후에는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타락한 인류가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오직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기 전에 그가 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지를 먼저 알게 해야 합니다. 자기 죄의 참된 모습은 신경 쓰지 않고, 덮어 두고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잘 되고 사업도 잘 된다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동기를 인간적인 동기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평안해지기 위해서, 현 세상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얻게 되면 더 이상 교회에 안 나오고, 얻지 못하면 실망해서 안 나올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지 자각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을 건너뛰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실상을 스스로 깨닫도록 인도해 주어야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 전하는 자의 마땅한 순서입니다. 듣기 싫어해도 이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희석하거나 변질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편구원론 등으로 희석시켜서는 안 됩니다. 인간 세상은 모든 인류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러 있습니다. 

  1:18-32절은 이방인의 죄, 2:1-3:8절은 유대인의 죄, 3:9-20절은 종합해서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 죄의 뿌리(18-21) :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이유는 사람들의 불의와 경건하지 않음 때문입니다.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자기중심적이 되어 살고자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게 된 것도 하나님 없이 자기가 신이 되어 살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28절에 보면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관주를 달았는데 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식은 원어로는 ‘도키마조’로서 ‘검토하다, 시험하여 인정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마음은 일상생활을 위한 정보로 수집된 지식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다가 길을 잃어버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해 검토해 보고 그들의 일상생활에 불필요하다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창조자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대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억에서 지워 버리려고 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허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니체는 자유를 위해서 신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산다고 진정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결국 니체 자신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면 그 앞에서 죄와 싸우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시간도 드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 죄를 짓고 싶어도 마음대로 지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만 이런 것들이 싫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경건이 불의로 진리를 막습니다. 불경건이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을 뜻하고, 불의는 사악함이나 무법한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불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불의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한 태도는 곧 사람들에 대한 죄로 나타나고 사람들에 대한 죄란 것도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의와 대조를 이룹니다. 불의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이웃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면 결국 그것은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습니다. 여기서 진리란 복음 속에 계시된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 속에 새겨 넣은 양심의 행위를 통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인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진리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그들이 가진 진리를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사람들에게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진리를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막는데 있습니다. 이는 진리를 억압하고 억누른다는 뜻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누르고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불가피합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의 내부에 있고 외부에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이란 사람들에게 공개된 상식적인 하나님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칸트는 “저 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내 마음속에는 양심의 도덕률이 빛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문화권이든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전과 제사유적들이 다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거룩한 속성, 종교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잠깐 왔다가 죽지만 영원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신에게 기도하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알만한 외부적인 것들로 자연세계와 역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스위스의 융프라우 산, 미국 캘리포니아 세퀘이아 공원의 제너럴 셔면 나무는 세계에서 살아 있는 나무 중 가장 큰 것인데 이런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을 하늘의 아름다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해변에서 볼 수 있는 파도의 힘과 경계를 넘어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품에 작가의 성품이 표현되듯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자연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의 증거 속에 나타납니다. 바벨탑 사건과 언어의 혼잡,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폼페이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뿐만 아니라 역사를 연구해 보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놀랍게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들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감사는 사람이 그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으며 자신의 삶 자체가 그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생기는 반응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의존적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안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삶으로 표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고 순종하는 생활로 나타나야 합니다. 집에서 키운 개도 주인의 키워준 은혜를 알고 주인에게 꼬리를 치면서 반갑다고 인사를 합니다. 소도 주인에게는 충성을 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서 그렇게 배은망덕할까요?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베푸신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만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을 때 어떻게 됩니까?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집니다. 무엇을 하든지 허무한 생각이 듭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인생이 누리는 삶의 헛되고 무가치한 성격을 잘 드러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하지 못할 때 인생의 삶은 삶의 방향과 목적을 상실하고 결국은 헛되고 허무한 데로 빠지게 됩니다. 또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바른 하나님 지식에서 나오는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음이 어둠 속에 빠져서 삶의 방향과 목적을 상실하고 헛되고 무가치한 일들을 도모하게 됩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데 어리석게 됩니다. 지혜로운 바보들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자기들은 개화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민족들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인 중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만물의 근원을 논하면서 만물이 물, 불, 흙, 공기에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으나 비천한 자리에 빠지게 된 것처럼 지혜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결국은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고의 지성이라는 과학자들이 나로호 우주선을 쏘면서 돼지머리에 절을 하면서 사고없이 발사되기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방인들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극치는 참 하나님을 버리고 온갖 우상들을 숭배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인도에서는 흰 소들이 있는데 그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살아 있는 신들이 원숭이, 뱀, 독수리, 호랑이 등등 해서 3억 5천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런 신들을 노엽게 하지 않으려고 인간이 노예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이런 살아있는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일본에는 7백만의 우상의 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생각도 없는 우상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썩지 않는 영원한 존재인 반면에 우상들은 썩어질 유한한 세상 존재들의 형상들입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대치시키고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25절에서는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했습니다. 이방 종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못하도록 속임수를 썼습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도록 우상 숭배와 같은 속임수로 바꾸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우상 숭배와 성적인 방종을 함께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고대 사회에서 우상숭배와 음행은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의 한 부분이 음행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릴 때 마음으로 음행을 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우상 숭배를 영적인 음행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거절한 이방 세계의 가공할 죄악상을 곧 이어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종교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까지도 부패하게 됩니다. 참된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하나님을 버리게 되자 성적인 정욕뿐만 아니라 금지된 탐욕, 동물적인 욕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을 결혼 관계 속에서 친밀감, 연합, 재생산의 통로로 아름답게 만드셨으나 사탄은 이를 이용하여 더럽혔습니다. 성적인 욕망을 탐하게 되면 스스로의 몸을 욕되게 만들어 탐욕을 채울 대상으로만 대우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인생은 결국 이웃 관계까지 파괴하고 맙니다. 이웃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할 이유를 그들 스스로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할 때에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이웃들을 존경하고 사랑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을 동물이라고 생각하면 동물적인 욕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인간의 죄악상을 말하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자연스럽게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외쳤습니다. 

  둘째, 부도덕한 생활(26-32) :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람이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한다면 사람은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을 때 사람은 용감하게 죄를 짓고 추해집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비정상적인 성적 욕구는 동성애, 수간, 아동성추행으로 나타납니다. 로마 황제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이저는 모든 여인들의 연인이요 모든 남성들의 연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원하는 대로 성적인 향락을 추구했다는 뜻입니다. 로마 황제들 15명 중에 14명이 동성연애자들이었습니다. 당시 헬라와 로마 세계는 이성보다 동성간의 사랑을 더 고상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도 동성연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들을 소수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허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순리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처받은 경험 때문에 동성연애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습관적인 것을 원인으로 봅니다. 마치 마약처럼 한 번 빠지고 나면 그 쾌감으로 인해 행동을 계속적으로 유발한다고 합니다. 지금 선진국에서 동성연애는 합법화되었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단계로 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연애로 인해서 성병, 에이즈가 창궐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자녀들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구약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으로 보고 있고, 신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악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을 버린 데서부터 이런 죄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지 않으면 부패가 불가피하게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상실한 마음은 쓸모없는, 무가치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창조자 하나님의 빛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방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소외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 마음은 비천하고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무가치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한 목자님은 매일 아침 영적인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6개월을 먹지 않고자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실험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3개월을 지나면서 주체할 수 없는 죄악의 욕구를 감당할 수 없어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아니한 죄악을 깊이 회개하고 마음으로 또 신실하게 양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일 때 우리는 거룩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지고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빛을 비추십니다.

  상실한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29-31절에는 21개의 죄악 목록이 나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악의가 가득한 자요, 악독이 가득한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어쩌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력에 완전히 넘겨진 자들, 죄가 충만한 자들이라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창세기에서 노아 시대의 죄악을 설명할 때 죄가 관영하다고 했습니다. 상자에 구슬이 꽉 찬 상태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사람과도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악을 도모하는 자란 악을 꾸미고 조작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기존의 악행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악을 꾸미고 조작해 내는데 열심을 냅니다. 우매한 자란 미련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번역되는데 지적 판단력이 없어서 어리석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어둠 속에 빠져 어리석게도 악한 길을 방황하는 상태입니다. 무정한 자란 사랑이 없고 가정에 대한 애정이 결핍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무자비한 자란 긍휼과 자비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는 악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은 이웃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 만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을 무자비하게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타락이 갈 수 있는 마지막 길입니다.

  결론적으로 3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원칙과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취급합니다. 사람들은 악행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거워합니다. 다른 사람이 악행하는 것을 전적으로 찬동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악행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죄인들은 개인적으로 악행을 하고 사회적으로 범죄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악이 번성하기 좋은 대중적 여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덕 감정을 부패시켜 악을 양산하게 만듭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요즈음 방송, 잡지, 드라마, 소설 등 대중매체들입니다. 죄는 사회적 세력을 얻게 되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떠난 행위를 보여 주는데 마치 지옥의 뚜껑을 열어 보여준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속박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조그만 죄라도 지으면 그 죄가 우리를 속박하기 때문에 그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씻어야 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십자가의 보혈 앞에 나아가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간이 이토록 타락하고 이토록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야 합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할 때 인간의 죄악됨을 깊이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절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돕다가 상처 받고 나가떨어지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된 상태를 직시할 때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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